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틀을 닦은 진시황의 과감한 인재 등용과 순혈주의에 집착하는 한국 기업

진시황이 시도한 모든 정책은 결국 법가(法家)적 통치를 강력하게 실시해 황제 중심의 일원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법가는 토지를 많이 가진 귀족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유가(儒家)사상과 대비된다. 진나라가 법가를 택한 것은 진시황 가문의 유목적 DNA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400년 후 팍스 몽골리아(PAX Mongolia)도 세금을 적게 받아 백성들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국제무역으로 국가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했다. 몽골 귀족들은 글로벌 유통망을 장악한 위구르 상인, 페르시아 상인 등에 투자해 큰 수익을 얻었기 때문에 굳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과하게 매길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대운하를 건설한 것은 국가주도의 중상주의적 정책이었을 것이다. 진시황때 진나라의 인구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대략 3000~4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수십년간 수백만을 동원해 진시황릉과 만리장성을 건설한 것은 진나라판 뉴딜 정책이 아니였을까 추측해본다.

 

 

진시황이 없었다면 중국이 존재했을까

 

진시황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지독한 독종, 천재 일중독자였다. 무엇이 진시황을 스스로 혹사하게 만들었을까? 13살의 소년은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왕이 됐고 어머니에게는 극도의 증오심을 품었다. 어머니의 정부이자 실세인 여불위(呂不韋)를 늘 두려워하고 문란한 어머니 때문에 여성에 대한 환멸을 느껴 평생 정식황후를 두지 않았다. 몇 차례 암살기도를 겪으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청소년기는 극도로 외롭게, 오랜 시간을 홀로 번민하며 보냈을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런 수준의 압박을 받으면 인생을 자포자기 했을 테지만 진시황은 청소년기의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고 제국건설의 야심을 꿈꿨던 것 같다.

 

명 재상 이사(李斯) 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진시황은 고도의 시스템을 설계한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다. 29세에 천하통일 전쟁을 시작한 그는 39세에 제(薺)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완수했다. 그리고 국가적 통일을 위해 경제적인일원화를 추구했다. 우선 화폐를 통일했다. 전국시대 국가별로 달랐던 길이·부피·무게 등 도량형도 통일했다. 각국의 한자를 오늘날 중국 한자의 원형인 소전체(小篆體)로 통일했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토목공사로 마차궤도를 통일한 도로와 운하를 만들고 만리장성을 축조했다. 중국제국은 운하 체계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 곡물에 일정 부분 의존했는데, 생산되는 곡물의 일정량은 세금으로 걷어 황실로 전달했다.

 

병마용의 군대가 사용한 모든 장비는 완벽하게 표준화돼 전쟁이 일어났을때 장비에 따른 적확하고 예측 가능한 전술을 쓸 수 있었다.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 투창 거리, 수레의 이동속도 등을 철저하게 계량화하면 적국과의 대치했을 때 다양한 전술을 예측가능한 범위에서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는 것이다.

 

진시황 때 만리장성은 말이 뛰어넘지 못할 정도만 쌓아 높이가 2-3미터에 불과했고, 명나라에 이르러 7~8미터로 높아졌다. 만리장성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농경문명권의 한계를 정하는 의미도 있었다. 실제로 만리장성은 이민족의 침략을 막는데 도움이 된 적이 별로 없다. 진시황때 만든 도로는 판축공법(板築工法)으로 만들어졌는데, 22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도로 위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간선도로의 폭은 50m로, 8차선인 경부고속도로(30m)보다 넓다.

 

그는 천하통일 후 이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확인하려고 엄청난 규모의 행렬을 이끌고 장기간에 걸쳐 제국 순시를 다녔다. 통일 후 죽기 전까지 13년간 다섯번에 걸쳐 거의 절반 가까이 장거리 순시를 다녔다.

 

진시황이 없었다면 중국이 존재했을까? 필자는 진시황이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진시황의 최대 공적은 ‘하나의 중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나라라는 명목상의 나라가 있었지만, 봉건시대인 춘추전국시대 이전 사람들은 중국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39세에 북중국을 통일하고, 51세에 죽을 때까지 12년간 진시황은 ‘제국’이라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건설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한다. 한자로 문자를 통일했으며 군현제 실시, 화폐, 도량형 통일로 법가중심의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중국이라는 지속 가능한 플라이휠(Flywheel) 시스템을 만들었다. 만리장성, 대운하, 진시황릉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만들어 북중국 평야 전체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얽히게 했다.

 

병마용의 군대가 사용한 모든 장비는 완벽하게 표준화돼 전쟁이 일어났을때 장비에 따른 적확하고 예측 가능한 전술을 쓸 수 있었다.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 투창 거리, 수레의 이동속도 등을 철저하게 계량화하면 적국과의 대치했을 때 다양한 전술을 예측가능한 범위에서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는 것이다.

 

진나라는 기원전 336년부터 반량전(半兩錢)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전국시대 각국에서는 도시마다 멋대로 화폐를 만들어 형태와 가치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용하기가 불편했다. 이에 진나라는 형태와 가치를 통일한 반량전을 만들어 사용을 의무화했고, 동시에 다른 나라의 화폐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공정화폐'를 만든 것은 당시 전국시대 7개국 중에 진나라가 유일했다. 화폐 통일로 진나라는 유통과 무역이 발달하고 도시가 발전한다. 정부 입장에서도 세금징수나 군비조달이 수월해졌고 수입도 많아졌다. 진나라가 전국시대의 패자(霸者)가 된 것은 반량전 사용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와 큰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당시 화폐가 없던 한반도에도 반량전이 많이 사용됐고, 다량 출토됐다. 이는 반량전이 동북아의 기축통화가 되기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시황이 죽은 뒤 일어난 초(楚)나라 항우(項羽), 한(漢)나라 유방(劉邦)은 봉건제의 부활을 기치로 일어섰지만 승자가 된 한나라는 결국 진나라의 시스템을 계승해 군국제(郡國制), 군현제(郡縣制)를 받아들였다. 지금 유럽연합(EU)이 추진하는 경제통합, 정치통합을 2200년 전에 만들어낸 것이다. 진시황이 만들어놓은 군현제는 1911년 청(淸)조가 멸망할 때까지 2100년 동안 중국을 지탱하는 핵심 시스템이었다.

 

진시황에 대해서는 성격이 잔인하고 냉정했다는 평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집요한 천재 워커홀릭'이라고 하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한서(漢書)’의 ‘형법지(刑法志)’에는 진시황이 죽간(竹簡)으로 지어진 공문서를 매일 120근(30kg)씩 처리하지 않고는 먹지도 쉬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한달이면 1톤의 죽간을 읽은 것이다. 그는 의심이 많아서 신하들이 일을 잘하나 계속 감시하거나 아예 자기가 도맡으려 했다고도 한다. 그는 이 제국 시스템을 완벽하게 작동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대순시와 현장점검을 나섰고, 하루에 일할 양을 정해놓고 마치지 못하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일을 해치웠다고 한다. 진시황은 자기 잘못은 바로 인정하고, 행동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진시황에게는 아첨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스텝들은 자기 일을 잘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학식도 뛰어났고,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는 신하들끼리 충분한 토론을 하도록 한 후에 결정하게 할 만큼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했다.

 

진시황이 한자를 통일하고, 화폐·도량형 등의 표준을 통일하는 과정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가 윈도(Windows)를 표준으로 만들고 시장을 독점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높은 차원의 표준화다. 진시황은 심지어 차 바퀴의 폭, 수레바퀴의 크기까지 일률적으로 정하게끔 명했다. 화산재에 묻혔던 이탈리아 폼페이에 가보면 길바닥에 바퀴가 지나간 자리가 기차 궤도처럼 움푹 파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진시황도 전국의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바퀴 폭까지 통일시켜 중국의 수레 교통 인프라를 혁신시켰다. 하야시다 신노스케 일본 고베대 교수는 “진시황은 국가경제를 전망할 줄 아는 날카로운 지력과 신흥 부르주아지의 자유롭고 활달한 패기를 지니고 있었다”면서 “난세에 질린 당시의 부르주아지들이 천하통일을 기대하며 일제히 자금을 대주었고, 결국 그 자금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분석을 내린 바 있다.

 

천재적이고 집요한 시스템의 설계자 진시황은 현대에 태어났더라도 탁월한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진시황이 현대에 태어나 우리회사의 경쟁사 CEO가 되었다면, 우리회사는 엄청난 고난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정주영의 과감한 돌파력, 이건희의 치밀함을 갖추고, 장기적으로 집요한 투자를 강행하며, 유연한 원칙주의로 무장한 일 벌레는 현대 사회에서도 당연히 초특급 인재가 되었을 것이다.

 

 

진나라 천하통일의 힘, 실력 위주 인재 등용

 

필자는 기업가로서 특히 진시황의 인재경영을 주시했다. 그는 인재를 등용할 때 능력만 있다면 지역과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았고,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인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줬다. 과거의 잘잘못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인재의 충언을 받아들였다. 진나라의 경쟁 국가들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미천한 신분의 인재에게 기회가 없었다. 상앙(商鞅)과 이사(李斯) 같은 초일류 인재들이 진나라로 몰려들었다. 진시황과 징기스칸의 능력 위주 인재경영은 쌍둥이 수준으로 같아 보인다. 징기스칸도 수부타이, 제베 같은 적장이나 노예출신의 인재들을 과감하게 등용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국 대기업의 리더들은 그 회사에서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들이 많고, 이들은 자신들의 공채 기수, 입사연도 등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다. 10여년 전 한국 대기업에서 한때 외부 인재 수혈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는데, 어렵게 모셔온 외부 인재들 대부분이 그 회사 터줏대감들의 텃세를 못 이기고 떨거져 나가는 것을 자주 봤다. 한국 같이 제국을 운영해본 경험이 없는 작은 나라들은 온정주의, 파벌주의, 순혈주의가 판을 치게 되어있다. 비즈니스 모델이 단조로웠던 과거에는 충성심 같은 순혈주의의 장점이 쉽게 먹혀 들었지만, 급변하는 글로벌 경쟁시대에는 실력위주의 인재등용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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