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실크로드 여행길에서 우리의 잘못된 세계관과 역사관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다. 서구의 르네상스와 중국이란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우리 생각을 지배했던 서구와 중국 중심의 기존 세계관, 역사관의 프레임을 근본부터 의심해봐야겠다. 

 

'모래 광장'을 뜻하는 레기스탄 광장. 사마르칸트의 중심지로 마드라사(이슬람 교육기관)이 세워져 있다.

내가 배운 세계사는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역사를 쏙 뺀, 승자가 된 유럽 사람들 관점의 세계사였다. 하지만 실크로드 국가들을 뺀 세계사로는 결코 보편적 세계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없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를 조심하라, 낙타를 타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과 테러리스트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수십 년간 유태계 미국 언론의 세뇌를 받아서 일까? 기독교나 불교를 믿는 테러리스트들은 앞에 종교를 붙이지 않는데, 유독 이슬람을 믿는 테러리스트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서구사회의 편견이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전염돼 있다.

 

실크로드 유적지에서 내가 본 이슬람 문화는 학문을 숭상하고 관용하는 문화였다. 무슬림은 우리와 다른 가치체계를 가졌을 뿐,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실크로드의 중앙아시아, 중동 국가들은 대항해시대 이전까지 세계사의 주역이었고 오히려 16세기까지는 유럽이 세계사의 시골 변방이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도 아랍세계가 기록해두었던 그리스, 로마 문명을 다시 부활시켰다는 서구적 해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뒤에 보이는 검은 옥 (세계 최대의 흑옥이라는 설이 있음)이 티무르의 묘비석이다. 앞에 보이는 큰 묘비석은 티무르의 스승이다. 학문을 숭상하는 이슬람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문명은 보릿자루 옮기듯이 필요하면 가져다 다시 쓸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는 15~16세기 서구문화의 우월성과 발전을 강조하기 위해 서구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도그마에 불과하다. 르네상스는 유럽 사람들이 이슬람으로부터 배운 것을 자기화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봤던 중세 이슬람의 대수학, 의학, 천문학 등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라고 이야기했던 16세기보다 한참 이전인 11세기에 지구본에 그린 지구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부하라의 알콰리즈미 동상.

 

아라비아 숫자는 이름 그대로 유럽 사람들이 아라비아 지역에서 숫자를 들여오면서 붙인 이름이다. 실상은 이 표현도 서구인의 인식 틀에 매여 있다. 서구인들은 아라비아에서 숫자를 배웠지만 원래 숫자는 인도에서 만들어졌고 아라비아는 그 숫자를 발전시켰다.

 

숫자 발전에 공을 세운 인물이 알콰리즈미라는 인물이다. 부하라에 살았던 이 대수학자는 ‘알고리즘’이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인류의 문명은 또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근대의 산업혁명도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알콰리즈미라는 아저씨는 내 학창시절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웃음)

 

◇'0'의 개념이 없어 일어난 해프닝  

1. 예수가 때어난 해 (기준 년) 는 0년이 아니라 AD 1년이다.
2. AD 1년의 1년전은 0년이 아니라 BC 1년이다.
3. AD 1년은 0세기가 아니라 1세기다.
  즉 1세기는 AD 1년에서 AD 100년 사이다.
4. 이 때문에 AD 2000년을 앞두고 '밀레니엄' 논쟁 일어났다.

1천대에서 2천대로 천단위(천단위(Millennium)는 바뀌는데 백단위 (Century)는 바뀌지 않는 모순이 발생했다. 2000년 1월 1일은 새로운 '밀레니엄'이지만 세기로 따지면 여전히 20세기(1901년~2000년)에 머물렀다. 당시 한국 정부는 2000년을 '밀레니엄 시작의 해'로 정하고, 혼란을 막고자 왜 모순이 생겼는지 설명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0' 의 존재를 알게해준 인디아 문명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실크로드의 심장'. 사마르칸트의 중심지인 레기스탄 광장 앞에서. 사마르칸트는 알리바바와 신밧드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아라비안나이트의 무대이기도 하다.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 등 모든 오아시스 도시의 중심에는 이슬람 고등교육기관인 마드라사와 모스크(예배당), 마뉴에트(첨탑)이 있다.

 

히바(Khieva)에서는 이슬람 고등교육기관인 마드라사를 개조한 호텔에서 하루 묵었다. 구조가 특이한데, 사막 먼지를 막기 위해 창문을 없애고 마당을 향한 문만 내놨다. 이 방에서 수백 년간 무슬림 학생들이 이슬람 신학, 철학, 아랍어를 공부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가 중국에서 전파되었다고 믿는 수많은 문화와 문물의 원류가 실은 중국 너머의 서역과 실크로드에 있었다. 그동안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불교가 중국에서 전파됐다고 아는 경우가 흔하지만, 불교는 인도 북부와 중앙아시아에 거점을 둔 쿠샨왕조에서 발전했다. 이 대승불교가 중국 혼란기인 5호 16국 시절에 실크로드를 거쳐 한반도에 전래됐다. 학교를 다니면서 고대 중국에서 들여왔다고 배웠던 수많은 문화와 문물의 원형을 이번 실크로드 여행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중국(中國)'이라는 명칭을 쓰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중화사상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자는 시각적 각인효과가 커서 자기도 모르게 그 사상에 물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따지면 영어의 'China'라는 표현이 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표현이다.

 

지금 중국의 넓은 땅덩어리는 불과 몇백 년 전에 청나라가 최대로 넓혀놓았을 때부터 굳어진 것인데, 중국 사람들은 그 땅 위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려고 한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중국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현재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고(最古)의 사서는 12세기에 만들어진 삼국사기다. 이전의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중화사상에 기반한 중국 사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더라도 중국의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역사를 쓸 수는 없을까.

 

역사학자들도 서양사, 중국사, 일본사, 한국사 등 지역을 분리하지 말고 고대부터 현재까지 전지구적 교류와 소통이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함께 아우르는 연구를 해줬으면 한다. 로마에서 유행했던 문물이 몇 개월 뒤 부하라에서 애용되고, 사마르칸트에서 유행했던 풍조가 몇 달 뒤 신라의 경주에서 성행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문명의 교류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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