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도 부족하고 투자도 많이 필요하다는 부정적 인식에도.. 편견 깬 퓨리오사AI
회사 미래 비전과 결과물로 인적 자원 확보... '해도 안된다'가 아닌 '해야 한다'로

인공지능(AI)은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없어서는 안될 기술이다. 

AI를 구현하는 건 결국 반도체다. AI 반도체 없이 AI 산업을 육성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정부가 1조원 규모의 연구개발(R&D) 프로젝트에 시동을 건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반도체 중에서도 특히 설계는 쉽지 않다. 인력도 부족하고 빠른 시일 내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특성상 투자를 유치하기도 어렵다.

이같은 문제를 모두 극복한 스타트업이 있다. 퓨리오사AI(대표 백준호)다. 제대로 된 샘플조차 없는 여타 업체와 달리 이 회사는 이미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버전으로도 글로벌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벤치마크 성적을 냈다. 내년 첫 제품 출시를 앞두고 한창 바쁜 백준호 퓨리오사AI 대표를 만났다.

 

혜성처럼 등장한 퓨리오사AI

백준호 퓨리오사AI 대표가 신사동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퓨리오사AI

퓨리오사AI는 AMD·삼성전자 등을 거친 백준호 대표가 지난 2017년 설립했다. 설립 4개월 후 네이버 기술 스타트업 육성 프로젝트 ‘D2 스타트업 팩토리’에 선정돼 팹리스 업계의 떠오르는 별이 됐다. 팹리스 업체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지 않은 상황에서 창업한 지 불과 넉달밖에 되지 않은 업체가 올린 성과였기 때문이다.

이 회사가 개발하는 건 추론용 AI 반도체다. AI는 알고리즘을 만드는 학습(Training)과 완성된 알고리즘으로 결과값을 도출하는 추론(Inferencing)의 두 단계를 거쳐 동작한다. 현재는 AI 학습용 반도체 시장이 크지만, 시장 잠재력은 추론용 AI 반도체가 높다. 학습은 데이터센터에서만 주로 수행하는 반면 추론은 모든 IT기기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천하인 학습용 AI 반도체 시장과 달리, 추론은 아직 이렇다할 강자가 없는 블루오션 시장이다. 그래프코어·캠브리온·세레브라즈시스템 등 다수의 스타트업들이 엔비디아·인텔·자일링스 등 거대 반도체 업체들보다 더 주목받을 정도다.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시장인만큼 거품도 많다. AI 추론용 반도체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은 실리콘밸리에만 백여곳이 넘는다. 이들 중 실제 제품을 출시하거나 레퍼런스(Reference)로 삼을 만한 벤치마크 결과를 낸 업체들은 손에 꼽힌다.

백준호 대표는 “AI 반도체를 개발한다는 스타트업들은 물론 웬만한 대기업들도 벤치마크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며 “각 업체가 업계 공통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의 기준으로 성능을 측정하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MLPerf는 구글·바이두 등 AI를 활용하는 수요 기업과 대학들이 주최하는 벤치마크 테스트다./MLPerf

실제 지난해 AI 반도체 벤치마크 테스트인 ‘MLPerf’에는 전 세계에서 26개 업체밖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 중 결과를 낸 업체는 13곳 뿐이다. MLPerf는 구글·바이두 등 AI를 활용하는 수요 기업과 대학들이 주최하는 벤치마크 테스트로, 각 과제를 수행할 때 일정 수준 이상의 정확도를 유지해야하는 등 참여 조건이 까다롭다.

이 13곳 중 한국 AI 업체는 퓨리오사AI 뿐이다. 퓨리오사AI는 지난해 MLPerf 테스트에서 퀄컴·엔비디아 등 글로벌 업체들과 겨뤄 좋은 성과를 냈다. 심지어 시제품이라고 할 수 있는 FPGA 버전으로 낸 성과다. 

회사는 최근 AI 알고리즘과 하드웨어의 성능을 끌어올리면서 추가 투자 라운드를 진행하고 있다. 2~3달 안에 최종 설계를 특정하고 설계 후반부(Back-end) 작업을 진행하고 늦어도 연말 샘플 생산에 들어간다. 투자 금액은 샘플 및 양산과 인적 역량 강화에 쓸 계획이다.

백 대표는 “샘플이 나오면 다시 벤치마크 테스트에 도전할 것”이라며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인적 자원의 중요성 

퓨리오사AI가 이같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건 인적 자원 덕이다. 백 대표만 해도 AMD에서 그래픽처리장치(GPU) 코어 설계를 했던 경험이 있다. 현재 30명이 근무 중인 이 회사에는 김한준 최고기술책임자(CTO)를 포함해 AMD·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업체에서 역량을 쌓아온 전문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경력직은 물론 20~30대 직원들조차 ‘내가 저 나이때는 뭐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나다”며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훌륭한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팹리스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혀온 인력 부재도 퓨리오사AI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비전만 있고 실체가 흐릿한 업체들과 달리 뚜렷한 결과물이 있기 때문이다.

 

‘MLPerf’ 벤치마크 테스트 결과는 이 회사가 얼마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도구가 됐다. 벤치마크 테스트 이후 실리콘밸리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에 맞춰 회사는 지난 2월 실리콘밸리에 지사를 세우고 현지 인력 3명을 채용했다. 영업이 아닌 R&D 인력이다. 

백 대표는 “회사를 판교·광교 등 IT 기업이 주로 둥지를 트는 지역이 아닌 신사역 인근 고층 빌딩으로 옮긴 것도 직원들의 창의력을 돋우기 위해서”라며 “바로 옆에 가로수길이 있고 전망도 좋아 꽉 막힌 사무실이 아닌 열린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AI는 소프트웨어(SW)인 알고리즘과 하드웨어(HW)인 반도체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HW과 SW가 서로 최적화돼야하기 때문에 SW 개발 역량과 HW 개발 역량을 모두 확보해야 원하는 성능을 낼 수 있다.

퓨리오사AI는 상대적으로 SW 인력이 많다. HW도 중요하지만 이를 100% 활용해 컴퓨팅 성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기적인 SW가 핵심이라는 판단에서다. 특히 AI 알고리즘은 다양한 학습 환경에서 여러 프로그래밍 언어로 개발되고 있어 이를 모두 지원하지 않으면 범용화가 어렵다.

그는 “투자를 받고 나면 회사 규모를 50~100명 선으로 키울 것”이라며 “회사의 비전과 신뢰할 수 있는 결과물을 보여주면 뛰어난 인재들을 얼마든지 유치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로 패러다임 전환해야

실리콘밸리에서는 수백개의 AI 반도체 업체가 등장하고 매년 수 조원 규모의 투자가 이뤄진다.  실리콘밸리처럼 한국도 AI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정작 AI 반도체 설계에 도전하는 업체는 찾기 어렵다. 굳이 AI 반도체를 자체 개발할 게 아니라 해외 업체가 잘 만든 제품을 사다 써도 될 뿐더러, 심지어는 ‘해도 안될 것’이라는 인식까지 깔려있기 때문이다.

한 팹리스 업체 대표는 “대부분의 팹리스들이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인데 수년 간 적어도 수천억원을 투자해야하는 AI 반도체를 선뜻 하겠느냐”며 “이번에 나온 정부 AI 반도체 개발 R&D 과제도 국산 CPU 코어 과제처럼 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업계가 이처럼 생각하는 건 이유가 있다. 여느 부품 업체들처럼 국내 팹리스 업계는 국내 대기업에 의존해 성장해왔다. 그 과정에서 대기업의 내재화로 설자리를 잃고 심지어는 문을 닫는 기업들이 생겨났다. 10년 전도, 지금도 이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다른 사업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AI 반도체처럼 이슈가 됐던 굵직한 R&D 사업들도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국산 중앙처리장치(CPU) 코어 상용화 사업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은 Arm의 코어텍스와 인텔의 x86을 대체할 국산 코어를 개발, 상용화하는 목적으로 추진됐다. 결과물로 4개의 국산 코어가 만들어졌지만 상용화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지난 2017년 사업이 종료됐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관련 코어들이 나온 상황에서 국산 코어는 사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었다”며 “AI 반도체 R&D 사업도 수요 기업은 특정돼있지만 실제로 상용화까지 갈 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백 대표는 AI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문제가 아니라고 여긴다. 주변의 회의적인 시각에도 자신감을 유지하는 건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AI는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생활패턴은 물론 국방·복지 등 국가 시스템처럼 현재의 사회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AI 반도체는 이를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 기술이다. 개발에 수 조원의 비용이 들어간다지만 돌아올 이익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현대차가 강남 신사옥을 위해 구입한 땅값이 10조원이 넘는다. 

백 대표는 “업계에 너무 많은 실패의 사례가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AI 반도체는 단순히 하나의 ‘기반 기술’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며 “모두가 절실하게, 필사적으로 꼭 확보해야만 하는 것으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KIPOST(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