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국방물자생산법(DPA)’ 근거 강제 조치도 시사

▲미 백악관 전경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삼성전자‧TSMC‧인텔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에게 앞으로 45일 내로 재고‧주문‧판매 정보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만일 기업들이 스스로 관련 자료를 내놓지 않으면 자국내 군수조달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방물자생산법(DPA)’을 근거로 강제조치에 나선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당장 삼성전자와 TSMC는 미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갖고 있어 이 법의 적용을 받는다. 미 행정부는 산업 전반의 반도체 부족 사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과도하게 반도체를 비축하는 사재기를 차단하고 공급망에서 병목현상을 완화하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민간기업 내부 기밀 정보까지 수집하려고 압박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칙을 침해한다며 관련 기업들의 반발을 살 것으로 보인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백악관과 현지 외신 등에 따르면 브라이언 디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이날 주요 반도체와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을 화상 소집해 반도체 공급망 대책 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화상 회의에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TSMC, 인텔, 애플, 글로벌파운드리스, 마이크론, 마이크로소프트(MS), GM, 포드, 스텔란티스, 다임러, BMW 등이 참석했다. 삼성전자에서는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이 온라인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대책 회의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지난 4월과 5월에 이어 벌써 세 번째다. 그만큼 산업 전반의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는 상황 인식인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반도체 부족 현상 △코로나19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반도체 공급망 영향 △반도체 제조사와 소비업체 등 공급망 전반에 걸친 투명성과 신뢰 증진을 위한 업계의 진전 등이 논의됐다고 백악관은 설명했다.

앞서 지난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자동차 및 반도체 기술업체 경영진과 가진 회의에서도 ‘투명성’ 문제가 거론된 바 있다. 당시 회의에서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반도체 제조업체에 사용 가능한 반도체 규모, 생산 일정을 정할 수 있는 정보 제공을 요구했다. 반면 반도체 업계는 발주 취소 가능성이 있는 이른바 ‘유령 주문’(ghost orders)을 피하기 위해 자동차 업체의 실수요에 대한 명확한 계획을 공유할 것을 주문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반도체 부족은 취임 이후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최우선순위가 돼 왔다”며 “국내 제조 역량과 공급망 복원력을 키워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 “(반도체 부족에 따른) 혼란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파트너 및 동맹국과 협력하고 있다”고 회의 소집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한발 더 나간 미 행정부의 강도 높은 압박이다. 이와 관련 블룸버그는 미 상무부가 기업에 투명성을 요청하며 관련 기업에 45일 내로 반도체 재고와 주문, 판매 등과 관련된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고 전했다. 러몬도 장관도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정보 제공 요청은 투명성 제고를 위해서이며 병목 현상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알아내려는 것”이라며 “기업들에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다른 도구를 공구 상자에 담아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는 바이든 행정부가 코로나19 백신 제조를 독려를 위해 활용한 국방물자생산법(DPA)을 언급했다. 한국전쟁 당시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마련한 DPA를 동원해 기업의 정보 제출을 강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이든 정부의 이같은 요구에 회의에 참석한 기업들이 난처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민간 기업의 실적, 사업 전략 등과 직결되는 내부 정보 공개를 강요하는 것은 영업비밀 노출은 물론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개입 논란을 불러온다는 이유에서다.

사키 대변인은 “우리는 계속해서 의회와 협력해 반도체 칩에 대한 국내(미국) 제조 역량을 확장 및 강화하고 공급망 회복력을 다루는 연방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장기적인 해법에 자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바이든 정부는 내년까지 반도체 부족 사태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러몬도 장관은 “현실적으로 빠르고 쉽게 고칠 수 없다”며 “근본적인 해결책은 미국에서 더 많은 칩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미국은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를 위해 향후 5년간 520억달러(약 61조원)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제안했고, 이는 지난 6월 상원을 통과했다. 그러나 아직 하원을 통과하지는 못했다. 해당 법안은 2000억달러(약 235조원) 예산의 ‘2021 미국 혁신 및 경쟁법’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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