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022년에 오른 가격, 아직 그대로
과점체제인 부품들은 한번 오르면 안 내려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업체들이 부쩍 높아진 자재값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올들어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설비투자가 크게 줄었음에도 글로벌 인플레이션 탓에 전반적으로 자재 가격이 고공행진 하고 있다.
수주 경쟁이 치열한 장비는 완제품 가격에 자재비를 전가하는 것도 어려워서 올해 매출과 영업이익 양쪽에서 큰 압박을 받을 전망이다.
전장부품, 쇼티지때 올린 가격 그대로
장비 업체들이 단가 상승을 크게 체감하는 품목은 배선과 모터 등 전장류다. 이들 전장품은 이미 지난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공급망 이슈가 불거지면서 가격이 크게 올랐다. 당시 초정밀 서보모터의 경우, 가격이 최소 2배 이상 상승했다. 장비 내 전력과 신호를 연결하는 고전압 커넥터와 배선용 부품 역시 2~3배 가까이 단가가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최근 각종 칩과 센서 같은 부품 공급부족 사태가 해소됐음에도 자재 공급 가격은 거의 그대로라는 점이다. 한 반도체 장비업체 대표는 “6개월 이상 걸리던 납기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2020년 이전 대비 2~3배 올라버린 자재비는 내려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반도체⋅디스플레이용 장비 내에 쓰이는 전장류가 워낙 소수 업체 과점 체제라, 가격 상승은 빠르고 하락은 느리게 반영하는 탓이다. 초정밀 서보모터는 일본 미쓰비시⋅야스카와전기⋅파나소닉 3사가 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특히 가장 정밀한 거동이 필요한 부분에는 미쓰비시가 독점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한번 올라간 공급 단가가 잘 내려오지 않는다.
최근 글로벌 인플레이션에 인건비 상승까지 겹치면서 부품 공급가격 인상을 재차 부채질하고 있는 측면도 크다.
한 반도체 장비업계 전문가는 “지난해 고환율 탓에 올라갔던 수입가격 만큼만 최근의 구매가격 하락에 반영됐다”며 “사실상 현지에서 공급하는 가격은 거의 제자리”라고 설명했다.
줄어든 발주에 실적 압박
문제는 최근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설비 투자가 줄어들면서 가뜩이나 장비 업황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매출 하락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재 가격까지 고공행진하면 수익성이 더 크게 나빠질 수 밖에 없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서는 SK하이닉스 협력사들의 주름살이 깊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상반기 장비 발주량을 당초 가이던스 대비 최대 70% 삭감했다. 그나마도 아직 하반기 발주 전망에 대한 자료는 협력사들과 공유하지도 못했다.
SK하이닉스는 원래 매년 연말 전에 이듬해 1년치 발주 계획을 공유해왔으나 올해는 반년치만, 그것도 대폭 삭감한 수준으로 내놓은 것이다. 한 SK하이닉스 협력사 관계자는 “SK하이닉스측에서 오는 4월에 하반기 발주 규모에 대해 공유하기로 했다”며 “메모리반도체 시황을 감안하면 상반기보다 크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협력사들은 SK하이닉스 대비해서는 비교적 나은 편이지만, 상반기 시황에 따라 하반기 투자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는 31일 실적발표 후 열린 컨퍼런스콜을 통해 “올해 설비투자를 지난해와 유사한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또 다른 장치 산업인 배터리 분야는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에 비해서는 꾸준하게 발주가 나오는 편이다. 그러나 미국 IRA(인플레이션방지법) 발효에 따라 국내 셀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투자 거점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변수가 생겼다. 중국 난징⋅시안 등 증설만 하면 되는 공장들에 비해 미국은 이제 한창 공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애리조나(LG에너지솔루션), 코코모(삼성SDI), 켄터키(SK온) 등은 장비가 반입되기까지 최소 2년은 걸린다. 이 때문에 올해와 내년에는 기대만큼의 장비 발주가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 배터리 장비업체 대표는 “국내 셀 업체들이 IRA 이후 중국 내 투자를 늦추는 반면 미국 투자에 더 속도를 내고 있다”며 “장비 투자 관점에서는 1~2년 정도 발주 공백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