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당국 결정, 인수 기업 국적이 더 중요
중국 반대는 무역 장벽에 대한 반격
'동맹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 재편 가시화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가 결국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 인수 포기를 선언했다. 이번에도 중국이 막아섰다. 인수 시한은 3번이나 연기됐고, 가격은 35억달러(약4조원)까지 높였지만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는 고쿠사이를 품에 안지 못했다.

미⋅중 무역 갈등에 따른 파열음이 미국 반도체 업체 빅딜을 번번이 무산시키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서플라이 체인(공급망) 구축에 속도를 내고, 중국은 미국 중심 인수합병에 적극 비토권을 행사한다. 

업계는 미국 엔비디아의 영국 ARM 인수 역시 무산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한다.

2012년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조 바이든 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사진=게티이미지파일

인수합병 칼자루 쥔 중국 

인수합병 최종 문턱은 각국 규제 당국의 심사다. 

기업 본사가 있거나, 해당 기업의 시장 매출액이 많은 나라가 해당한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유럽위원회⋅영국 경쟁시장청(CMA)⋅중국 시장 규제국 등이 있다. 

이들 중 한 곳만 반대해도 인수는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엄밀히 말하면 규제 당국이 반대해도 인수 추진은 가능하다. 다만 승인을 받지 못한 나라에서는 영업을 할 수 없다. 지난해 매출액 기준 중국 반도체 시장 규모는 1517억달러(약171조원)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다. 중국이 인수합병 반대표를 던진다면 사실상 중국 시장을 배제해야 한다. 전병서 중국경제연구소 소장은 "중국 시장 규제국 동의 없이 인수합병을 추진한다면 중국 시장은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중국을 제외한다면 인수합병 가격이 그만큼 낮아져야 한다. 사실상 메가딜이 무산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원래 각국 규제 당국의 심사는 시장 독점을 막기 위한 것이다. 공정거래법을 도입한 대부분 국가가 기업 결합 심사제도를 두고 있다. 

기업결합 경쟁제한성 추정 기준./자료=공정위

한국 역시 1981년 공정거래법 제정 당시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다. 전체 매출액 3000억원 이상, 결합 당사자 양사 국내 매출액이 300억원 이상이라면 심사 대상이 된다. 수평적 경쟁 관계⋅수직적 독점 여부 등을 고려한다. 

이석준 법무법인 율촌 미국변호사는 "수평적 측면뿐 아니라 수직적 측면의 수요⋅공급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라며 "예컨대 ARM칩이 독점적 지위에 있다면 엔비디아 경쟁사에게는 공급 봉쇄 등 문제가 생기는지 고려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국 반독점당국의 결정에서 인수 기업 국적이 더 중요한 요소다. 고쿠사이가 매물로 나왔을 당시 중국 기업 역시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쿠사이는 히타치국제전기에서 분사한 장비 업체로 2017년 미국 펀드인 KKR(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이 인수했다. 그러나 중국은 자금이 있어도 미국⋅일본기업 인수합병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국이 중국을 배제하는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비토권 행사는 미국의 무역장벽에 대한 반격이다.

전병서 소장은 이에 대해 "미국이 무역장벽을 쌓고, 중국은 기업결합 반대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전재민 반도체협회 공정장비팀 팀장도 "회사 규모⋅독점 여부는 더 이상 인수합병에서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다"며 "미국 중심의 결합이라면 중국은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도 반대 관측

엔비디아의 ARM 인수 역시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지난해 9월 ARM을 소유한 일본 소프트뱅크는 엔비디아에 ARM을 매각한다고 밝혔다. 매각 금액만 400억 달러(약 47조원)다. 미국 FTC⋅영국 CMA도 인수 계약 관련 조사를 시작했다. 퀄컴과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Alphabet)⋅MS(마이크로소프트)는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엔비디아가 경쟁 업체에 ARM 기술에 대한 접근을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DGX SUPERPOD이 구축된 모습./엔비디아
DGX SUPERPOD이 구축된 모습./사진=엔비디아

미국 내부 정치 지형 역시 호의적이지 않다. 블룸버그 통신은 민주당이 집권 여당이 되면서 FTC가 반독점 문제에 더 민감해졌다며,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어려울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번 딜 역시 최종 칼자루는 중국이 쥘 전망이다. 

미국 내부 여론이나 유럽⋅영국 등 우방국의 경우는 어느 정도 '주고 받기'식 거래가 가능하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반면 중국 문턱은 높을 것으로 전망한다. 전병서 소장은 "다른 우방국들은 미국 협상력에 따라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반면 중국은 미국 제재가 계속되는 한 인수합병 반대표를 놓지 않을 것이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 역시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에도 중국 반대로 퀄컴의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 NXP 인수는 무산된 바 있다. 중국을 제외한 미국⋅일본 등 8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았지만, 중국만 반대 의사를 밝혔다. 앞서 미국 역시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국계가 최대 주주로 있는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를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발표했다. 

더욱이 당시보다 미⋅중 무역 갈등은 더 거세지고 있다. 최근 중국은 군사 지역 내 테슬라 차량 진입을 금지했다. 내장 카메라 등이 각종 군사기밀 수집 위험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는 과거 미국 정부가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린 흐름과 유사하다.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이 통신 장비에 백도어 칩을 장착해 미국과 우방국의 핵심 정보를 빼돌리고 있다고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왼쪽) 조 바이든(오른쪽) 사진./사진=THE STRAITS TIMES
스가 요시히데(왼쪽)와 조 바이든./사진=THE STRAITS TIMES

당분간 이러한 흐름은 지속될 전망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을 배제한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달 반도체 등 중요 공급망을 재검토하는 행정명령을 논의했다. 중국을 배제하고, 동맹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이달 중순이면 반도체 동맹은 가시화될 전망이다. 일본 주요 일간지 중 하나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달 16일로 예정된 미⋅일 간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반도체 등 주요 제품 공급망에 협력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중국에 생산이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결국은 패권 경쟁이다. 자국 이기주의로 가는 것은 이제 미⋅중 간 경쟁구도에서 상수"라며 "미국이 중국에 무역장벽을 쌓고, 중국이 인수합병 반대로 반격하는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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