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분리된 병마용의 병사들.

 

고고학은 인디애나 존스 처럼 동굴 속에서 찬란한 황금 왕관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사진과 같이 산산이 깨져버린 조각들을 수 년, 수 십 년에 맞춰나가는 작업이라고 한다. 진시황 병마용은 1974년 발견 이후 4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해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로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 생활 용품을 제작할 때도 이러한 생산 라인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최근 컴퓨터 안면인식 프로그램으로 지금까지 발굴된 약 8000개 병용의 얼굴을 확인해본 결과, 얼굴이 모두 달랐다고 한다. 이는 각각의 병용들이 실제 살아있는 군인들을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마용은 극히 인형처럼 만들어져 각각의 말의 차이는 공예가의 미세한 감각의 차이 정도다. 병용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마용은 말 한마리를 모델로 삼아 똑같은 모양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병용의 예술적 가치가 마용의 가치보다 훨씬 더 높다.

 

격발식 활은 두 겹의 철갑을 뚫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두 개의 축 위에 달려있는 세 개의 움직이는 부품들로 활을 쏘는 무기다. 총동으로 만들어진 부품들은 대단히 정교했다.  노궁은 최대 사거리가 400m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마병의 위력 

 

실물의 2분의 1 크기로 만들어진 진시황 전용 방탄차 온량거(轀輬車). 전세계 청동기 유물 중에 가장 크다고 한다.

 

 

진나라 때까지도 말이 끄는 전차가 주력 무기였다. 이 전차용 말은 당시 중국에 흔한 말이 아니라 간쑤성(甘肃省) 지방의 말로 보이며, 중국 내륙 말보다 훨씬 튼튼했다고 한다. 우수한 품종으로 진나라의 전차부대는 타국에 비해 훨씬 빠르고 강했고, 이런 우수한 전차용 말은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차 한 대에 평균 30명의 보병을 편성했는데, 춘추전국시대에는 전차 대수에 따라 '천승국(千勝國)’, '만승국(萬勝國)'이라 부르며 국력의 세기를 평가하였다.

 

기원전 350년경 중국인들은 기병대를 이용한 전투방법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한 마리 말은 12명의 사람이 먹을 곡물을 먹기 때문에 기병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군대였다. 진시황이 죽은 뒤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두고 자웅을 겨루는 초한지에는 전차보다는 기병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이는 서역말의 수입, 종자개량 등으로 말의 체격이 커지면서 말이 사람의 무게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자 이 시기를 전후해서 전차전이 기병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위∙촉∙오 삼국시대에 낙양을 기반으로 삼은 조조는 남흉노, 선비족, 저족을 수하에 편입하고 이들의 기마전력을 활용하여 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잡았다.

 

근대 이전 기마병의 위력은 현대 육상전의 탱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왕조들이 국가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로 필사적으로 유목민의 말을 구입하고, 말 한 마리가 사람 12명분 곡식을 먹어도 기마병을 유지해야만 했던 것은 숙명이다. 금나라 때 17기의 강화사절단이 본국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는데, 북송의 지휘관이 2000명의 보병을 동원해 이들을 습격했다. 금의 17기 기마병은 곧바로 중앙에 7기, 좌우 날개에 5기씩 세부대로 나뉘어 화살을 쏘며 적을 교란시켰다.  결국 2000명의 보병은 완전히 농락당하고 궤멸 당했지만 금나라 기병 17기는 단 1기의 피해도 없었다는 역사기록이 남아 있다.

 

진시황 행차 때는 신변보호를 위해 온량거(轀輬車) 수십 대가 같이 움직였다고 한다. 이 방탄 전차는 특히 연결고리, 볼트, 너트, 땜질 수준이 현대 과학 기술자가 보기에도 놀라운 수준이라 한다.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물 중 하나다. 온량거를 촘촘히 둘러싼 관객들 사이로 간신히 사진을 찍었다. 1980년 진시황릉 옆 보리밭에서 온량거마 1∙2호가 발굴되자 농부들은 입장권을 만들어 보리밭 입구에서 팔았다. 심지어 발굴단원들도 표를 구입하고 나서야 현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유물 훼손을 우려해 발굴팀이 군을 파견해 현장을 차단하려 하자 농부들과 인민해방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져 군인들이 다수 부상을 당했다. 결국 현장 농사 수입의 다섯 배를 보상해 주고 동거마 유적현장을 철판에 떠 통째로 박물관에 옮긴 후 복원작업을 할 수 있었다. 중국인의 상술과 돈에 대한 열정은 영원할 것이다.

 

 

진시황릉은 어디에 있을까

 

병마용갱 입구의 진시황릉 표석.

 

 

진시황릉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 시황제의 묘지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편에 따르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여산(역산, 酈山)에 무덤을 착공하고 통일 후에 최대 70만 명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여산은 시안 에서 30km 떨어진 동현의 원산원(驪山園)에 있는 야산이다. 진시황이 13세에 즉위해서 시작된 공사는 진시황이 50세에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공사는 기원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9년간 이뤄졌다.

 

현재의 진시황릉은 병마용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발굴이 보류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기 어렵다. 지금의 진시황릉은 높이 76m, 폭 360m 규모인데, 황릉의 위치와 역사적 의미만을 알려주는 전시용이다. 입구에서 정상까지 200m 구간에 계단을 설치해 대략적인 규모만 파악할 수 있다. 일본에서 모든 비용을 다 지불하고 발굴을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중국은 이를 거절했고 독자적으로 발굴을 진행했다. 최근에 중국 정부는 중국 발굴기술이 확보될 때까지 진시황릉의 발굴을 중단했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병마용들로 조직적으로 방화, 도굴, 훼손된 흔적이 보이며 중국학계에서는 항우가 함양을 점령했을 때 파괴하고 도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진시황이 죽고 4 년만에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한나라 유방과 각축 끝에 함양(咸陽)에 들어온 초나라 항우의 군대는 진나라 왕들의 무덤을 도굴했다. 한고제본기(漢高帝本紀)에 광무 대치 중 유방이 항우를 비난하면서 항우의 죄 10가지를 나열하면서 진시황릉 도굴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어 항우의 진시황릉 도굴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하지만 최근 과학적 조사에 따르면 병마용갱은 도굴되었지만 진시황릉은 도굴 흔적이 없다고 해서 사학자들은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진시황 사후 함양으로 들어온 항우가 30만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도굴을 했다는 기록과 황소의 난 때 이곳을 도굴해 외부로 노출된 쇠붙이는 모두 도굴해 갔다는 기록이 있어 여러 번 외벽의 도굴이 이루어 졌다고 추정되나,  일부 학자들은 외부를 조사한 결과 도굴의 흔적이 없다고 한다. 도굴이 안된 온전한 상태일 가능성도 있다.

 

사기에는 내와 강을 이뤄 바다가 형성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수은 을 이용해 지하궁전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수은으로 인해 지하궁전은 완전한 도굴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실제 진시황릉 인근의 토사를 채취해서 분석한 결과 수은 함량이 높은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진시황릉은 지상 궁전을 재현한다는 개념으로 지어졌으며, 수은이 흐르는 5000여 개의 강과 수십 개의 망루로 이뤄진 도성 안에 온갖 보물과 병사로 화려하게 조성했는데 완공이 된 후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 동원되었던 인부들을 모두 사살하였다고 한다. 2003년 1월 9일 진시황릉의 부장릉이 발견돼 진시황릉이 병마용 뿐만 아니라 실제 황궁을 재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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