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자금 투입하는 대신 한 발 빼는 대기업들
AI 추론용 NPU 시장 개화까지는 혹한기 버텨야

AI(인공지능) 붐과 함께 우후죽순 생겨난 NPU(신경망처리장치) 기업들 간 옥석 가리기가 진행되고 있다. SK텔레콤이 사피온코리아를 리벨리온과 합병시키면서 사업 전면에서 한발 물러선데 이어 한화그룹은 NPU 스타트업 뉴블라를 청산한다. 

AI 가속기 시장이 여전히 ‘엔비디아 천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다, NPU 회사들이 노리고 있는 AI 추론 시장 개화까지 버티기 어려웠다는 분석이다. 

사피온이 개발한 NPU를 슈퍼마이크로 AI 서버에 장착한 모습. /사진=사피온
사피온이 개발한 NPU를 슈퍼마이크로 AI 서버에 장착한 모습. /사진=사피온

 

리벨리온과 합병한 사피온, SKT는 2선 후퇴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합병은 국내 최대 NPU 전문업체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끌었다. 다만 사피온을 통해 NPU 사업을 육성해 온 SK텔레콤은 사실상 2선 후퇴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합병 논의 과정에서 리벨리온측에 경영권을 양보했고, 합병 전 SK측이 일부 지분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합병 후 최대주주가 되는 걸 적극 회피했기 때문이다. 

실제 사피온코리아 본사인 미국 사피온은 지난 8~9월 두 차례에 걸쳐 사피온코리아 지분 5.42%를 제 3자에 매각했다. 원래 100%였던 사피온코리아에 대한 사피온의 지분율은 이제 94.58%까지 낮아졌다. 이를 통해 리벨리온과의 합병 이후 존속법인이 SK 계열사로 편입되는 걸 방지했다. 

SK텔레콤이 2선 후퇴라면 한화그룹은 아예 NPU 계열사 하나를 청산하면서 사업에서 철수했다. 한화그룹은 지난달 NPU 팹리스인 뉴블라 청산을 결정하고, 한국 본사와 영국 지사 근무 인력 전원을 해고하기로 했다. 법인 청산 시점은 이달 말이다. 

통상 대기업에서 계열사 사업을 정리하더라도 인력을 전환배치하는 게 보통인데 뉴블라는 고용승계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한 반도체 산업 전문가는 “뉴블라가 진행하던 NPU 설계 프로젝트가 아직 진행 중인데 계열사에서 고용을 승계할 경우, 각종 채무와 권리 관계가 인력을 데려간 쪽에서 이어받게 된다”며 “이 때문에 한화측에서 전원 해고 방침을 내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뉴블라는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통해 첫 번째 NPU 칩을 생산했으며, 최근 가온칩스와 두 번째 NPU 개발을 논의했던 바 있다. 프로젝트가 정상 진행됐다면 이 역시 삼성전자 4nm(나노미터) 공정에서 생산될 예정이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한화가 뉴블라를 청산한데는 SK텔레콤의 사피온 합병 결정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며 “SK 정도의 ICT(정보통신기술) 회사에서도 어려운 사업을 한화에서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넘기 어려운 엔비디아의 벽, 갈길 먼 추론 시장

 

의욕적으로 NPU 사업을 추진했던 대기업들이 한 발 물러나는 것은 NPU가 타깃하고 있는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아서다. NPU는 엔비디아가 생산하는 GPU와 달리 AI 가속을 위한 전용칩이다. 범용성을 띈 GPU 대비 가볍고 빠르며, 심지어 싸다. 

그러나 시장조사업체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 점유율은 97.2%로 여전한 독점 체제다. AI 데이터센터 투자에 나서는 빅테크 기업들이 검증된 가속기 도입을 추구하고, 엔비디아의 AI 프로그래밍 툴인 ‘쿠다(CUDA)’ 접근성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AI 엔지니어 인력들이 10년 이상 쿠다로만 트레이닝 되다 보니 신규 NPU의 소프트웨어 사용에는 서투르다. 

사피온이 개발한 NPU 'X330'. /사진=사피온
사피온이 개발한 NPU 'X330'. /사진=사피온

이 때문에 NPU 전문 기업들이 기다리는 건 AI 추론 시장의 개화다. 현재의 AI 산업은 빅테크 기업들이 수조원을 들여 AI 데이터센터를 짓고 자신들의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국면이다. 수조원짜리 인프라를 마련하는 만큼 사전 검증된 플랫폼이 우선 도입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비해 AI 추론은 이미 학습된 모델을 기반으로 AI가 서비스 이용자들에게 필요한 결과를 내놓는 과정이다. AI 학습 대비 대규모 인프라가 필요하지 않을 뿐더러, 빅테크 외 기업들이 필요한 하드웨어여서 ‘가성(가격 대비 성능)비'가 중요하다. HBM(고대역폭메모리) 사용이 일반화 된 AI 학습용 GPU와 달리 AI 추론용 NPU는 GDDR 등 레거시 메모리로 구동하는 경우도 많다. 중소 규모의 이커머스, 콘텐츠 기업 등에서 AI 추론용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값비싼 ‘GPU+HBM’ 조합이 정답은 아닐 수 있다.

다만 추론 시장은 이제 막 개화 단계다. 오는 2030년 추론용 AI 가속기 시장이 1430억달러 수준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때까지는 어떻게든 NPU 기업들이 버텨 내야 한다. SK텔레콤⋅한화는 모회사 자금을 더 투입해 AI 추론 시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느냐, 아니면 사업에서 발을 빼느냐는 기로에서 후자를 택한 셈이다.

실제 사피온은 리벨리온과의 합병 결정 전 2000억원 규모의 ‘시리즈B’ 펀딩을 진행했다. 그러나 투자자들 반응이 시원찮았고 이에 모회사 자금을 투입하는 대신 합병을 추진하는 쪽으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NPU 업체 대표는 “서버용으로 5~7nm NPU를 개발하고 양산하는데 1000억원 안팎의 자금이 소요된다”며 “AI 추론 시장이 성장해서 자생력을 갖기 전까지는 외부 자금으로 버티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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