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릉(昭陵)에 있는 당(唐) 태종(太宗)릉에서 발굴된 6준마(駿馬), 즉 '소릉육준(昭陵六駿)'은 당태종 이세민이 천하 통일을 할 때 직접 탄 여섯 필의 말이다. 희한한 건 이 6마리가 모두 이민족 말이라는 점이다. 장군들의 말 천마(千馬)는 화살이 꽃혀도 투지를 가지고 달려야하는데, 이런 말은 천마리에 두세마리밖에 없다. 전투가 일어나면 실제로 말도 같이 물어뜯고 발로 차며 싸운다. 천마는 특별한 품종이 있지는 않았다. 훈련된 말 중에 적성검사를 통해서 명마를 선별했다. 훌륭한 인재가 성장하는 것처럼 명마도 치열한 훈련과 실전경험으로 만들어진다.

 

당태종 6준마의 한마리는 화살을 여섯발 맞고도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표현됐다. 당 태종에게 실제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 태종은 16세부터 장군으로 맹활약했다. 고구려로 출병을 하면서 “내 말은 내가 묶는다. 하인은 두명 만 데려가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출병했다 한다. 원래 기병 한명에 2명의 보조는 기본이니, 다른 기병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출전한 것이다. 반면 수(隋) 양제(煬帝)는 고구려를 침공할 때 수십마리 소가 끄는 집채만한 가마를 타고 출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 태종의 솔선수범 리더십은 그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군주의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이며 신생국 당나라를 자리잡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는 명장 이정(李靖)을 발탁해 중국의 전통적 보병 전술과 유목 민족의 장기인 기병전술을 결합해 천하무적 기보병 연합 전술을 창안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기병전술을 기보병 연합전술로 보완해 토번(吐蕃)과 돌궐(突厥) 을 정복했다.

 

왜 수 문제(文帝)·양제(煬帝)와 당 태종은  국가의 멸망을 무릅쓰고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을까? 고대 수·당의 인구는 5000만~60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고구려 침공에 100만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국운을 건 도박(배팅)이었을 것이다. 아마 만주를 통일한 고구려는 수·당의 존재를 위협할 최대의 잠재적 위협이었으리라. 수나라는 주변민족이 성장하기 전, 선제 타격으로 싹부터 자른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는 당으로, 이어졌고 당나라는 토번과 돌궐을 정복한 이후에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당 고조(古祖)의 묘 앞에 세워졌던 10톤짜리 육중한 코뿔소 석상. 외국 승려에게 코뿔소를 선물로 받았다는데, 코뿔소가 영물로 여겨져 죽은 이후에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때도 코뿔소를 외국에서 선물로 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한나라 무릉에 가면 청동코뿔소가 있다. 7세기 중국에는 이미 코뿔소가 멸종되다시피 사라졌으나, 춘추시대 오나라 때만해도 코뿔소 가죽으로 만든 갑옷, 서갑은 최고의 명품이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때 이미 서갑은 보물급의 갑옷이었지만,  그 이전 상나라, 주나라 시대 때에는 갑옷의 재료로 코뿔소 가죽 서갑을 흔히 사용하였다.  주나라 때까지만 해도 중국전역에 흔했던 코뿔소, 코끼리가 중국에서 사라진 것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인간의 환경파괴 때문이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른 말과 활

 

말과 활은 고대의 첨단 무기로 누가 더 좋은 말과 마구, 활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정해지곤 했다. 중국의 통일 왕조 중에 농경민 출신의 순수 한족(漢族)은 한(漢)·명(明)·송(宋) 세 나라에 불과하다고 본다. 진(秦), 수(隨), 당(唐), 원(元), 청(淸) 등 통일 왕조는 유목적 전통을 가지고 있거나 북방 유목민이 세웠다.  유목민족이 국가적인 규모로 역사에 등장하고 중국을 위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흉노족 시대부터다. 흉노족이 급성장한 것은 단순히 두만(頭曼)이나 모둔(冒屯, 묵특이라고도 부른다) 같은 뛰어난 선우(單于, 지도자)가 출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무렵 흉노로부터 말의 재갈이 전래되었다는 사실도 이유를 짐작케 하는 중요한 단서다. 재갈은 고삐를 장착하기 위해 말에 물리는 쇠 장식인데, 서방의 스키타이로부터 전해졌다. 덕분에 기마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유목민의 전투력이 급상승했다. 흉노는 재갈에 물린 고삐로 말을 자유롭게 다뤘다. 이는 기마 전투력의 급상승을 가져와 농경 민족을 침공하는 것이 더욱 쉬워졌다.

 

흉노의 인구는 30만~60, 기마 병력도 10만명 이하로 추정되나 인구 3000만 내지 4000만명이던 한나라를 가뿐히 제압했다. 다만 묵특선우가 백등산(白登山)에서 30만 기병을 동원해 한 고조 유방(劉邦)을 포위했다는 것은 심한 과장으로 보인다.  

 

등자는 말 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인데, 말위에서 균형을 잡거나 올라탈 때 유용하게 쓰인다. 등자는 동쪽 선비(鮮卑)나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기원전 2·3세기부터 중국 대륙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당을 세운 것은 탁발선비(拓跋鮮卑)족 계열 유목민이 주축이다. 진나라도 서융(西戎)이라는 유목민 후예들이 세운 나라였다. 고대 군사력에서 말과 활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시안박물관에 전시된 과거의 전투. 활을 쓰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돼 있다.

흉노에게 치욕적인 패배와 수모를 겪었던 한 무제(武帝)는 서역을 다녀온 특사 장건(張騫)에게 한혈마(汗血馬)에 관한 정보를 듣고 그 말을 얻는데 총력을 쏟았다. 한혈마를 이용해 중국의 말을 개량해 흉노와의 굴욕적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계곡에서 한혈마 수십마리를 가져오기 위해 대완국(大宛國)과 싸워 병력 7만명을 희생시켰다. 대완국 원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이광리(李廣利) 를 처벌하기는 커녕 한혈마를 칭송하는 시까지 지었다.  

 

한무제가 한혈마를 위해 지은 시  
 
천마가 왔도다.  
서쪽 끝에서 사막을 넘어 찾아왔도다.  
오랑캐의 나라를 모두 복속시키고 왔도다.  
 
천마가 왔도다.  
샘터에서 왔도다.  
호랑이와 같이 등뼈가 가지런하고

달리니 귀신과 같도다.  
 
천마가 왔도다.  
불모의 사막을 지나  
동방의 길을 찾아왔도다.  
 
천마가 왔도다.  
별이 동남쪽에 왔을 때  
사람을 태우고 날아오를 것이라.  
 
천마가 왔도다.  
궁궐에 들여 신묘히 올라타고  
곤륜으로 갈거나.  
 
천마가 왔도다.  
용이 주선한 것이로다.  
천마가 왔도다.  
다음은 용을 타고 천제의 옥대를 볼 수 있으려니.

 

흉노족 인구는 한나라의 일개 현(縣) 수준에 불과했지만 고대 첨단 무기인 말과 활의 위력을 활용, 차별화된 군사력으로 수십배 인구의 농경민족을 제압할 수 있었다. 현대 기업들도 강력하고 차별화된 핵심 경쟁력만이 성장의 기본임을 명심해야 한다. 기업의 차별화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차별화 포인트가 기술이든  전략이든 기업문화든 각고의 노력으로 오랜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야 경쟁 기업들을 이길 수 있는 핵심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전세계 모든 기업의 재무 수익의 80%는 시장의 선택이 아니라 동종업계 내에서 경쟁 업체와의 상대적인 성과에 기인한다고 한다. 한 무제가 7만명 병력을 희생시켜가면서 대완국에서 뺏어온 한혈마라는 차별점은 흉노를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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