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교체기에 취약한 행정조치로는 부족
제네바 핵합의, 이란 핵합의도 쉽게 뒤집혀
미국 의회 설득 나서야

SK하이닉스의 미국 내 로비 자금 지출 집계. /자료=오픈시크릿
SK하이닉스의 미국 내 로비 자금 지출 집계. /자료=오픈시크릿

근래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 정가 뉴스에 울고 웃는다. 미국 반도체법(CHIPS Act) 가드레일 규제안이 확정됐다는 소식에 낙담했다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중국으로의 반도체 장비 반입 예외 적용을 무기한 인정받게 됐다며 안도했다. 

그러나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미국 상무부의 VEU(검증된최종사용자) 명단에 오른다고 해서 중국 시안⋅우시 공장 문제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VEU 등재는 불가역적 조치가 아니며, 두 회사가 수십조 투자한 중국 공장들이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라는 점은 달라진 게 없다. 

중국 공장 투자가 시장 논리가 아닌 외교 정세 영향을 받게 된 사실, 그 자체가 리스크다.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이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정책 일관성을 유지한다고 믿고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지난 2000년 집권한 조지 부시 정권은 ‘ABC(Anything but Clinton) 정부’로 불렸다. 전임 빌 클린턴 정부 때 시행한 정책은 무조건 뒤집었다. 클린턴 정부와 달리 강경했던 대북정책에 따라 ‘미⋅북 제네바 합의'가 파기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이란과의 핵 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를 전격 무효화했다.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주도한 이 합의가 이란에만 유리하고, 실제 핵무기를 개발했는지 여부는 검증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JCPOA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에 독일까지 더해 6개국이 맺은 협정이다. 

수년에 걸친 다자간 협정조차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는 마당에 일개 부처(상무부) 행정조치인 VEU 등재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더욱이 최근 미국 대선은 예측 불허 국면으로 흐르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조 바이든 대통령 재선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으나, 이 전망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백악관 주인이 바뀌고 새 대통령이 ‘ABB(Anything but Biden)’ 정책을 펼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그 지휘봉을 잡게 될 인물은 예측 불허의 트럼프다. 

안석현 콘텐츠 팀장(기자).
안석현 콘텐츠 팀장(기자).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최근 크리스 밀러 미국 더프츠대 교수(‘칩 워’ 저자)와의 대담 이후 소회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했다. 박 전 장관에 따르면 밀러 교수는 “중국 내 D램 생산시설이 중국 정부의 인질로 잡혀 있다”, “내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면 더욱 강도 높은 규제 조치가 들어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사 정권이 바뀌더라도 중국 내 삼성전자⋅SK하이닉스 공장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은 있다. 미국 의회 입법을 통해 동맹국 반도체 회사들 투자를 보장케 하는 것이다. 반도체법이나 인플레이션방지법(IRA) 처럼 의회가 나서서 법안을 마련한다면 정권 교체 리스크를 크게 덜 수 있다. 

물론 자국 기업도 아닌 동맹국 기업을 위해 자칫 대중 제재를 무력화 할 수 있는 법안을 발의하고, 찬성표를 던질 의원 수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미국 정치자금 추적단체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간 미국 내 로비 자금으로 579만달러(약 78억원)를 지출했다. SK하이닉스는 같은 기간 527만달러를 썼다. 두 회사의 미국 내 로비 자금은 대중 제재가 본격화 된 최근 5년 새 크게 늘었다. 이미 두 회사는 의회 설득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대통령실은 윤석렬 대통령이 미국 뉴욕애서 열린 유엔총회에 참석해 세계 각국과 연쇄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자찬했다. 우리 반도체 산업 안위만 놓고 보면 번짓수를 착각한 외교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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