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용 감광액(PR) 원료 등 국내 공급 업체 찾는 외국계 소재 업계
훈풍 이어질지 장담 못해… OEM 기준 충족하는 국내 업체는 한정적

지난해 일본 소재 수출 규제에 연이은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은 첨단 제조업 후방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가장 좋은 품질의 제품을 가장 싸게 공급하는 회사를 찾아 ‘글로벌 소싱’에 나섰으나, 이제는 적극적으로 ‘로컬 소싱’을 추진한다. 

이에 글로벌 소재 업계는 공급망(SCM)을 한국 업체 중심으로 재편성하고, 국내 소재 업체를 인수합병(M&A)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글로벌 소재 업계, 국내 공급망 꾸린다

최근 도쿄오카공업(TOK)·듀폰 등 글로벌 소재 업체들은 국내 원료 업체들과 납품 논의를 진행 중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한달 간의 자가격리 기간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본사 임원들이 직접 방문해 생산라인을 둘러보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소재 업계 관계자는 “특히 일본 소재 업체들이 규모와 상관 없이 괜찮은 소재 업체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하거나 국내 소재 업체를 찾아 라인부터 보자고 하는 등 굉장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일본 JSR 등 일부 업체들은 M&A를 할만한 업체들도 물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소재 업계가 국내 소재 업체를 탐내기 시작한 건 지난 2월말부터다. 글로벌 소재 업계의 공급망은 일본에 치중돼있는데, 그쯤부터 일본 원료 업체들이 하나 둘 가동을 멈췄다. 그때부터 업체들은 이들을 대체할 한국 업체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쿼츠 제품. EUV 공정 포토마스크용 쿼츠는 일본 업체들이 과점하고 있다. /사진=토소
다양한 쿼츠 제품. EUV 공정 포토마스크용 쿼츠는 일본 업체들이 과점하고 있다./토소

삼성전자 등 반도체 제조사들이 일본 업체 대신 한국 업체를 주축으로 공급망을 꾸리라고 요구한 것도 이같은 움직임의 결정적 원인이다.

지난해 일본 수출 규제 당시 국내 반도체 제조사들은 극자외선(EUV) 감광액(PR) 등 주요 소재 공급업체에 일본에 치중된 공급망을 한국 업체로 꾸리라고 권고했다. 일본 업체가 중심이 된 소재 업체들의 명단인 ‘J리스트’까지 돌았지만, 당장 공급에 문제가 없으면 공급망을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됐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일본과 유럽 등 주요 원료 업체들의 가동률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고객사의 ‘권고’는 사실상 ‘강제’ 수준으로 강화됐다. 삼성전자만 하더라도 소재 업체가 신규 소재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해당 소재의 공급망에 한국 업체를 반드시 끼워넣을 것을 요구한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도 한국 원료 업체로 공급망을 대체할 수 있는 소재 업체를 선호한다”며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제조사들이 협력사들에게 공급망 교체를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반색하는 국내 소재 업계, 하지만...

금호석유화학 소재연구팀 연구원이 전자소재를 테스트하고 있다. /사진=금호석유화학
금호석유화학 소재연구팀 연구원이 전자소재를 테스트하고 있다./금호석유화학

이에 국내 소재 업계는 반색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 수출 규제 이후 일명 ‘소부장’, 즉 소재·부품·장비 육성이 정부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른 데 이어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내재화까지 연이은 호재다.

하지만 공급망의 100% 국산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소재 기술이 핵심인 디스플레이와 달리 반도체 소재는 상대적으로 국산화가 더뎠다. 종류도 다양한데다 장비처럼 대당 수십, 수백억원을 호가하는 제품이 아닌지라 반도체 장비에 비해서도 국산화율이 떨어진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가 추정하는 반도체 소재 국산화율은 50%지만, 실제 양산에 쓰이는 소재만 감안하면 30% 미만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국산화된 소재들도 원료는 대부분 일본 등 외국 업체로부터 들여온다. 감광액(PR) 원료만 하더라도 국내 반도체 제조사에 납품 승인을 받은 국내 업체는 단 세 곳 뿐이다. 공급망 국산화 움직임으로 당장 수혜를 볼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라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원료나 소재 모두 1~2년으로는 엄두도 못내는 기초 기술이고, 제조사가 세부 사양을 알려줘도 이 기간 내에 개발할까말까할 정도로 까다롭다”며 “원료부터 국산화하면 좋겠지만 적어도 10년간의 장기 투자가 필요해 기업도, 정부도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제조사의 공급망 국산화 요구 또한 권고로 원상복귀될 것이라고 업계는 예측한다.

각 원료 하나하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소재 업체에는 공급망을 바꾼다는 일 자체가 큰 도전인데, 이들의 기준을 충족할만한 국내 소재 업체가 현실적으로 많지 않다. 

기술력이 있는 업체들조차 규모가 어느정도 받춰지지 않으면 제조사와 납품 논의를 하는 것조차 어렵다. 특성상 한번 불량이 나면 적어도 수천장의 웨이퍼가 폐기되는만큼 제조사들은 적어도 연매출 네자릿수 이상에 십여년 이상의 업력을 갖춘 업체들을 선호한다. 

그렇지 않으면 1차 공급사가 외주를 주는 형식으로 제품을 납품해야하는데, 1차 공급사들도 불량 등의 이슈가 없으면 좀처럼 공급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외국계 소재 업체 관계자는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지난해부터 한국 업체 여럿과 접촉했지만 원료 쪽은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며 “기초 기술도 중요하지만 첨단 장비에 대한 투자도 해야하는데, 투자할 여력이 없어 기술 자체를 검증할 수 없는 기업도 많다”고 말했다.

이에 업계는 고객사인 반도체 제조사부터 장비 국산화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원료부터 자체수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공급망 전반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얘기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편·불법으로 레시피를 아예 대놓고 공유해주면서 소재를 개발하게 했는데, 이 방식으로는 일본 같은 소재 강국이 되기 어렵다”며 “반도체 특성상 개발 주기가 빨라 한 번 기술을 따라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 고비를 넘기면 제조사들이 써줄 의향이 있다는 걸 충분히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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