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에 숨겨진 중국의 뼈아픈 역사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에는 천하제일의 무인을 정하는 무림 대회 화산논검(華山論劍)이 나온다. 이는 실제 현실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소림파, 무당파와 치열하게 각축했던 화산파도 사실은 김용 등 무협지 작가가 고안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화산에는 원래 도교의 도장들이 많았다. 화산파의 유례도 신빙성을 담보하기 힘든 여러가지 가설만 있다.


천하의 무림고수들이 자웅을 겨루었다던 화산논검 (華山論劍)



화산은 중국의 험준한 산을 일컫는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이다. 시안(西安) 동쪽으로 약 120km, 시안과 정저우(鄭州)의 중간인 화인시(华阴市)에 위치하는데, 고속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시안에서 1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도교의 성지 중 하나다.


필자는 70∙80년대 학창시절 김용 선생의 영웅문, 의천도룡기 등 무협지에 깊이 심취했었고 지금도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아마 요즘 중장년층 ‘아재’들 대부분은 청소년 시절에 밤새 무협지를 읽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가 보고 있는 와호장룡 같은 중국, 홍콩의 무협영화의 뿌리도 이런 무협지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정파 무림을 일컫는 구파일방(九派一幇), 즉 소림∙무당∙아미∙곤륜∙화산∙점창 등 9대 문파와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은 우리 한국 사람들의 귀에도 익숙하다. 그런데 이 구파일방 중 역사상 실존했던 문파는 소림과 무당밖에 없고 나머지 칠파일방은 70∙80년대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대만 무협작가 와룡생 선생의 창작물이라고 하면 어리둥절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대표적 정통무림인 소림파와 무당파 조차도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고, 있다고 해봐야 별볼일 없는 자경집단 수준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림사 무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당태종 이세민을 소림사 승려들이 도왔다는 기록인데, 무슨 기술을 사용했는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다음 기록은 명나라 초기에 홍건적이 쳐들어와 불상의 금박을 벗기며 다 털어갔는데, 승려들이 다 도망가서 홍건적의 난이 진압될 때까지 한 명도 못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후 16세기 복건성의 장군 유대유가 소림사를 방문하니 무술이 크게 쇠퇴해있어 승려 두 명을 군대로 불러 훈련시켰고, 그 두 명의 승려로부터 소림 무술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소림사의 불목하니로 있던 긴나라왕이 홍건적을 다 때려잡았다고 ‘뻥’을 친 게 지금까지 전설처럼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실제 소림사가 무술로 유명해진 계기는 한참 후 현상수배된 살인범죄자, 낙오된 도적패, 멸망한 나라의 장수 등 온갖 부류의 무술인들이 밥을 얻어먹으려고 모여든 데서 기인한다고 한다. 그들의 노하우가 점점 쌓여 오늘날의 소림사 무술이 형성되었다. 그나마 이 무술들도 문화대혁명 때 다 사라져 현재 소림사에서 가르치는 무술은 무당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다른 곳에서 최근에 끌어온 무술이라 한다.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면벽수련 하다 허약해진 몸을 회복하려고 소림권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실은 달마대사 시절에는 소림사라는 절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소림파와 함께 중국 2대 무술로 꼽히는 무당파 무술 ‘태극권’도 그 창시자 장삼풍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가 송나라 사람인지 명나라 사람인지 아직도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무협지 속에서 장삼풍은 강호를 질타하며 천하를 떠도는 무림의 고수로 일당백의 무술실력으로 산을 뜷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이 있고, 심지어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신통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가 창시했다는 태극권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무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명나라 영락제가 무당산을 대규모로 정비하고 장삼풍의 동상까지 세운 것도 백성들에게 황위 찬탈과 관련된 진상을 숨기기 위한 기만술이라고 알려진다. 그런데도 왜 현대 중국인들은 아직도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무협지와 무협영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1990년 상영된 이연걸 주연의 '황비홍' 포스터

 



치욕의 역사가 국수주의를 낳다


유럽사람들은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300년 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강탈한 금과 은을 갖다 바치면서 중국에서 도자기와 차를 바가지 쓰면서 샀다. 하지만 중국의 배, 포, 군대가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중국을 침탈하기 시작한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80만 대군으로 고작 4000명에 불과한 영국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1차 아편전쟁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영국 군함 2척의 위력에 청나라가 항복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94년 청나라는 경제규모가 5분의 1규모인 일본과 청일전쟁으로 붙어 또 한번 굴복했다.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까지 약 100년 동안 서구 열강과 일제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했고 분열과 내전을 거치면서 ‘세계의 중심’에서 주변국이자 최빈국으로 전락한다. 이런 시대분위기 속에서 서양 열강을 이겨보려는 중국 민중들의 열망은 ‘황비홍’류의 판타지로 나타난다. 영화에서 보는 황비홍은 불의한 영국 상인들과 일본 무사들을 혼내 준다. 영국인이 데려온 독일 개 셰퍼드를 한발로 차서 죽였다는 기록도 있지만 실제 그가 영국인들을 혼내줬는지는 의문이다. 황비홍은 설화적인 요소가 많다는 이유로 최근 광둥성이 선정한 역사위인 116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이런 황비홍을 주인공으로 중국과 홍콩에서는 100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으니, 망국의 치욕을 극복하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강렬한 열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학생시절에 무협지와 무협영화에 심취해있었던 내 머리 속에 항상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중원에는 기라성 같은 무림지존(武林至尊)이 많은데, 왜 이들이 역사책에는 등장하지 않는가?” 실제 1899년에 발생한 의화단 운동에서는 다양한 무술 고수들이 리더로 큰 활약을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화살과 창∙칼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싸움 좀 잘한다는 무술의 고수들이 활약하기란 쉽지 않다. 왜구가 명나라 동부 해안에서 판을 칠 때도 무술 고수들을 몇 번 앞세워 봤는데, 칼 잘 쓰는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처참하게 당했다고 한다. 최근에도 중국의 쿵푸나 한국의 태권도는 실전 격투기인 UFC에서 별로 힘을 못쓴다. 몇 년 전에 소림사의 무술고수가 UFC에 참가했다가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참하게 K.O 당했던 적이 있었다.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UFC에서 활약하는 선수는 전세계 통틀어 한두 명에 불과하다.


무협소설에서 절정의 고수인 우리 편 선수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폴짝폴짝 뛰고 장풍으로 사악한 적을 무찌르면서 중국인의 패배의식과 정신적 외상을 치유해왔다. 협객들은 무기력한 한족 국가를 대신해 사악한 이민족과 싸우고, 강호는 나름의 규율과 역사를 가진 독자적이고 완결된 세계가 된다. 무협지의 원류가 ‘수호지’, ‘사기’, ‘열전’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하면 1920년대 시작된 100년 남짓 역사를 가진 소설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 중심에는 같은 중국역사에 한없는 애정을 가진 김용, 와룡생 같은 우국충정을 가진 작가들이 자리잡고 있다. 김용의 사조영웅문 같이 20세기 중국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이 있기도 하지만 무협소설 대부분은 즉흥적 흥미를 유발하면서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문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3류 작품들이다. 요즘 제작되는 중국 역사 영화는 순수 무협 판타지보다는 초한지, 삼국지 등 역사적 사실이나 양귀비, 진시황, 당태종 등 역사적 인물에 애국적 무협 판타지를 가미한 작품들이 많다.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크면서 100여 년 치욕을 무협 판타지로 씻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만나 본 중국사람들은 애국심이 매우 강해서 가급적 그들과 만나면 역사 이야기나 중국 비판은 삼간다. 내 느낌에 중국인들은 한국 80년대 수준의 국수주의에 사로잡힌 듯 하다. 요즘의 한국도 맹목적이고 비합리적 국수주의가 큰 문제가 되는데, 앞으로 중국사람들의 국수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는 동아시아에 훨씬 더 큰 위협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치욕의 역사와 무협 판타지, 강렬한 국수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라서, 한두 세대 이상의 세월이 지나야 해결될 것으로 예상한다.   



조선 '소중화'에서 얻은 교훈, 세상의 도도한 흐름에 올라타자 


일본에는 발을 붙이지 못한 무협 판타지가 70∙80년대 한국을 풍미했던 것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현실이 같은 맥락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중∙장년층도 무협지를 읽으며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열패감을 잊으려 했을 것이다. 군사정권 시대, 권위주의의 망령은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 3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한국사회를 떠돌고 있다.


조선후기 소중화 사상(小中華思想)을 가진 조선의 엘리트들은 앞선 청나라와 유럽의 문물을 오랑캐의 것이라고 해서 애써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문명의 표준이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세계최고 문명국이라는 자만심에 제국주의 시대의 냉정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청이 지배하는 대륙을 ‘비리고 더러운 원수의 땅’(정조 시대 성리학자 김종후)이라 규정하고, 대외관계에서는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대한제국 학부대신 신기선)고 선언한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혐청’은 중국에 대한 일반 조선인들의 무지를 양산했고, 이는 다시 오늘날 한국인의 중국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의식으로 발전했다.


필자는 달러 벌이 일꾼으로 지난 27년간 중국에 수천억 원의 기계, 장비, 철강 등을 팔면서 중국인과 수많은 협상과 거래를 했다.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 사람들을 경험해왔다. 그동안 봐왔던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등 중국 지도자는 동시대 한국의 대통령들보다 더 큰 비전을 가졌고 유능했다. 중국에서 큰 규모의 텐트공장을 운영했던 친구가 10여년 전에 중국의 저임금 근로자들이 가지고 있는 대국의 자존심을 이야기한 것이 오랫동안 귓가를 맴돈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유능하지는 않지만, 패를 보여주지 않는 만만치 않은 협상가들이었다. 중국 기업인들은 경험과 지식은 높은 수준이 아니었지만 돈에 대한 집착, 사업에 대한 집중력, 특히 협상능력은 우리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원탁의 식당 테이블에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합의를 이끌어가는 대국 중국사람들에게는 상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조선시대 왕들이 정권유지를 위해 농업경제 중심의 사농공상의 주자학적 질서를 강요하며, 외적의 침입을 막는다고 백성들을 수레도 못 다니는 꼬부랑길로 다니게 할 때 중국은 세계경제의 30%를 차지하는 상공업 대국이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아직도 냉전시대, 군사독재 시절의 극단적 사고 패러다임, 심지어 소중화사상의 주자학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조기를 휘날리시는 한국의 어르신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불과 몇 십년 중국보다 잘 살아보고 ‘11억(실제는 15억) 거지떼’ 운운하면서 중국을 무시하는 철부지 엘리트들의 태도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 역사에 대한 섣부른 지식으로 환단고기류의 위대한 상고사를 주창하는 국수주의도 사라져야 한다.  제대로 된 세계관과 역사관 없이 어떻게 급변하는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식당에서 떠들고 매너 없다고 중국인을 경시하고, 미국을 이유 없이 떠받드는 우리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사대주의는 바뀌어야 한다. 불과 100여년 전에 소중화를 자처하며 사라져버린 명나라를 흠모했던 사대주의자들이 나라를 망쳤다면, 21세기 초반에는 구시대적 냉전시대 패러다임의 숭미주의자들이 중국을 경시하며 이 나라를 또 망칠 수 있다.


요즘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다. 10년 전 전세계 시가총액 10대 기업과 오늘날 시가총액 10대 기업을 비교해보면 천지가 개벽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차이나모바일은 무섭게 커왔고, 앞으로도 무섭게 클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넓게 보고 다원화, 네트워크화되는 세상의 도도한 흐름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 한국 기득권 엘리트의 근거없는 ‘우물안 개구리’식 문화적 우월감, 기묘한 대미 열등감 등 편협한 세계관이 한국을 더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얼마 전 미국 유명 정치경제학자와 이메일 대담을 했는데, 그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의존하고 정치군사적으로는 미국에 의존하는 한국이 미래에 어떤 스탠스를 취할 것인가?’였다. 한국,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는 이때 G2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상황이 될지, 동북아의 균형추가 될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다. 



중국 미인의 대명사, 양귀비는 얼마나 예뻤을까?  침어낙안(浸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중국사람들은 양귀비를 비롯해 춘추전국시대 월국(越國)의 서시, 한나라 원제(元帝) 때 궁녀 왕소군, 삼국시대 초선을 4대 미인으로 꼽는다.


워낙 과장이 심한 중국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이 4대 미인의 미모를 찬양하는 글은 재미있다. 물고기는 헤엄치는 것을 잊어 강바닥에 가라앉았고, 기러기는 날개를 움직이는 것을 잊어버리고 땅에 떨어졌고, 지나가던 달은 구름 뒤로 숨었으며 꽃은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렸다고 한다. 이런 과장법은 중국 역사책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미인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자세히 살펴 보자.



화청지에 있는 양귀비의 석고상.


서시는 춘추 말기인 기원전 5세기경 월나라(현재 저장성 회계지역) 출신으로 나무 장수의 딸이었다.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워서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으면 강물에 비친 그녀의 자태에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것을 잊어 강바닥에 가라 앉았다고 해서 '침어(浸魚)'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서시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스파이로 미인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에게 패하자 월의 충신 범려는 보복을 위해 그 나라 최고 미인인 서시에게 3년간 예능을 가르친 다음 부차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결국 패망했다 한다.


한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녀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해 원제의 후궁으로 입궐하게 되었지만 5년동안 총애를 받지 못하다가 오랑캐인 흉노에 첩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왕소군은 멀리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이 나서 금을 연주했는데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왕소군을 보고는 그 미모 때문에 날개를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落雁). 당시 황제는 수천 명의 후궁을 직접 볼 수 없어서 초상화를 보고 간택했는데 궁중화가가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추하게 그렸다고 한다. 왕소군은 흉노의 왕 호한야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았으며, 흉노에 한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전하고 전쟁 도발을 막아 태평성대를 이루게 했다. 그의 아들은 흉노의 우익인 제후왕이 되기까지 했으니 나름 잘살았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미인을 오랑캐에게 빼앗긴 것을 아까워해서인지 그는 비운의 여인으로 여겨져 수많은 중국 문인의 심금을 울렸고, 나아가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은 한나라의 대신 왕윤의 수양딸로 용모가 빼어나고 노래와 춤에 능했다.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자 왕윤이 말하기를 “너의 미모에 부끄러워 달이 구름 뒤로 숨었다”하여 폐월(閉月)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초선은 간신 동탁과 동탁의 양아들이자 용맹한 장수로 유명한 여포 사이를 이간질 시켜 원수로 만드는 미인계를 썼다. 여포는 양아버지인 동탁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를 두고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정사인 '후한서' '여포전'에는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밀애를 했다는 기록만 있지 초선이란 이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 (우리가 삼국지라고 부르는 소설)를 쓸 때 동탁의 시녀 대신에 왕윤의 양녀, 초선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양귀비(양옥환)는 당 현종에게 간택되어 입궁을 한 후 하루 종일 우울해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양귀비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다 무의식 중에 함수화를 건드렸는데, 함수화는 그의 미모에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렸다고 한다(羞花). 당현종은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그녀를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 칭했다고 한다.


당궁미인도. (자료=인민일보)


섬서박물관의 당나라 미인도 속 여자들은 상당히 뚱뚱하다. 뱃살이 늘어지고 이중∙삼중턱도 많다. 헐리우드 미녀들에게 길들여진 우리시대의 미적 기준으로는 결코 미인이라고 하기 힘들다. 시대에 따라 미인에 대한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한국전쟁 때 우리네 순박한 할머니들은 이 땅에 진주한 백인 미군들을 보고 짐승같이 생긴 놈들이라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각인된 글로벌 미의 기준과 불과 60여년 전 우리네 미의 기준도 큰 차이가 나는데 1500년 전 당나라 때의 미인 기준과 지금의 미인 기준이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양귀비의 어머니는 서역 출신이라고 하니, 양귀비는 이란계 페르시아 혈통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정사에서는 그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란 소리다.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의 라이벌 후궁 매비는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도 있다. 양귀비는 키가 162cm라고 하는데, 몸무게에 대해서는 60kg이니 80kg이니 다양한 설이 있다. 수많은 미녀들을 거느렸던 현종이 양귀비를 간택한 이유는 단지 그의 자질풍염한 미모 때문만이 아니라 총명함과 예술적 재능이었을 것이다. 양귀비는 원래 악단장 출신이라 기예가 뛰어난 소녀였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반한 결정적인 계기는 첫 만남에서 양귀비가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아름다운 춤을 선보인 것이다. 현종은 이 춤을 보고 그녀에게 홀딱 빠져버린다. 양귀비의 별명인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로 얼굴만 예쁜 꽃 같은 후궁이 아니라 감성이 풍부하고 수준 높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지적인 여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시대 시인 이백은 양귀비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는 양귀비와 현종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 ‘장한가(長恨歌)’로 노래했다. 그는 중국 역사의 가장 로맨틱한 여주인공의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4대 미인은 ‘침어낙안(浸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란 황당할 정도의 상상력 넘치는 판타지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운명은 하나같이 기구하고 비극적이었다. 4대 미녀들의 허구적 판타지 스토리를 보면 중국인들은 미녀는 화를 초대하는 존재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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