단일 파운드리가 시스템반도체 산업 관례
NPU 사업 힘 빼는 SK텔레콤

우리나라 대표 NPU(신경망처리장치) 기업인 리벨리온⋅사피온이 합병을 결정하면서, 향후 합작사가 어느 파운드리 기업을 택할지 관심사다. 시스템반도체 업계 관례상 두 파운드리 모두에 NPU 생산을 맡기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간 사피온이 보인 행보와, 합병 후 리벨리온이 경영을 주도한다는 점을 종합하면 TSMC 보다는 삼성전자가 NPU 위탁생산을 맡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관례상 단일 파운드리로 일원화 

 

리벨리온은 그동안 자체 설계한 칩을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통해 생산해왔다. 지난해 10월에는 삼성전자와 AI(인공지능) 반도체 설계⋅공급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한 바 있다. 이 회사가 삼성전자 4nm(나노미터) 공정을 통해 생산할 NPU ‘리벨'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가 개발한 12단 HBM3E와 함께 ‘아이큐브' 기술로 패키지된다. 

아이큐브는 삼성전자 AVP사업팀의 2.5D 패키지 기술의 이름이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4nm 공정과 ▲AVP사업팀의 아이큐브 ▲메모리사업부의 HBM3E를 턴키 방식으로 리벨리온에 공급하는 것이다. 그만큼 양사의 협력은 끈끈하다. 

이와 달리 사피온은 사업 초기부터 대만 TSMC를 파운드리로 활용했다. 사실 모회사가 SK텔레콤으로, SK 그룹과 삼성이 반도체 분야에서 경쟁하는 점을 고려했을 때 TSMC 외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사피온이 지난해 연말 공개한 서버용 NPU ‘X330’도 TSMC 7nm 공정에서 생산된다. 

이처럼 각사가 상이한 파운드리 파트너를 보유한 상황에서 하나의 법인으로 합쳐지면 파운드리는 일원화 할 수 밖에 없다. 복수의 파운드리를 쓰게 되면 각 파운드리가 가진 고유의 공정 정보가 상호 유출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사진=삼성전자

팹리스가 파운드리에 위탁생산을 맡기는 과정에서 파운드리는 팹리스에 일부 공정 정보를 오픈한다. 이에 계약과 함께 양사가 NDA(비밀유지협약)를 체결한다. 현재로서는 리벨리온-삼성전자의 NDA와 사피온-TSMC 간 NDA가 상호 충돌할 여지가 큰 셈이다. 

한 반도체 산업 전문가는 “애플⋅퀄컴⋅엔비디아 처럼 위탁생산하는 반도체 종류와 양이 많은 회사가 아니고서는 단일 팹리스가 하나의 파운드리와 거래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리벨리온⋅사피온 합작사 역시 삼성전자⋅TSMC 중 한 곳으로 일감을 몰아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NPU 사업 힘 빼는 SK텔레콤

 

그렇다면 남는 궁금증은 삼성전자⋅TSMC 중 어느 쪽으로 파운드리 일감을 몰아주느냐다. 이는 리벨리온과 사피온이 합병을 결정한 배경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리벨리온⋅사피온 간 합병은 지난 12일 전격적으로 발표됐지만, 모회사인 SK텔레콤은 이미 지난해 연말부터 사피온의 합병 파트너를 물색해왔다. 리벨리온이 합병 파트너로 낙점되기 이전에 역시 NPU 회사인 퓨리오사AI와 모빌린트에도 각각 합병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합병 추진 사실은 사피온코리아 경영진에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사피온코리아 류수정 대표조차 합병 사실을 공개 전날인 11일 통보 받았으며, 바로 다음날 사의를 표명했을 정도다. 류 대표는 삼성전자종합기술원 출신으로 SK텔레콤이 NPU 사업을 위해 공들여 영입한 인사다. 합병 후 합작사 경영은 리벨리온이 주도하기로 한 상황에서 류 대표가 회사에 남을 명분은 부족하다.

SK텔레콤 입장에서 보면 처음부터 합작사 경영 주도권을 가져올 의지는 낮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최근 SK그룹 구조조정을 통해 계열사 수를 줄이고 조직 슬림화를 추진하고 있는 점을 비춰볼 때 사피온 합병 작업 역시 비주력사업 정리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반도체 산업 전문가는 “사피온은 최근 진행하는 2000억원 규모의 ‘시리즈B’ 자금 조달이 난항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SK 그룹이 부족한 자금을 대느니 리벨리온에 붙여서 비주력사업을 정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NPU 사업에 대한 의지가 낮아진 상태라면 향후 파운드리 일원화 등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사피온 본사나 SK그룹쪽 입김이 먹혀들 가능성은 낮다. 두 회사 모두 서버용 NPU를 설계해왔다는 점에서 제품군 역시 리벨리온 주도로 통합되는 수순이다. 이 경우 파운드리는 삼성전자로, 디자인하우스는 DSP(디자인솔루션파트너) 소속인 세미파이브로 일원화 될 가능성이 높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리벨리온이 내년에 상장하면 SK텔레콤은 지분 매각을 통해 합작사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며 "'동거' 보다는 NPU 사업에서 힘을 뺄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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