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규모의 경제'... 작년엔 인수합병, 올해는 인력확보
규모는 키웠는데 매출은?... 국내 팹리스 업계 부진에 코로나 19까지 겹쳐

지난해 국내 디자인하우스 업계 키워드가 인수합병(M&A)이었다면, 올해는 인력이다. 

에이디테크놀로지는 에스엔에스티(S&ST) 인수와 함께 한국과 베트남을 통틀어 직원 규모를 500명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다. RISC-V 디자인하우스 세미파이브도 인력 확보를 위한 투자(시리즈A)를 거의 마무리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인력을 늘렸으면 그만큼 매출도 성장해야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인수, 그 다음은 인력... 공통점은 ‘규모의 경제’

파운드리 생태계 강화를 위해 열린 'SAFE 포럼'에서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박재홍 부사장이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삼성전자
파운드리 생태계 강화를 위해 열린 'SAFE 포럼'에서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박재홍 부사장이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삼성전자

삼성전자가 올해 국내 삼성전자 디자인하우스 파트너(DSP)에 던진 요구사항은 인력 확보다. 적어도 200여명 이상의 규모를 갖춰야 대규모 과제를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업계는 인수합병이 됐든, 해외 엔지니어 채용이 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력 확보에 나섰다.

에이디테크놀로지는 지난 1분기에만 이글램·이구루·아르고·이씨큐 등 4곳의 디자인하우스를 인수했다. 박준규 이구루 대표는 에이디테크놀로지 수석부사장으로 근무 중이다. 최근에는 베트남 디자인하우스 에스엔에스티(S&ST)와의 인수 논의도 마무리했다. 당초 1분기 논의를 끝내기로 했지만, 사업 방향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면서 인수가 늦어졌다. 에스엔에스티까지 인수하면 에이디테크놀로지의 전체 규모는 베트남과 한국을 합쳐 약 200여명으로 껑충 뛴다.

이 회사는 늦어도 내년까지 회사 규모를 500명 이상으로 키울 계획이다. 이를 위해 에스엔에스티를 통해 베트남 현지 인력 100명을 추가 채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만 500명 이상의 디자인 엔지니어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해외 종속회사를 통해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라며 “베트남은 젊은 엔지니어들이 많아 인력난이 한국처럼 심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이파이브의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는 웹(클라우드) 기반 반도체 설계 페이지로 넘어가는 버튼이 있다. 저 버튼을 누르면, 원하는 칩을 고르거나 새로운 칩을 요구할 수 있다.
사이파이브의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는 웹(클라우드) 기반 반도체 설계 페이지로 넘어가는 버튼이 있다. 저 버튼을 누르면, 원하는 칩을 고르거나 새로운 칩을 요구할 수 있다./사이파이브

RISC-V 코어 업체 사이파이브(SiFive)의 국내 계열사 세미파이브도 최근 시리즈A 투자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투자금액은 대부분 인력 확보에 쓸 계획으로, 현재 100명 규모에서 내년 200~300명 이상으로 직원을 늘릴 예정이다. 투자 금액은 약 150억원 규모로 알려졌다.

알파홀딩스와 하나텍 역시 추가 M&A와 인력 확보에 나섰다. 지난해 플러스칩을 인수한 알파홀딩스는 늦어도 3분기까지 몇몇 디자인하우스 업체의 인력을 영입하기로 했다. 하나텍도 신입·경력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채용, 규모 확대에 매진하고 있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업체들 사이에 인력 쟁탈전이 시작됐다”며 “이 와중에도 회사를 나가 새롭게 디자인하우스를 세우는 사람들도 많아 서로 좋은 인력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눈치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임직원 100명 이상인 국내 디자인하우스는 단 한곳도 없었다. 삼성전자 디자인하우스 중에서는 알파홀딩스가 유일했고, TSMC의 가치사슬협력자(VCA)였던 에이디테크놀로지는 70여명 남짓으로 그 뒤를 이었다. 나머지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은 30명 이하 소규모 업체들 뿐이었다.

인수합병으로 규모를 키울법도 했지만 국내 팹리스 업체들이 수년째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었고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삼성전자도 용역을 제외하고는 줄 수 있는 과제가 한정적이었다. 그렇다보니 인수합병을 할만한 여유 자금이 부족했고, 여유 자금이 있더라도 수요가 없는만큼 굳이 인수할 필요성이 없었다.

한 디자인하우스 대표는 “인수합병을 하면 좋겠다는 건 모두가 공감했지만, 대부분의 업체들이 그 정도 규모로도 먹고 살만했다”며 “가장 큰 고객사인 삼성전자 또한 통폐합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2017년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가 시스템LSI 사업부에서 떨어져나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디자인하우스는 팹리스와 파운드리를 잇는 생태계의 주요 축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설계 흐름도와 생태계 업체들의 활동 범위./KIPOST
반도체 설계 흐름도와 생태계 업체들의 활동 범위./KIPOST

삼성전자가 규모의 경제를 요구한 건 지난해다. 이에 알파홀딩스와 하나텍, 세미파이브, 에이디테크놀로지, 코아시아가 화답했다. 알파홀딩스와 하나텍이 기존 삼성 DSP였고 세미파이브 등 나머지 3개사는 새롭게 삼성 SAFE 생태계로 편입됐다.

알파홀딩스는 지난 2018년 하반기 백엔드(Back-end) 설계 인력이 한꺼번에 유출되는 악재를 겪었지만 발빠르게 에이디텍을 인수, 규모를 유지했다. 지난해에는 삼성전자 상보성금속산화물반도체(CMOS) 이미지센서 백엔드 사업을 하는 플러스칩을 인수했다.

하나텍은 지난해 10월 실리콘하모니와 합병 계약을 맺었다. 하나텍은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8인치 웨이퍼를 사용하는 팹리스에게 턴키 서비스를 제공한다. 실리콘하모니는 전용 반도체(ASIC) 및 시스템온칩(SoC) 설계까지 하는 업체로, 글로벌파운드리(GF)의 디자인하우스 파트너이기도 하다.

세미파이브는 삼성전자 DSP인 세솔반도체와 로직 설계 업체 다심을 인수하면서 설립 1년도 채 되지 않아 100명 규모로 회사를 키웠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코아시아는 넥셀을 인수하고 코아시아세미를 세우면서 DSP 자격을 따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전자 입장에서 국내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은 오합지졸이었다”며 “공정 고도화로 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 적어도 50명 이상의 엔지니어가 필요한데 그럴 정도로 규모가 큰 기업이 드물었고, 그래서 업계에 ‘규모의 경제’를 가장 먼저 요구했다”고 말했다.

 

인력 늘리면, 그 다음은... 

통폐합으로 오합지졸이던 국내 디자인하우스들은 어느 정도 성장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아직 글로벌유니칩(GUC)·알칩(Alchip) 등 TSMC의 VCA와 비교하면 4분의1에서 5분의1 규모밖에 되지 않지만, 삼성전자의 생산능력(Capacity)이 TSMC의 6분의1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인력을 확보하면 그만큼 매출도 커져야한다. 규모를 키웠다지만 아직 각 디자인하우스들이 GUC나 알칩만큼의 솔루션 역량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업체들이 자생력을 갖출 정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프로젝트 실적(Reference)이 필요하고, 레퍼런스를 쌓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롤스로이스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여러 업체들과 협력, 데이터 분석 전문가 연합체 '이머2전트(Emer2gent)'를 구축했다./롤스로이스<br>
사진=롤스로이스.

하지만 수요는 그만큼 많지 않다. 국내 팹리스 업계는 여전히 부진한 실적을 내고 있고, 여기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텔레칩스 등 그나마 성과를 내던 기업들도 타격을 받은 상황이다. 업계는 당초 5~6월 쯤 코로나19의 확산이 끝날 것으로 봤지만 이제는 내년까지 여파가 이어질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해외 고객사를 유치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다. 대형 고객사의 경우 파운드리를 먼저 선택한 다음 디자인하우스를 정하는데 삼성전자는 TSMC보다 제공하는 공정 포트폴리오도, 생산능력도 적어 업체들이 따낼 수 있는 프로젝트 자체가 한정적이다. 

이미 TSMC의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을 꽉 쥐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GUC만 해도 전체 매출의 83%를 대만을 제외한 해외에서 벌어들인다. 국내 디자인하우스 업체들 중 해외 업체의 프로젝트를 진행해본 업체는 손에 꼽는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해본 경험이 있는 업체가 거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TSMC의 VCA였던 에이디테크놀로지조차 미국 시스코의 7나노 시스템온칩(SoC)을 수주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업계에 인력 확보를 요구하면서 규모를 키워놓으면 지금처럼 전체 과제에서 일부를 쪼개 용역을 주는 게 아니라 과제를 한꺼번에 턴키 형식으로 줄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업계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지금 당장은 인력 확대가 시급하다지만, 올해 상반기 그 어떤 업체도 레퍼런스로 쓸만한 프로젝트를 따냈다거나 하는 소식이 없다”며 “생태계가 탄탄해야 파운드리도 성장할 수 있는만큼 인력 파견 및 교육 등 더 긴밀한 협력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KIPOST(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