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성·안전성이 곧 기술… 폐쇄적인 공급망(SCM) 관리

[편집자 주]장밋빛 기대를 품고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었던 기업들이 성과는커녕 시장 진입에도 애를 먹고 있다. 모바일 시장에서는 승승장구했던 이들이 자동차 시장에서 쓴 맛을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시장에는 밝은 미래만 있는 걸까. IT 업계가 자동차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필요한 것들을 짚어봤다. 


[자동차 시장, 우리 몫은 없다]①맥 못추는 IT기업들… 업의 본질 다르다




“자동차는 아무래도 고부가가치 시장이고, 장기 공급을 할 수 있으니까 빠르게 변하는 IT에 비해 훨씬 낫다.” 최근 몇 년간 IT 부품 업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던 말이다. 


텃밭인 모바일 시장이 포화 상태에 접어들면서 부품 기업들은 자동차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요즘 웬만한 IT 업체 치고 신사업 항목에 자동차가 없는 곳이 없다. 하지만 자동차 시장의 장벽은 생각보다 높고, 단단하다.



‘기술’의 관점을 바꿔라



모바일 시장과 자동차 시장의 근본적 차이는 ‘기술’을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모바일 시장에서 최고의 기술력은 고성능의 제품을 저렴하게 만드는 것이다. 매해 최신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폰이 나오고, 시장에서도 어떤 신기술에 적용됐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공정 기술을 바꿔 가격을 낮추는 것도 모바일 시장에서는 ‘혁신적인 기술’로 불린다.


반면 자동차 시장에서는 극한의 환경에도 장기간 고장 없이 동작하는 제품이 최고다. 이들에게 성능 개선은 ‘더 오랫 동안 안정적으로 동작한다’는 뜻이다. 자동차 1대에는 2만개가 넘는 부품이 들어가는데, 그 중 하나라도 오작동하면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모바일 시장에서는 혁신성과 가격이 중요하지만, 자동차 시장에서는 안전성과 신뢰성이 우선이다.



호흡이 길다



사례 1. 반도체 설계 업체 텔레칩스가 작년 국내 완성차(OEM) 업체에 공급한 오디오비디오내비게이션(AVN)용 칩(SoC)은 이 회사가 5년 전 개발한 제품이었다. 텔레칩스는 2007년부터 자동차 오디오 프로세서를 납품하기 시작했지만, 2015년이 돼서야 AVN용 칩 공급사가 됐다. 



IT 분야는 보통 개발 기간은 6개월, 시제품을 제공한 다음 고객사 승인까지 6개월 또는 1년 정도 걸린다. 결과적으로 최소 1년, 최대 3년이면 시장 진입 여부가 판가름난다.


신차는 어떨까. 운좋게 개발 담당 부서와 연이 닿아 과제를 따내도 기획에서 개발까지 짧으면 18개월, 길면 3년(36개월)까지 소요된다. 


그 후에 곧바로 부품이 쓰인다는 보장도 없다. 각종 규격 및 인증을 획득해야 하고  시험주행 테스트에도 1~2년이 필요하다. 안전(Safety)과 직접적으로 연계된 부품의 경우 검증에만 5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5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제품을 개발해도, 실제 양산차 구매 승인이 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6개월이나 1년에 한번씩, 새 스마트폰을 기획할 때마다 신규 업체를 발굴하고 부품사를 선정하는 IT 업계와는 호흡의 길이가 다르다.


사례 1의 텔레칩스는 개발한 제품을 신차에 탑재, 검증할 기회를 3년 전에서야 얻었고, 2년간 테스트를 진행한 후 납품했다.



폐쇄적인 공급망관리(SCM), 문호(門戶)의 폭이 좁다



사례 2.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는 아무리 저가형 제품이라도 동작 속도가 기가헤르츠(㎓)급이다. 프리미엄 AP는 10나노(㎚)대 최신 공정에서 제조된다. 하지만 자동차 업계에서는 아직도 메가헤르츠(㎒)급 프로세서의 채택률이 높고, 프리미엄 제품도 28나노 공정에서 만든다. 


모바일 시장에서는 신기술 확보에 적극적이다. 부품 협력사가 개발한 기술이 제품에 곧장 적용되기도 하고, 완성품 업체가 기술력이 있는 협력사에 생산 라인 투자 비용을 지원하기도 한다. 


자동차 시장은 반대다. 이 시장에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문제 없이 작동했는지’가 주된 평가 요소다. 때문에 자동차 업계에서는 오랫동안 호흡해온 업체를 선호한다. 


현대·기아차에 따르면 현대·기아차와 협력사의 평균 거래 기간은 지난해 기준 30년이다. 만도, 한온시스템 등 1차 협력사 대부분은 1980년대부터 현대차와 거래해왔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의 연구개발(R&D)을 시작한 게 불과 2004년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자동차 업계 협력사들은 수년간 애프터 마켓, 프리딜리버리인스펙션(PDI) 마켓을 거쳐 노하우를 쌓았다”며 “최소한 5년 이상은 공들여야 시장에 진입할 수 있지만 이를 견디는 업체들은 드물다”고 말했다.



레퍼런스도, 영업도 안통하는 자동차 시장


사례 3. 국내 완성차 업체에 부품을 공급하는 A사는 고객사를 다변화하기 위해 공급 단가를 3분의 2로 줄인 제품을 들고 미국 완성차 업체 F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F사는 신뢰성이 없다며 퇴짜를 놓고, 값비싼 기존 협력사의 제품을 그대로 썼다.



때문에 신규 업체는 자동차 공급망 내 협력사를 통하지 않으면 완성차 업체는 물론, 1차 협력사 구매팀 만나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기존 협력사들도 마찬가지다. 각 완성차 업체별로 공급 사슬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이를 하나하나 공략해야한다.


삼성전자 납품 실적을 레퍼런스 삼아 중국에 진출, 신규 진입하더라도 전체 물량의 상당 부분을 수주할 수 있었던 모바일 시장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완성차 임원을 영입해도 시장 뚫기가 쉽지 않다. 김동진 전 현대차 부회장이 이끄는 아이에이조차 2010년 자동차 반도체 사업을 시작, 6년만에 겨우 흑자를 냈다.


투자를 해도 당장 성과가 나지 않으니 일부 업체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동차 사업을 총괄해오던 임원을 내보낸다. 오히려 고객사와의 관계를 끊고 사업 공백기를 만드는 악수(惡手)를 두는 셈이다.


실제 국내 부품업체 B사는 자동차 시장 개척을 주도한 한 임원이 이직한 후 추가 수주에 연달아 실패했다. B사의 자동차 부품 매출액은 지난 2013년부터 꾸준히 2~3자릿수 늘었지만, 해당 임원이 그만둔 지난해에는 9% 증가하는 데 그쳤다.



'[자동차 시장, 우리 몫은 없다]② 평가 기준, 모바일과는 차원이 다르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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