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A 게임 첫 VR 전용 출시
세계 최대 ESD 운영사 밸브, VR 생태계 키운다

오는 3월 출시할 신작 게임 ‘하프라이프 : 알릭스(Half-Life : Alyx, 이하 하프라이프)’는 게임 업계는 물론, 하드웨어 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1998년 선보인 하프라이프 초기 버전이 1인칭 슈팅(FPS) 게임 장르를 대중화시킨 작품인데다, 이번에 트리플A(AAA)급 게임으로는 처음 가상현실(VR) 전용 게임으로 출시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트리플A 게임에 일부 VR 모드가 차용된 적은 있었지만, 처음부터 VR 전용으로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프라이프 : 알릭스' 트레일러. 트리플A급 게임으로는 처음 VR 전용 출시된다. /자료=스팀
'하프라이프 : 알릭스' 트레일러. 트리플A급 게임으로는 처음 VR 전용 출시된다. /자료=스팀

FPS에 서사 구조 첫 도입한 하프라이프

 

미국 게임 제작사 밸브코퍼레이션(이하 밸브)이 13년만에 후속 시리즈를 내놓는 하프라이프는 FPS 게임 역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1998년 하프라이프 첫 버전 출시때만 해도 밸브는 무명 업체에 불과했다. 하프라이프의 성공에 힘입어 일약 메이저 게임사로 도약했다. 2004년 출시된 하프라이프 후속은 ‘올해의 게임(GOTY)’ 타이틀을 17개나 수상했다. 

사실 하프라이프는 FPS의 시초는 아니다. 오히려 FPS가 처음 범람하던 1990년대를 시기적으로 가장 잘 이용한 게임이다. 

당시 하루가 멀다 하고 출시되던 FPS 중 하프라이프가 단연 돋보인 건 게임 안에 서사 구조(스토리텔링)를 처음 도입한 덕분이다. 종전 FPS는 1인칭 주인공이 총을 쏘고, 사물을 깨부수는 동작을 복잡한 물리 엔진을 동원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만 몰두했다. 화면이 화려한 것과 별개로,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 몰입하기는 힘든 구조다.

그러나 하프라이프는 주인공을 거대한 이야기 틀 속에 대입함으로써 이 같은 단순함을 벗어났다. 이 때문에 하프라이프는 단순한 게임이라기 보다는 게이머가 한편의 영화를 완성시켜가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밸브는 게임에 서사를 도입하기 위해 어드벤처 게임업체 시에라엔터테인먼트와의 협업도 진행했다. 이후 하프라이프에서 영감을 받은 수 많은 FPS들이 스토리텔링 기법을 경쟁적으로 도입했으나 하프라이프와 같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FPS에 이야기 구조를 도입해 몰입감을 높인 건 하프라이프가 처음 시도했다. 자료는 FPS 게임 중 한 장면. /자료=KIPOST
FPS에 이야기 구조를 도입해 몰입감을 높인 건 하프라이프가 처음 시도했다. 자료는 FPS 게임 중 한 장면. /자료=KIPOST

첫 VR 전용 트리플A 게임

 

이번에 밸브는 13년 만에 하프라이프 신작을 내놓으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바로 트리플A급 게임으로는 처음 VR 전용으로 출시하는 것이다. 통상 게임 타이틀은 제작비에 따라 가장 저렴한 ‘인디 게임’부터 트리플A급까지 나뉜다. 트리플A급은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다. 

트리플A급 게임 제작에는 최대 수백억원의 자금이 투입된다.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트리플A 게임일수록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기 어렵다. 자칫 생경함이 지나쳐 기존 게이머들에게 외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비를 고스란히 날리지 않기 위해서는 익숙한 플랫폼, 기존의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검증된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것과 유사하다.

VR이 게임 업계의 떠오르는 화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트리플A 게임을 VR 전용으로 론칭하기에는 아직 부담스럽다. VR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최소 수십만원을 들여 VR 기기를 구입해야 하는데, 이것이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잘 만들어 놓고도 VR 기기 보급이 미진해 제작비를 날릴 가능성이 크다. 

스팀 월간 활성 이용자 9000만명 중 VR 기기를 이용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과 기기 종류. /자료=스팀
스팀 월간 활성 이용자 9000만명 중 VR 기기를 이용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과 기기 종류. /자료=스팀

그렇다면 게임 이용자 중 VR 기기를 사용하는 계층은 얼마나 될까. 이는 온라인 게임 유통 플랫폼(ESD) 스팀이 공개한 자료에 잘 나타난다. 지난해 12월 기준 스팀 이용자 중 VR 기기를 사용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09%다. 

스팀의 활성화된 이용자가 약 9000만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약 98만명만이 VR 기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1년 전 같은 기간 72만명에 비하면 늘기는 했지만, 아직 이용자층 두텁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밸브는 VR 기기 브랜드를 가리지 않고 하프라이프를 지원함으로써 이 같은 장벽을 넘기로 했다. 밸브의 자체 VR 기기인 ‘인덱스’ 외에도 오큘러스의 ‘리프트’나 HTC ‘바이브’에서도 하프라이프를 구동할 수 있다. 독자 플랫폼을 고집하는 전략으로는 잠재 고객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또 하프라이프 출시 이후 인덱스 구매 고객에게는 하프라이프 게임을 무료로 제공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VR 기기 진입 장벽을 최대한 낮춘다는 의도다.

 

밸브, 세계 최대 ESD 운영사...VR이 게임 판 바꿀 것

 

그동안 VR은 ‘만년 유망주’였다. 하드웨어 진영에서는 즐길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콘텐츠 업계는 하드웨어 보급률이 낮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아직 1%에 불과한 VR 보급률이 이를 대변한다.

밸브 '인덱스'. 하프라이프 출시 이후 구매할 경우, 하프라이프를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사진=밸브
밸브 '인덱스'. 하프라이프 출시 이후 구매할 경우, 하프라이프를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사진=밸브

그러나 하프라이프의 VR 전용 출시는 이 같은 굳건한 구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하프라이프 제작사인 밸브가 신기술 도입을 통해 게임 업계 판도를 여러번 뒤집어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밸브는 게임 제작사이자 세계 최대 ESD인 스팀을 개발, 운영하는 업체이기도 하다. 일반 소매 유통과 비교하면, 밸브는 대형마트를 운영하면서 ‘PB브랜드’ 제품까지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 구조다. 스팀은 게임을 구매해 플레이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게임방송을 즐기고 유저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생태계 그 자체다. 

스팀은 원래 밸브가 자사 게임의 자동 업데이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플랫폼이다. 유통도 자사 게임만을 취급했다. 그러다 2005년 타사 게임을 스팀에 올려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최대 ESD로 성장했다. 이제는 메이저 게임 업체들도 스팀을 통하지 않고서는 게임 출시가 불가능할 정도다. 

밸브의 VR 전용 게임 출시가 단순히 한 게임 제작사의 타이틀 제작으로만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다. 밸브가 하프라이프 출시 이후 인덱스를 포함한 VR 기기 보급률을 제고하는데 최대한 집중할 것은 자명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프라이프를 판매할 방법이 없다. 이는 다른 게임 제작사들의 VR 게임 출시 욕구를 자극함은 물론이다. 

스팀 캡처화면. 스팀을 운영하는 밸브는 게임 제작사이자, 최대 유통 플랫폼이다. /자료=스팀
스팀 캡처화면. 스팀을 운영하는 밸브는 게임 제작사이자, 최대 유통 플랫폼이다. /자료=스팀

한 게임업체 수석 개발자는 “밸브는 FPS 게임으로는 처음 이야기 구조를 도입해 몰입감을 높였다”며 “VR이야말로 게임 몰입감을 높이는 데 최적의 기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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