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부품 통관 막으면 노광장비 출하 지연 가능
'가치동맹' 실현 위해 네덜란드 정부 협조 얻을 것

미국이 EUV(극자외선) 외 기존 DUV(심자외선) 노광장비 중국 수출까지 막아달라고 네덜란드 정부에 요청하면서 반도체 산업 패권을 둘러싼 전운이 재고조되고 있다. 사실 미국은 네덜란드의 협조 없이도 노광장비용 광원 수출을 제한함으로써 뜻을 관철할 수 있다. 

안보에 이어 경제까지 하나로 묶는 ‘가치동맹’ 실현을 추진하고 있는 바이든 정부로서는 최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협조를 얻어낼 것으로 보인다. 

/사진=ASML
/사진=ASML

 

미국이 사이머 통관 막으면 노광장비도 막혀 

 

노광장비의 핵심은 각 파장별 빛을 만들어내는 광원 장치다. EUV(13.5nm 파장), ArF(193nm), KrF(248nm) 노광장비는 해당 파장의 자외선 빛을 만드는 광원장치 없이는 구성할 수 없다. 휴대용 랜턴에 비유하면 광원장치는 그 핵심인 전구에 속한다.

네덜란드 ASML은 지난 2012년 미국 사이머를 인수해 관련 기술을 내재화했다. 현재 반도체 업체들이 사용하는 EUV 노광장비의 광원장치는 100% 사이머가 만들고, 이를 시스템화 하는 작업은 ASML이 담당한다. 

공급선이 단일화 된 EUV 장비와 달리 DUV 시장은 이원화 되어 있다. ArF⋅KrF 노광장비는 ASML 외에 일본 니콘도 공급하고 있으며, 이에 붙는 광원장치는 사이머 말고도 일본 기가포톤이라는 대안이 있다. 시장점유율은 사이머-ASML 진영이 70~80% 이상 압도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미국은 중국이 EUV는 물론, ArF⋅KrF 장비까지 수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를 설득하고 나섰다(KIPOST 2022년 7월 6일자 <"미 정부, 네덜란드에 ArF 및 KrF 중국 판매도 금지 요청"> 참조).

사이머의 고객사와 생산시설(빨간점). 오직 미국 샌디에고와 한국에만 생산시설이 있다. 오랜지색 점은 물류창고.. /자료=사이머
사이머의 고객사와 생산시설(빨간점). 오직 미국 샌디에고와 한국에만 생산시설이 있다. 오랜지색 점은 물류창고.. /자료=사이머

이에 대해 네덜란드 정부와 ASML이 공식 반응을 내놓은 바는 없다. 다만 네덜란드 정부와 ASML이 미국 정부에 협조하지 않더라도, 미국은 단독으로 ArF⋅KrF 장비 수출을 제한할 수 있다. 바로 사이머의 광원장치 수출을 제한하는 방법을 동원해서다. 

사이머는 오직 미국과 한국 사무소에서만 광원장치를 생산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미국 샌디에고 생산시설에서 제조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처음 확산했을 때, 미국 내 물류가 막히면서 네덜란드에서의 노광장비 출하가 지연된 바 있다. 이는 광원장치를 사이머에서 받아 오는 ASML의 서플라이체인 구조 때문이다.

만약 네덜란드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미국은 사이머의 통관을 컨트롤하는 방법으로 ArF⋅KrF 노광장비의 대 중국 수출을 막을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동맹인 일본이 니콘과 기가포톤의 노광장비 및 광원장비 대 중국 수출을 막아 준다는 전제 하에서다. 

한 반도체 장비업체 대표는 “미국 정부는 사이머의 통관을 막는 것만으로도 네덜란드의 도움 없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비록 사이머가 지금은 ASML에 인수된 ASML 자회사이긴 하나, 미국은 미국 영토 내에서 생산됐거나 미국 기술을 이용해 생산한 제품에 대해 적대국 수출을 금지한다. 사이머가 ASML에 인수되기 전 미국 회사였고, 지금도 본사는 샌디에고인 만큼 노광장비 광원장치를 대 중국 수출 금지할 명분은 충분하다. 

미국 EAR(수출관리규정)은 심지어 해외에서 생산한 외국 업체 제품도 미국 기술이 사용됐다는 이유로 적대국(이란⋅북한 등) 수출을 금지하기도 한다. 

ASML EUV 노광장비에 장착된 광원. /사진=사이머
ASML EUV 노광장비에 장착된 광원. /사진=사이머

 

ASML, 미국도 눈치볼 수 밖에 없는 상대

 

다만 이처럼 광원장치 통관을 막는 방법으로 중국 제재에 나설 경우, 네덜란드 및 ASML과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중국은 네덜란드의 3대 교역국이며, ASML의 지난해 매출 중 중국 비중은 16%(21억유로, 2조7600억원)에 달한다. ASML에게 중국은 한국⋅대만 다음으로 큰 시장이다. 

만약 미국 정부의 일방적인 조치로 네덜란드의 대중 외교에 변수가 생긴다면,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바이든 정부는 가치동맹을 내걸고 동맹국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러시아 진영에 맞서고 있다. 중국⋅러시아와의 패권 경쟁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동맹국(네덜란드)과의 관계 설정이 틀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특히 미국과 인텔은 반도체 역내 생산 증대를 위해 ASML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처지다.

한 반도체 업계 원로는 “ASML도 미중 관계를 고려해 여러 백업 플랜(대안)들을 마련해 놓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당장 통관이 막히더라도 일단 생산해 놓은 재고를 소진하는 방법으로 일정 기간 버틸 수는 있다. 미국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ASML의 위상도 변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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