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 대비 20%p 높은 잔금 비중
AT 잔금 받기 전까지는 개별 프로젝트 적자 유지
전기차⋅배터리 산업 ‘캐즘’ 여파가 길어진 탓에 후방 산업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대비 AT(Acceptance Test) 잔금 비중을 높게 가져가는 관례까지 더해져 업황 회복까지 버티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최근 주요 배터리 장비업체 대부분이 고객사로부터 납기 연기 요청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배터리 장비 업계 덮친 납기 연장
KIPOST 집계 결과 올 들어 씨아이에스가 13건, 에이프로 6건, 엠플러스 4건, 피엔티 3건, 원익피앤이⋅하나기술이 각각 2건의 계약기간 연기를 공시했다. 고객사의 생산라인 투자 일정이 지연되면서 장비 납기가 미뤄진 것이다.
특히 씨아이에스⋅하나기술은 노스볼트와 각 3건, 1건씩의 공급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씨아이에스는 이미 계약 이행율이 20~70%에 달해 향후 대금 회수 작업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하나기술은 아예 계약을 종료하고 계약금액을 0원 처리했다.
노스볼트 외 배터리 제조사들과의 계약 상황도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씨아이에스가 삼성SDI에 올 연말까지 이행하기로 한 계약은 기간이 반년 연장됐고, 에이프로가 얼티엄셀즈와 체결한 계약도 기간이 17개월 늘어났다. 얼티엄셀즈는 LG에너지솔루션과 미국 GM(제너럴모터스)의 합작사다.
국내 배터리 3사는 이미 발표한 대미 투자를 트럼프 행정부 등장 이후로 미루는 추세다. 지난 2022년 IRA(인플레이션감축법) 발효 이후 시작된 투자의 경우, 트럼프 행정부 의지에 따라 보조금 지원 금액이 달라질 수 있다. 보조금을 수령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으면 투자 실행이 무기한 연기되는 수순이다.
앞서 배터리 3사를 합쳐 미국에 15개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절반은 IRA 발효 이후 나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한국 배터리 업계가 계획한 미국 설비투자 규모는 540억달러(약 77조4900억원)에 달한다.
특히 배터리 장비 업체들을 괴롭히는 건 업계 관행처럼 자리 잡은 과도한 AT 잔금 비중이다. AT는 배터리 장비 회사가 설비를 공급한 뒤,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검수하는 과정을 뜻한다. 같은 장치 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는 AT 이후 받게 되는 잔금 비율이 5~10% 정도다.
그러나 배터리 업계는 최소 20%, 많게는 30%까지 AT 잔금을 남겨둔다. 배터리 장비 업계 영업이익률이 평균 10~15% 안팎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AT 잔금을 받기 전까지는 프로젝트 적자 상태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AT는 시행 시기가 고정돼 있지 않고 고객사가 자의적으로 정한다. 배터리 업체가 장비를 반입받고도 양산 일정이 미뤄지면 AT를 굳이 빨리 치를 유인이 떨어진다. 장비사가 AT를 통과하는데로 당장 고객사 현금이 유출되기 때문이다. 장비 투자가 중단된 경우, 앞서 입고된 설비들은 AT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다.
한 배터리 장비 업계 전문가는 “예컨대 장비 투자가 잠정 중단되어서 코팅 설비가 입고되지 않으면 앞단의 믹서 설비들은 AT를 치를 방법이 없다”며 “20~30%의 현금이 고객사에 묶일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