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완성차 벗어나 '자율주행' 하면 떠오르는 업체로
전자·배선 아키텍처 등 기술 벤치마킹부터 시작

BMW⋅폴크스바겐 등 내연기관 자동차 회사를 벤치마킹 해온 현대자동차가 미국 테슬라를 롤모델로 선정했다.

불과 3~4년 전까지 경쟁사로 인정하지도 않았던 테슬라가 이제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당장 현대차는 테슬라의 차량 내부 아키텍처부터 연구개발하기 시작했다.

전통 자동차 산업에 남기를 고집해온 현대자동차가 ‘포스트 테슬라’를 외치는 건 의미심장하다.

 

현대차의 새로운 롤모델, 테슬라

테슬라의 모델S 2019년형./테슬라 공식 홈페이지

테슬라의 첫 차량이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테슬라를 ‘곧 망할 기업’이라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현대차의 태도가 180º 바뀌었다.

현대차는 최근 일본 닛케이BP의 ‘테슬라 모델S 분석 보고서’를 자체 번역해 주요 연구개발(R&D) 인력들에게 배포했다. 해당 보고서는 지난 1월 작성됐다.

특히 전장 R&D 관련 부서는 테슬라의 2019년형 ‘모델S’ 내 차량 아키텍처를 꼼꼼히 분석하고 이를 자체 차량에 도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해당 부서들은 지난주부터 협력사들과의 미팅을 시작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실적 후퇴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건 윗선의 요구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의선 부회장이 ‘이럴 때일수록 혁신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주문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3~4년 전만 해도 테슬라를 따라야 한다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던 경영진이 이제는 ‘포스트 테슬라’를 외치고 있다”고 말했다.

 

BMW M8 쿠페./BMW 블로그
BMW M8 쿠페./BMW 블로그

이전까지 현대차의 롤모델은 BMW와 폴크스바겐 등 파워트레인 기술을 가진 전통 자동차 업체들이었다. 한때는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 업체들을 롤모델로 삼았지만 지난 2009~2010년 도요타 리콜 사태 이후 본보기상을 바꿨다.

사실 내부에서는 지난 2012년 테슬라가 첫 전기차 모델S로 자동차 업계에 파란을 일으키면서 테슬라를 눈여겨 봐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현대차로서는 전기차를 고집하는 테슬라를 따르기엔 부담이 컸다. 공급망(SCM)을 완전히 교체해야함은 물론, 기술 핵심을 파워트레인 등 엔지니어링 기술에서 IT 기술로 바꿔야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링 기술 역량으로 살아온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는 순식간에 주도권을 놓칠 수 있었다.

이같은 이유로 당시 테슬라는 완성차 업체들 사이에서 ‘자동차 업체’가 아닌 ‘IT 업체’로 불렸다. 현대차도 그들 중 하나였다.

현대차 출신 업계 관계자는 “정의선 부회장 체제로 굳어진 후부터 전통 내연기관 자동차보다 전기차와 수소차에 힘이 실렸다”며 “최근에는 수소차보다 전기차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이유 - 차량 전자·배선 아키텍처

현대차가 테슬라를 롤모델로 선정한 첫 번째 이유는 테슬라의 전자·배선 아키텍처 기술력이다. 테슬라를 롤모델로 삼아야한다는 주장의 근거도 전자·배선 아키텍처 기술력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전자 기술의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고 큰 차이도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2019년형 모델S와 모델3는 전작과 크게 달랐다. 현대차가 가장 주의깊게 본 건 중량이다. 지난해 출시된 100kWh 모델S 스탠다드레인지A/T 모델의 공차 중량은 2027㎏으로 이전 세대 모델(2018년형 모델S 75D)보다 무려 192㎏이나 가벼웠다. 지난해 국내 출시된 모델3의 무게는 스탠다드 레인지 모델 기준 1625㎏밖에 되지 않는다.

 

차량 내부는 수많은 전자 부품과 이들을 연결하는 와이어링 하네스가 복잡하게 얽혀있다./GM
차량 내부는 수많은 전자 부품과 이들을 연결하는 와이어링 하네스가 복잡하게 얽혀있다./GM

무게를 줄인 비결은 전자 아키텍처다. 전자 아키텍처를 최적화하면 부품 수가 줄어들고, 부품 수가 줄어들면 이들을 연결하는 와이어링 하네스의 길이도 크게 감소한다. 현재 일반 상용차 1대에는 2~4㎞ 길이의 와이어링 하네스가 들어가는데, 그 무게만 수십㎏이다.

테슬라 모델S에는 약 3㎞ 길이의 와이어링 하네스가 들어있지만, 모델3에는 불과 절반 길이의 와이어링 하네스만 장착됐다. 전자 아키텍처의 최적화 없이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테슬라는 지난해 7월 모델Y 및 테슬라 픽업트럭 등 차세대 차량에 적용할 새로운 배선 아키텍처를 공개했다. 모델Y부터 적용되는 이 배선 아키텍처를 도입, 회사는 차량 내 와이어링 하네스의 길이를 100m까지 줄일 계획이다.

 

테슬라가 지난 2018년 12월 출원한 ‘고속 배선 시스템 설계(HIGH-SPEED-WIRING-SYSTEM ARCHITECTURE)’ 특허 중./USPTO

테슬라가 지난 2018년 12월 출원한 ‘고속 배선 시스템 설계(HIGH-SPEED-WIRING-SYSTEM ARCHITECTURE)’ 특허에 따르면 테슬라의 차세대 배선 아키텍처는 철저히 모듈식이다.

 

예를 들어서 현재는 차량 문(Door)에 잠금 구성 요소, 조명 구성 요소, 오디오 구성 요소 등 여러 장치가 별도로 들어가 제각각 전자제어장치(ECU)가 제어하는 분산형 아키텍처다. 각 구성 요소와 ECU, 그리고 중앙 아키텍처는 서로 다른 와이어링 하네스로 연결되는데, 그마저도 사람 손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테슬라의 배선 아키텍처는 각 구성요소를 모두 제어하는 하나의 컨트롤러(또는 허브)를 주요 장치마다 주는 모듈식 아키텍처다. 하나의 모듈을 중앙 아키텍처에 연결하면 조립 시간도 줄어들고, 필요한 와이어링 하네스의 양 또한 감소하게 된다. 생산 자동화도 쉬워진다.

비단 생산과 무게 뿐 아니라 전자 기능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다. 현재는 차량에 실린 각 센서가 해당 센서 데이터가 필요한 모든 모듈에 배선으로 연결된다. 모든 센서를 묶어 일종의 센서 허브에서 처리하게 되면 각 모듈이 데이터를 처리할 필요도 없고, 애초에 센서 허브에서 융합된 데이터를 내보내기 때문에 정확도도 올라간다.

물론 한계도 있다. 테슬라는 전자·배선 아키텍처를 최적화하기 위해 자체 소프트웨어(SW)와 하드웨어(HW)를 개발했다. 테슬라가 옵션으로 제공하는 ‘FSD(Full Self Driving)’ 기능은 이 회사가 자체 개발한 시스템온칩(SoC) ‘FSD(Full Self Driving)’로 구현된다. 하지만 현대차는 자체 SW 및 부품 HW 개발 역량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업계 관계자는 “차량 무게는 연비와 속도에 영향을 주는 핵심 요소”라며 “테슬라의 차량은 차량 부품비용(BoM)을 아끼면서 성능을 향상시키는 좋은 예”라고 말했다.

 

두 번째 이유 - ‘자율주행’하면 ‘현대차’로

‘자율주행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완성차 업체는 테슬라다. 아무리 수차례 사고가 있었다한들 현재까지 상용화된 차량 중 가장 고도화된 자율주행 기술을 장착한 건 테슬라 차량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현대차가 꿈꾸는 것도 이것이다. 기술력부터 시작해 마케팅까지 ‘자율주행 업체’로 발돋움하겠다는 것이다.

한때 현대차는 테슬라가 ‘자율주행’이라 불렀던 기능들도 첨단운전자지원시스템(ADAS) 기능이라고 못박으면서 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었다.

실제 지난 2015년 10월 테슬라가 미국 자동차공학회(SAE) 기준 레벨2인 고속도로 주행 보조(HDA) 등이 담긴 ‘오토파일럿(Autopilot)’ 기능을 선보인 지 2달 뒤 현대차도 ‘제네시스 EQ900’으로 HDA를 상용화했지만, 자율주행이 아닌 ‘보조’에 초점을 둬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업계 관계자는 “안전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완성차 업체 시각에서 보면 테슬라가 ADAS 기능을 ‘자율주행’이라는 뜻이 담긴 ‘오토파일럿’에 담은 게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무리 사고가 있었더라도 테슬라는 자율주행 시장을 선도하는 이미지를 가졌고, 현대차 입장에서는 영영 주도권을 놓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현대차의 EV 콘셉트카 ‘프로페시(Prophecy)’의 티저 이미지./현대차

하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지난해 12월 이 회사는 자율주행 기술 개발 로드맵을 상세히 밝혔다. 현대차가 중장기 사업계획과 재무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이례적이다.

현대차는 내년 고속도로 자율주행이 가능한 레벨3 차량을 출시하고, 2025년까지 레벨 2·3 및 주차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기술을 전 차종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레벨4 수준의 도심형 자율주행 시스템 상용화는 내년이다. 2022년에는 완전자율주행 플랫폼을 개발하고, 2024년 양산을 추진한다는 목표다.

앞서 테슬라도 엘론 머스크 최고 경영자(CEO)가 직접 투자자 회의에서 올해(2020년) 하반기 완전 자율주행 차량에 대한 규제 승인을 얻어내고 로보택시 서비스를 출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 상용화에 대해서는 현대차가 보다 보수적인 입장이지만, 일단은 ‘자율주행’ 타이틀을 가져오는 게 먼저”라며 “아직은 기술력이 뒤떨어지지만 앱티브, 코드42 등 다른 업체들과의 협력으로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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