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AP에서 시작된 핵심 부품 내재화, GPU·모뎀 이어 PC용 프로세서까지
바통 넘겨받아 자동차·서버 업계도 자체 칩 개발 돌입... 롤모델은 늘 '애플'

이번엔 맥(MAC)이다. 애플이 모바일 폰, 태블릿PC에 이어 맥 PC용 자체 시스템온칩(SoC)를 자체 개발한다. 2년 내 현재 맥 PC용 프로세서 공급사인 인텔을 온전히 대체하는 게 목표다.

파운드리 협력사는 TSMC다. 극자외선(EUV) 기반 7나노(N7+)의 파생 공정인 6나노 공정(N6)을 활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지난해 발표된 이 공정은 올해 하반기 대량 양산이 예정돼있다. 

 

파워PC에서 x86으로, 그리고 Arm으로

 

애플의 맥 SoC에 담길 기능들./애플 기조연설 캡처

애플은 22일(현지 시간) 열린 ‘세계 개발자 컨퍼런스(WWDC) 2020’에서 연말 Arm 기반 첫 번째 맥 제품을 내놓는다고 밝혔다. 어떤 제품에 가장 먼저 독자 칩이 내장될 지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리스크를 감안해 맥 프로 같은 고성능 모델보다 하위 제품인 맥북 등에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애플이 프로세서(CPU) 공급사를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모토로라68000 시리즈에서 AIM(애플·IBM·모토로라) 플랫폼이 개발한 파워PC(PowerPC)로 전환했고, 2005년 파워PC를 인텔의 x86 프로세서로 바꿨다. 이를 통해 사용자들은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운영체제(OS) 및 소프트웨어를 맥PC에서도 활용할 수 있었다. 

당시 애플은 지금처럼 2년 내 파워PC 플랫폼을 인텔 기반 플랫폼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실제로 걸린 시간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사이에 개발자들은 인텔 기반 개발자 전환 키트(DTK)로 파워PC 기반 소프트웨어를 전부 x86 기반으로 바꿨다. 
 

애플이 개발자들을 위한 DTK(개발자 전환 킷)을 이번 주부터 제공한다. (사진=키노트 캡처)
애플은 자체 SoC 기반 맥 개발자들을 위한 개발자 전환 키트(DTK)를 이번 주부터 제공한다./애플 기조연설 캡처

연말 첫 선을 보이게 되는 맥용 SoC는 Arm 기반이다. Arm 기반이라고는 하지만, Arm이 제공하는 레퍼런스 아키텍처를 활용하는 게 아니라 아이폰·아이패드의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A’ 시리즈처럼 애플이 자체 개발한 아키텍처가 쓰인다.

애플은 이 SoC에 고성능 코어, 고효율 코어와 함께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신경망 엔진(Neural Engine), 카메라용 프로세서(ISP), 기계학습 가속기 등도 담을 것이라 발표했다. 

노트북PC와 데스크톱PC의 경우 요구되는 성능과 전력소모량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트북PC인 맥북과 맥미니, 데스크톱PC인 맥프로와 아이맥프로에는 아키텍처를 공유하는 SoC가 별도로 개발,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팀 쿡(Tim cook)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이를 발표하면서 “맥의 커스텀 칩을 위한 여정이 10년이 넘었다”며 “오늘은 맥의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자체 칩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

애플이 맥용 프로세서를 내재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2010년 이후로 꾸준히 제기됐다. 그 즈음 이 회사는 모바일 기기에 내장되는 AP를 자체 개발, 적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 애플은 10여년 전부터 맥용 SoC 개발에 돌입했다.

AP든, 맥용 SoC든 애플이 자체 칩을 개발하는 이유는 하나다.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환을 두고 일각에서는 인텔의 CPU가 만족할만한 성능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OS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 강화에 있다.

하드웨어 업체로서 애플의 가장 큰 강점은 자체 운영체제(OS)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타사가 구글 안드로이드 OS에 종속돼있는 것과 달리 애플은 자체 OS를 갖고 있고, 그것만으로 차별화 포인트가 된다. 

 

이번에 발표된 iOS 14에서는 위젯을 재설계, 사용자가 시의적절한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애플

때문에 애플이 매년 발표하는 로드맵의 중심에는 항상 OS가 있다. 하지만 OS도 결국 소프트웨어일 뿐이다. 소프트웨어를 가동하는 하드웨어가 이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그릇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소프트웨어라도 쓸 수가 없다.

맥만 들여다봐도 그렇다. 지금까지 애플은 인텔과 AMD로부터 각각 프로세서와 GPU를 공급 받았다. 아무리 OS의 로드맵을 탄탄하게 짜고, 매년 기능을 업그레이드해도 인텔과 AMD의 하드웨어 성능에 발목을 잡힌다. 애플만 아니라 애플 생태계에 있는 서드파티 업체들과 앱 개발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애플은 AP를 자체 개발했다. 경쟁사들이 퀄컴의 프로세서와 GPU를 쓰면서 매년 차원이 다르게 커지는 GPU 다이(die) 사이즈를 감당하기 어려워할 때 이 회사는 CPU 크기를 줄이면서 GPU를 키워 그래픽 처리 역량을 강화했다. 그러면서도 CPU의 성능은 매년 벤치마크 상위에 오를 정도로 최적화했다. 같은 이유로 지난해에는 인텔의 모뎀 사업부까지 인수, 5G 모뎀칩 솔루션 개발에 돌입했다.

업계 관계자는 “모바일 기기의 화질이 좋아지고 게임 등 콘텐츠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2010년 이후 GPU 사이즈가 매년 10~20% 커졌는데, GPU 사이즈가 커지면 다른 부품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고 배터리 크기도 늘리기 어려웠다”며 “애플은 자체 칩을 개발하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개발자들은 애플리케이션을 하나만 개발해 스마트폰·태블릿PC·노트북PC·데스크톱PC 등 네 가지 플랫폼에 모두 서비스할 수 있게 된다./애플

맥용 SoC도 마찬가지다. 자체 SoC를 개발하게 되면 애플은 더 이상 인텔, AMD 등 프로세서 공급사들의 하드웨어 개발 일정과 사양에 맞춰 로드맵을 짤 필요가 없다. A 시리즈 개발 로드맵을 짤 때처럼 소프트웨어 로드맵을 먼저 수립한 다음 그에 맞춰 SoC 로드맵을 구성하면 된다.

기존 iOS 플랫폼과 iPadOS에 있는 앱을 별다른 코딩이 필요 없이 맥 OS에서 바로 구동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개발자 입장에서는 애플리케이션(앱)을 한 번만 개발해 스마트폰·태블릿PC·노트북PC·데스크톱PC 등 네 가지 플랫폼에 모두 서비스할 수 있게 된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당장은 CPU만 인텔의 x86 대신 자사의 SoC를 쓰겠다는 계획이지만 외부 그래픽처리장치(eGPU) 공급 업체인 AMD 또한 입지가 위태로운 상황”이라며 “애플이 eGPU를 능가할만큼의 GPU를 개발할 수 있을지는 따져봐야겠지만 모바일용 GPU도 내재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애플이 쏘아올린 작은 공, 대세는 자체 칩

 

아이폰 5./애플

앞서 애플은 자체 AP를 개발하면서 이전까지 필요한 칩을 구매해 쓰던 모바일 업계에 작은 공을 쏘아올렸다. 이번 Arm 기반 PC용 프로세서는 애플이 쏘아올린 또다른 작은 공이다. ‘저전력’에 갇혀있던 Arm의 하드웨어 명령어 집합 아키텍처(ISA)가 PC·서버같은 고전력·고사양에도 충분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처음 애플이 자체 AP를 개발한다고 했을 때 반도체 업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완성품 업체가 뛰어난 반도체를 개발할 수 있느냐는 의구심과 굳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지불해가며 자체 칩을 개발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인식 탓이다. 

실제 자체 칩을 개발했음에도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칩 자체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실패한 케이스가 삼성전자의 엑시노스고, 타사 소프트웨어 연동에 실패한 사례가 마이크로소프트(MS)의 퀄컴 파생 칩 SQ1이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끊임없는 연구개발(R&D)과 OS의 장악력으로 이같은 문제에서 자유롭다”며 “애플은 자체 칩을 개발하는 전용반도체(ASIC) 시장의 선두주자로, 모든 업체가 자체 칩 개발을 검토할 때 애플의 성공 사례를 참고한다”고 말했다.

애플이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자동차로 이어졌다. 테슬라가 애플 출신 피트 배넌(Pete Bannon)을 영입, 자체 칩 ‘FSD(Full Self Driving)’ 개발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업계는 애플에 그랬던 것처럼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테슬라의 FSD는 성공했고, 이는 곧 다른 완성차(OEM) 업체도 자체 칩 개발에 돌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도체 설계자동화(EDA)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 치고 자율주행 칩을 개발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라며 “특히나 반도체를 구매할 경우 자율주행 핵심 기술의 주도권을 반도체 업체들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크다”고 말했다.

 

애플은 맥용 SoC 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 노트북PC와 데스크톱PC의 전력소모량 및 성능의 요구치가 서로 다르다고 강조했다./애플 기조연설 캡처

이번에 애플이 쏘아올린 공은 Arm 기반 PC, 나아가 Arm 기반 서버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Arm은 저전력을 기반으로 매년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며 모바일 코어 아키텍처 시장을 지배했다. 

하지만 ‘저전력’은 PC나 서버처럼 전력 소모량의 한계가 상대적으로 덜한 시장에서는 오히려 그만큼 성능이 낮다는 말로 통한다. 때문에 Arm은 이 시장에서 좀처럼 입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Arm 프로세서는 x86 프로세서 대비 전력소모량은 낮지만 성능이 떨어지고, 여전히 인텔은 서버용 프로세서 시장의 95.5%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애플은 Arm의 아키텍처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게 아닌, 이를 수정해 자체 아키텍처를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독자 칩을 가진 인텔은 고객사의 ISA 변경을 허용하지 않지만, 설계자산(IP) 업체인 Arm은 고객사가 자체 아키텍처를 개발할 수 있도록 ISA를 별도로 라이선스해준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Arm의 ISA로도 고성능 아키텍처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며 “많은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업체들도 Arm의 아키텍처를 커스터마이징해 독자 칩을 개발하고 있지만 이와 병행해 기존 업체들의 범용 제품을 쓰는 것도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번 애플의 발표로 Arm 기반 자체 서버 칩 개발에 불이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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