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민족은 모두 역사의 생성물이다. 보통 민족이 먼저 있고 그 이후에 국가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 국가가 먼저 생기고 민족이 만들어 진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비교적 혈연적 동질성이 오랫동안 유지되어왔기 때문에 세계적 기준의 민족이라는 개념과 혼동을 많이 하지만 인류역사를 들여다 보면 '배달의 민족'과 같은 순수한 민족은 꿈과 같은 개념이고 오히려 '짬뽕'이나 '잡탕' 같은 개념이 보편적인 민족개념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유대인은 셈족의 일파로 분류되지만 혈연적 동질성은 미약하고, 종교·문화적 동질성으로 뭉쳐진 민족이다. 칭기즈칸 이전에는 몽골족은 몽골로이드계의 한 부족에 불과했지만, 칭기즈칸이 몽골 고원을 통일한 이후에는 타타르족,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케레이트, 나이만 등 몽골계, 투르크계 모두가 몽골족이 되었다. 이 부족들의 상당수는 투르크 계통였으므로, 몽골족은 우리 한국인이 생각하는 순수 몽골로이드가 아니다. 

 

몽골 유목민이 거주하는 천막집 '게르'.

 

 

위구르는 투르크계로 8세기 유목국가로 출현하여 13세기 몽골제국의 정권에 들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몽골제국이 해체된 다음에는 정치, 사회적 통합능력을 상실하였다. 아직도 중화인민공화국에 신장 위구르자치구가 있고 위구르 민족을 자칭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1935년 동투르키스탄에서 투르크말을 쓰는 다양한 사람들이 정치적 단결을 위하여 '위구르'라는 이름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폴란드 같은 나라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의 틀이 여러 번 바뀔 때마다 '민족 재편'을 되풀이했었다. 게르만족은 로마시대 독일과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총칭해서 로마사람들이 부른 표현이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혈연적, 언어적 동질성이 있는 민족의 개념이 아니다. 유목민족이라는 단어도 혈연적, 언어적 동질성이 있는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씨족집단과 이익집단들이 합쳐서 만든 '하이브리드(잡종) 상태인 다종족 집단'을 의미한다.

 

우리는 중화사상이나 '한족', '중국인' 같은 민족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화 문명은 상당히 오래 전 주나라 때부터 황하의 중∙하류에서 싹터 왔지만 '중화민족'은 불과 100여 년 전에 손문이 만들어낸 최신 개념이다. 학자들은 전통시대 중국에는 민족 의식이 없었으며 중국인들은 서양에서 자극을 받아 비로소 민족 의식에 눈뜨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한족과 중국인이라는 개념도 편협한 민족주의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거대한 복합적 개념(초대형 ‘짬뽕)'이며, 그것들조차도 최근 수 십 년 사이에 고착화됐다. 

 

사실 중국대륙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최근에 고착화된 한족이나 중국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며, 농경민과 유목민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오히려 더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며 중화라는 기치 아래 꾸준히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화교들은 몇 대가 지나도 모국어를 잊지 않고 중화 민족임을 자처한다. 중화주의는 이렇게 강한 흡인력을 가진 중국인의 신화인 동시에 현실이다. 중국인의 세계관은 중국(中國)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중국은 여러 개의 성읍 국가에 둘러싸인 중심국가를 의미하는데 이후 춘추전국시대가 되면서 그 범위가 확대되어 중원, 황하의 중하류를 지칭하게 된다. 당시 중국인들은 스스로 문명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며 확고한 화이(華夷)사상을 한나라 때까지 유지한다. 그러나 5호 16국, 북조(北朝) 시대 280년간(303~586년) 멸시했던 북쪽 오랑캐의 지배를 받으며 화이사상이 흔들렸다.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오랑캐 출신 황제가 스스로를 중화 황제로 칭하고 북방의 호족, 남방의 월조, 한족이 한 가족같이 지낸다는 호월일가(胡越一家)를 표방하면서 이민족의 통치도 정당화하는 중화적 세계관인 중화주의를 완성한다. 

 

근대 중국 학자들은 비록 중국이 일시적으로 북방민족의 지배를 받긴 했지만 한족의 탁월한 정치·문화적 수준과 인구·경제적 역량은 소수의 이들 지배자를 흡수하고 동화시켜 결국 한민족의 일부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이 소위 ‘한족중심 동화론’이다. 그러나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중심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고 있다. 한족은 다른 55개 소수민족과 더불어 중국의 역사를 발전시켜온 중화민족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다. 다시 말해 고대의 흉노족, 선비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도 모두 중화민족의 일부라는 것이다. 과거 한족중심주의는 중화민족중심주의에 의해 대체된 셈이다. 이런 논리를 인정한다면 한족을 제외한 소수 민족의 역사도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될 수밖에 없고, 현재 ‘동북공정’이니 ‘서북공정’이니 하면서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화하는 작업도 논리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될 수밖에 없고, 현재 ‘동북공정’이니 ‘서북공정’이니 하면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화하는 작업도 그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세계의 중심'이라는 전통적인 문명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중화주의는 지난 100여 년 사이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겪은 굴욕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21세기 중국 굴기의 사상적 원동력이 되기도 할 것이다. 

 

중국의 5000년 역사는 스스로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농경 정주민이 쓴 역사다. 유목민은 대체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중국 고대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유목민에 대한 기록은 왜곡되어 왔다.  그결과 유목민에게는 줄곧 야만족, 파괴자 등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한무제 때 같이 농경민들이 유목민을 공격했던 기록은 과도한 우월감과 멸시가 넘쳐난다. 유럽인들은 칭기스칸의 군대를 잔인 무도한 악마 집단처럼 묘사했는데, 역사상 다른 정복군과 비교한다면 몽골군이 특별히 잔인하다 할 수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 등 농경민이 쓴 유목민 관련 기록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유목민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거나 왜곡되어 전하는 경우가 많다. 농경민들의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수십 가지 언어로 기록된 사료를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광대한 지역의 유적과 유물도 유목민들의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유목민의 삶을 되짚어보려는 필자에게도 유목민들의 삶을 기록한 사료의 부족과 유목민들의 삶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의 부족은 커다란 난관이 되고 있다. 미국 아마존에서 실크로드 관련 도서를 구입하려고 검색을 해봤는데, 영어로 발간된 책이 아주 적어서 놀란 적이 있었다. 초원지대의 어떤 돌산에는 그 돌산을 지나쳐간 수많은 유목민들이 만든, 지금은 사라진 수 많은 종류의 문자 기록들이 돌무더기에서 발견되지만 지금은 그 문자들을 해석할 수 없다고 한다. 한반도의 역사에도 유목적 전통이 상당히 남아있지만, 삼국시대 이전의 유목 관련 역사는 별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유목민, 농경민, 바지와 치마

흔히 남자 옷, 여자 옷이라고 생각하던 바지와 치마는 실은 각기 북방 유목문화와 남방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옷이다. 말을 타는 데는 치마보다는 바지가 더 편하고, 농사를 지으려면 치마가 더 편하다. 기원전 307년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은 기병을 도입하기 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랑캐의 전법인 호복기사(胡服騎射)를 받아들였다. 그 전까지는 세 명의 전사가 마부와 활쏘기, ‘과’라는 창을 사용한 백병전을 분담해 전차전을 벌였다. 호복기사는 북방 유목민족이 쓰던 전법으로. 기마 훈련을 받은 전사 한 사람이 직접 한 마리의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방식이다. 당시 대부들이 입던 소매가 길고 아랫부분이 치마처럼 생긴 옷은 말을 타는데 무척 불편했는데, 유목민들은 말을 타는 데 적합한 바지 형태의 복장인 호복을 입었다. 이후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를 거쳐 남자들은 바지를 입는 게 대세가 되어 갔다.

 

 

한국 복식은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는 북방 스키타이 기마 유목 민족 복식에 그 원류를 뒀다.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의 남녀 모두가 바지를 입었다는 것은 한민족에게 강한 유목적 전통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고구려 여자들은 바지만 입거나 바지 위에 치마를 입은 경우, 치마만 입은 경우 등 3가지로 나타나는데 대부분 치마, 특히 주름치마를 입었다. 삼국시대에는 치마가 남녀를 구분하는 주요한 기준이었다. 고구려 여자들이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바지를 입은 여자들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반면 농업경제 중심이던 로마에서는 로마군은 지금 기준으로는 어색하게 치마를 입고 싸웠다.

 

기마 민족의 전쟁.

 

 

조공에 관한 오해

 

서융, 흉노, 돌궐, 유연, 선비와 같은 유목민들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다. 유목으로 동물성 단백질과 가죽옷은 쉽게 구하지만 곡물, 야채, 탄수화물과 식물성 섬유는 농업경제권과의 교역, 전쟁, 약탈을 통해서 얻어야 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유목민족들과의 갈등을 줄이기 위하여 유목민족에게 필요한 물자를 선물했고, 이에 대한 답례로 유목민족들도 선물을 보냈던 것이 조공의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중국은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더 많았는데, 힘 센 유목국가들은 중국왕조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받았다. 흉노가 강성할 때 늙은 말 몇 마리를 주면서 한나라에서 비단을 엄청 뜯어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참다 못한 한나라 유방이 흉노의 선우묵특을 치려다가 백등산 전투에서 수십 만 명이 몰살당하고 치욕적인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위구르의 위세에 눌린 당나라는 그들에게 비단을 헐값에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7∙8세기에 위구르는 소그드 상인에게 말떼를 넘겨주고 그것을 비단과 교환해 오도록 했다. 원래 말 1필에 비단 1필 하던 것이 나중에는 비단 40필을 요구할 정도가 되었으니, 당나라가 이런 불공정한 교역조건에 대해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를 시정할 힘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규모의 중국산 비단이 위구르·소그드인의 손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서아시아나 유럽과 원거리 비단무역을 통해서 큰 돈을 벌어들였다.

 

한반도의 역사를 돌아봐도 송나라는 고려 사신이 다녀갈 때마다 나라 재정이 휘청거렸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도 청나라에 사신을 자주 보내려고 애썼는데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던 청나라가 상당히 꺼려했다. 명나라 때는 조선이 금∙은 등 훨씬 더 많은 물자를 주면서 명으로부터는 약소한 물품과 책을 받았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조공무역을 속국과의 거래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시대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따라 중국이 착취당하는 거래 일수도 있었고, 속국이 착취당하는 거래일 수도 있었다. 요즘 주권국가들 사이의 무역거래와는 성격이 상당히 달랐다. 농경문명권 역사기록에서 유목국가들을 야만적 약탈자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쟁과 약탈은 극히 일부분이었고, 대부분은 평화적인 교역이었다. 

 

최근 인류는 100여 년 전부터 형성된 근대 서양식 문명을 최고로 여기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왔다. 주위의 식자들과 대화를 할 때도 미국, 유럽적인 문물을 숭상하는 서양 편향적인 사고와 가치관을 수없이 느끼고 있다. 필자 조차도 어렸을 때부터 들어 온 서양 편향적인 가치관이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하지만 서양 문명은 인류역사상 특수한 문명의 한가지에 불과하다. 근대 서양문명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던 '신화'가 흔들리고 있는 현재, 우리는 문명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 근대 서양식 문명의 틀을 지탱해 온 민족, 민족국가, 국민국가 사상과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국경의 개념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세상은 모바일, 인터넷, 바이오를 중심으로 혁명적으로 바뀌고 있다. 어제의 역사에서, 제한된 서양문명에서만 해법을 찾아서는 안 된다. 특히 숨겨지고 감춰졌던 유목민의 역사를 이해할 때 우리는 인류역사에 대하여 보편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고, 미래의 세상을 준비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유목민의 시각에서 세계사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세계관과 철학을 가지고 싶고, 그 기나긴 공부, 기행, 실크로드 답사 과정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편집자주] 이번 편이 나간 후 역사 해석과 관련한 반론이 있었습니다. 그 의견과 필자의 견해를 함께 싣습니다.

중국사는 전설과 신화의 삼황오제시대를 거쳐 하(夏), 상(商, 또는 은(殷), 주(周) 왕조로 이어지는데, 은허에서의 청동기유물과 갑골문자등이 발견됨으로써 적어도 주나라 이전에 상(또는 은)이라는 왕조가 있었음이 확정되었다. '중화문명은 상당히 오래 전 주나라 때부터'라는 표현은 정정 돼야 한다. 

▶(필자의 견해) 이 글의 '중화문명'은 중국문명이 아니라 '중화'라는 개념을 공유한 문명을 일컫는다. 중화문명의 시발점은 통일 왕국인 주나라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후한이 위오촉의 삼국시대로 분열되었다가, 진(西晉)으로 일시 통일후 5호16국(말그대로 중원지역에 다섯 오랑캐가 16개 나라를 세웠던 시기)시대를 거쳐, 위진남북조시대로 정립되었다가 수당의 통일왕조로 연결된다. 따라서 시대구분으로는 5호16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 수, 당 순이다.  유목민족들이 화북지방(중원)에 세운 왕조를 일러 북조(북위,북제,북주의 3왕조를 총칭)라 일컫지만, 시대구분으로 북조시대는 없고 대개 위진남북조라 부른다. '5호 16국 북조(北朝)시대'는 시대흐름 상 맞지 않는다.

▶오랑캐의 지배를 받은 지역의 역사를 줄여서 표현했다. 

 

근대이후 서세동점의 형세가 된 이유는 다양한 고찰이 필요하지만, 그런 아시아적 정체성(停滯性)론에서도 관개시설의 주체가 된 국가의 중앙집권적 통제로 인해 수천 년 간 사회구조가 크게 변동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있어도 중화주의가 정체의 근거였다고 볼 수 없다. 

▶'중화주의가 중국이 겪은 굴욕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이라는 표현은 중국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다.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서 서구를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던 오만한 청나라 시대의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본 표현일뿐이다.

 

일종의 관무역, 공무역인 조공무역에 대해 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중국은 주변 약소국가들이 신하로서 예물을 보내온 걸로 간주했지만 대국으로서의 체면과 경제적 회유를 위해 받은 것보다 더 주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래서 주변국들에 삼년일공으로 제한했는데, 조선은 부득불 우겨서 일년에 세번을 정기사절로 보냈고 그외에도 건수만 생기면 사신일행을 파견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명나라 말기 조선과 명의 관계에서 재조지은을 베풀었다고 위세를 떨던 명나라 사신일행이 엄청난 금과 은을 요구하여 조선조정을 힘들게 했으나 일시적 현상으로 봐야한다.

▶조공무역에 대해 중국이 수탈하는 성격의 무역이 많았다는 학자의 주장을 따랐다. 주는게 많았는지 받는게 많았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엄밀한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필자가 찾아 본 자료에는 중국이 받는 게 많은 경우가 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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