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사재기로 잠긴 물량도 많아
리드타임 최소 24주에서 52주에 달해
구매력 밀리는 중소 업체 어려움 가중

"미중 관계 불확실성이 공급망 변화로 이어지면서 일부 기업들이 재고 확보를 위해 주문을 크게 늘린 것이 반도체 품귀 현상의 주된 원인이다." - 마크 리우 TSMC 회장

반도체 품귀 현상이 자동차에 이어 가전 제품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공급 능력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것이 주요인이지만, 또 한 축으로 업계의 '재고 확보' 경쟁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중국에서 시작된 반도체 사재기 현상이 국내 대기업에서 유통업체로 연쇄적으로 옮아붙고 있다. 

구매력 없는 중소기업들은 신제품 출시를 연기하는 등 직격탄을 맞고 있다.

중국 선전 폭스콘 공장 내부 모습. /사진=폭스콘
중국 선전 폭스콘 공장 내부 모습(기사의 특정내용과는 관련없음). /사진=폭스콘

‘반도체 사재기’ TV⋅소형가전으로 확산

반도체 품귀 현상이 TV⋅소형가전으로 연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미국 생활가전 업체 월풀은 MCU(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 부족 탓에 냉장고⋅전자레인지 등 가전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국내 생활가전 업계 역시 신모델 개발에 지연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MCU뿐 아니라 DDI(디스플레이 구동칩)⋅PMIC(파워반도체) 등 전자제품 구동에 필수적인 반도체까지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생산 중단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반도체는 신형 자동차부터 스마트폰⋅TV·생활가전까지 적게는 수개에서 수십개까지 탑재된다. 

요인은 복합적이다. 반도체 업계 공급 능력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것이 주요인이지만, 산업현장 전방위로 확산되는 재고 확보 경쟁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미리 유통시장에서 정상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칩을 쓸어담은 기업들 때문에 잠겨있는 물량도 많다는 얘기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중국에서 재고확보를 한 뒤, 올 초에는 국내 대기업에서 재고 물량을 미리 확보한 것으로 안다"며 "자금력이 있는 대기업들에서 미리 입도선매한 것이 반도체 품귀 현상이 장기화하는 주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가전. 하나의 가전에는 수 개의 MCU가 들어간다./삼성전자
삼성전자의 가전. 하나의 가전에는 수개에서 수십개의 MCU가 들어간다./사진=삼성전자

우선 중국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나섰다. 

지난해 미국의 중국 수출 규제 강화로 중국 기업들이 미리 반도체 사재기에 돌입했다. 공급망 불안정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재고 확보를 위해 비싼 가격을 주고 반도체 제품을 싹쓸이 한 것이다. 이후 국내 대기업들이 재고 확보에 들어갔다. 여기에 유통사들까지 재고 확보 뒤, 물량 잠그기에 나서면서 사태를 악화하고 있다. 

대기업은 NXP⋅르네사스 등 MCU 설계⋅판매 업체로부터 직접 반도체를 대량 구매하지만 자동차 부품사나 중소기업의 경우 반도체 대리점 역할을 하는 유통사로부터 반도체를 공급받는다. 

대만의 MCU 생산업체 관계자는 "중국의 자본력이 풍부한 기업들이 물량을 싹쓸이해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는 잠긴 물량도 많다"며 "파운드리(위탁생산) 증설 문제도 있지만 원인이 복합적이다. 사재기 경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구매력에서 밀리는 영세 업체로 갈수록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업계에서는 리드타임(주문후 공급까지 기간)이 최소 24주에서 52주에 달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지금 주문해도 내년은 돼야 공급할 수 있다는 얘기다. 파운드리에서 생산해서 공급되는 물량이라면 지금 주문해도 언제 받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중국 업체나 유통사 등에서 이미 확보한 재고를 공급받는다면 리드타임은 짧아지지만, 가격이 오른다. 유통업체들은 중국에 확보된 재고를 더 비싼 가격에 공급받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해진 가격이 없이 부르는 게 값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한 글로벌  EDA업체 대표는 "리드타임 24주도 현 상황에서는 빠른 것인데 잠긴 물량을 공급받느냐, 파운드리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리드타임도 제각각이다"며 “CCTV 등에 들어가는 MCU가격은 5배 이상 급등했다. 이마저도 기한을 조금 더 당기면 30-40%까지 올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국내 로봇청소기 업체 대표 역시 "리드타임이 52주라는 얘기까지도 나오는데 공급 예정이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미 시장에 잠겨있는 물량을 수배해서 사는 것은 가격이 더 뛴다고 보면 된다"며 "유통업체들이 중국에서 미리 사재기한 물량을 구매해 되파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공급 부족도 문제지만 잠긴 물량도 많다"고 전했다. 

파운드리 공장 내부 전경. /사진=TSMC
파운드리 공장 내부 전경. /사진=TSMC

어려움 가중되는 중소업체

문제는 구매력에서 밀리는 중소업체들이다. 리드타임이 최소 24주가 걸리는 상황이라 신제품 출시⋅개발을 연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리드타임을 감수한다해도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데다, 부품 대금을 100% 현금으로 선불 지급해야하는 중소기업 입장에서 현금 확보도 쉽지 않다.

한 의료IT 업체 대표는 "전액 선불로 대금을 지급해야 해 웃돈을 주고 물량을 확보하는 것도 어렵다. 신제품 출시부터 개발까지 모든 게 중단된 상황"이라며 "거래처에서 물량을 달라고 해도 공급을 못 하니까, 현 상태라면 영세한 업체들은 고사할 수밖에 없다. 단기적으로는 현금확보도 어려운 상황이니 대납을 해주는 방식이라도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도완 중소벤처기업부 시스템 반도체 담당 사무관은 "현재 문제는 파운드리의 생산부족 등 민간의 문제라 정부 차원의 대응이 힘들다. 대납을 해주는 방식 등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 중인 부분은 없다"면서도 "다만 개별업체들이 파운드리에 접근하고, 개별 대응하는 것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디자인하우스 등과 협업해 공동발주를 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항구 선임연구원 역시 "잠긴 물량에 대해 정부가 파악하기도 힘들고, 파악해서 제재에 나선다 해도 공정거래법 위반이 될 수 있다"며 "파운드리 증설 문제에 재고 확보 경쟁 등 상황이 복합적이라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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