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도 한 때는 나약하고 찌질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몽골비사에서는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부터 핏덩이를 손에 쥐고 태어나서 위대한 정복자가 될 운명이었다고 하지만, 잘나가는 칭기즈칸 후손들이 조상을 미화하려고 만들어 놓은 신화에 불과하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영웅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그는 개를 무서워했고 잘 울었다. 부족들이 이사를 갈 때 그를 깜빡 잊고 놔두고 간 일화가 있을 정도이니 주목받는 자식도 아니었다.

그가 8 내지 9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하자 여자와 애들만 남은 칭기즈칸 집안은 같은 부족에서도 버림받고 쫓겨난다. 부족에게 버림받은 2명의 여자와 7명의 아이들은 부르칸 칼둔 산속에 들어가 기아선상에서 짐승처럼 살아간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을 기록했던 페르시아 연대기의 저자 주베이니는 이 가족을 ‘개와 쥐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음식 역시 그런 짐승과 다른 죽은 짐승의 고기’라고 기록했다. 칭기즈칸 가족은 야생 마늘과 양파, 작은 화살로 잡은 새, 조그만 낚시로 잡은 물고기 등을 먹으며 연명했다. 이 무렵 그의 형제 중 한 명은 굶어 죽었다. 칭기즈칸도 굶어 죽을 뻔했을 것이다. 다른 남동생은 그보다 힘도 셌고 활도 잘 쏘았고 씨름도 잘했다. 배다른 형 벡테르가 그를 부려먹고 괴롭히며 음식을 독차지하자 동생과 같이 화살로 쏴 죽였다. 배다른 형을 죽인 칭기즈칸은 부족들에게 범죄자로 붙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해 산속으로 도망가 살아기도 했다. 그가 싸움을 잘하고 활을 잘 쐈다는 기록은 없다. 게다가 평생 일자무식이었다. 칭기즈칸은 중국이나 페르시아의 학자들 앞에서 자신은 글도 못 읽는 무식쟁이라고 솔직히 말하고 조언을 구했다. 실수했을 때는 아랫사람에게도 즉시 미안하다고 했다.

당시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저명한 사학자 잭 웨더포드에 따르면 ‘쇠로 된 등자 하나만 있어도’ 가장 높은 지배자 행세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등자란 말에 오른 사람의 발을 받쳐주는 받침대를 뜻한다. 테무진은 자신의 의형제인 ‘자무카’에게 아주아주 귀한 선물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귀한 선물이란 게 겨우 양의 복사뼈에 조그만 놋쇠 조각을 박은 것이다.

그 당시 고려에서는 시장통마다 놋쇠그릇이 굴러다녔음을 생각해보면 이게 선물할 만한 물건으로 통용된 초원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중국 북부에서 매매되거나 약탈된 놋쇠물건 하나가 칭기즈칸이 사는 몽골고원 북동쪽 외진 동네로 흘러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원래의 형체를 잃고 해체되고 조각났을 것이다. 그 찌그러진 쇳조각 하나를 박아 넣어서 귀해진 복사뼈였을 것이다. (참고로, 몽골의 아이들은 짐승의 복사뼈를 주사위나 공깃돌로 쓴다. )

멀리서 바라본 칭기즈칸 마동상, 높이 40m, 2010년 250톤의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졌다. 인구 300만의 넉넉하지 않은 몽골에서 이 정도 동상을 만들려면 국가적인 사업이었을 것이다.
▲멀리서 바라본 칭기즈칸 마동상, 높이 40m, 2010년 250톤의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졌다. 인구 300만의 넉넉하지 않은 몽골에서 이 정도 동상을 만들려면 국가적인 사업이었을 것이다.

1203년 41세때 타타르를 정복하고 금나라에서 100명의 대장인 백부장 직위를 받자 그는 기뻐서 열광한다. 그는 또 툭하면 울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간 카리스마의 화신도 아니었다.

칭기즈칸이 호라즘 제국을 침공하기 바로 전에 중국의 한 도교 승려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다. 칭기즈칸의 목소리는 소박하고, 명료하며, 상식적이다. 그는 자신의 적들이 망한 것을 자신의 우월한 힘이 아니라 적들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나 자신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없소.“ 그는 ‘영원한 푸른 하늘’이 ‘오만과 지나친 사치’ 때문에 주변의 문명을 벌했다고 말했다.

칭기즈칸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얻었지만 계속 소박하게 살았다. “나는 소 치는 목동이나 말을 모는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소. 우리는 똑같이 희생을 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그는 자신의 이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나는 사치를 싫어하오.” 또 “나는 절제를 하고 있소.” 그는 백성을 자식처럼 대접하려고 노력했으며, 재능있는 사람들을 출신에 관계없이 형제처럼 대했다. 그는 자신과 관리들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고 또 존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결합되어 있소.”

 

‘결핍’이 원동력이 되다

800년 전 몽골고원 동북쪽 산림과 초원이 맞닿은 곳에서 지구상 가장 극빈층으로 살던 칭기즈칸이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게 되었을까? 20년 이상 기업경영을 해 온 필자는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칭기즈칸이 어떻게 스스로 오랜 기간 동기부여를 했을까?’를 오랫동안 연구했다. 그도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의 성장동력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결핍’이라고 말하고 싶다. 칭기즈칸은 성장기의 혹독한 결핍을 자기발전과 조직원리, 세계전략으로 승화시켜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것이다.

칭기즈칸의 성장사를 보면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이 고난을 겪으면서 강철같이 강인한 세계사적 영웅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감동이 느껴진다. 어린시절, 청년시절 가혹한 생존환경에서 그는 그냥 순응하지 않고 결핍을 극복할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서로 살인을 하고, 납치를 하고, 노예로 삼았던 몽골초원의 혹독한 환경에서 칭기즈칸은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못했지만 욕망, 야망, 잔혹 등 극한적인 인간 감정을 경험하였다. 그는 이렇게 살벌한 환경에서 강렬한 생존본능을 보여줬으며 절대절명의 위기를 자기 도약의 기회로 바꾸었다. 굶주림, 갖은 수모, 납치, 노예생활이라는 처절한 환경에서 그는 권력을 향한 긴 계단을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개인적인 목표, 욕망, 공포는 유라시아 대륙을 삼켜 버렸다. 칭기즈칸은 처음부터 세계정복의 야망을 가진 정복자가 아니었다. 칭기즈칸은 작은 씨족의 지도자로 평생을 지내고 싶었겠지만 몽골초원의 혼탁한 정세는 그런 여유 있는 목가적 삶을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12~13세기, 물도 나무도 없는 황량한 몽골 땅을 떠도는 유목민에 불과했던 칭기즈칸은 세상이 허용하는 모든 악조건과 고난을 극복하고, 오랜 전란과 분열에 시달리던 몽골초원을 통일했다. 그 바탕에는 죽을 때까지 문맹이었고 유목과 약탈, 전쟁이 삶의 전부였던 그가 이룩한 혁신적 조직모델이 자리하였다. 자기 부족과 친척에게도 외면당하고, 쥐를 잡아먹으면서 가족들을 부양한 이 남자는 자기 식구, 부족을 잘 먹고 잘 살게하려고 목수, 대장장이, 양치기, 노비를 데리고 정복전쟁에 나선다. 그는 해마다 자기보다 센 적들을 물리쳐 결국 몽골초원의 모든 부족을 정복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정복자들이 전쟁터에서 물러나는 오십의 나이에 수백년 동안 유목민족을 괴롭히고 노예로 부려온 문명의 군대와 다시 맞선다. 고비사막과 황하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고,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의 땅을 통과하고, 아프가니스탄 산맥을 넘어 인더스 강까지 이르면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새로운 조직과 질서로 몽골이라는 민족공동체를 창조해낸 칭기즈칸이 정복한 영역은 동쪽으로는 아시아의 끝인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유럽의 폴란드, 헝가리까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면적으로 따지면 777만 km²에 달했다. 이것은 알렉산더와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다. 당시 칭기즈칸이 이끈 몽골인들은 1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에서 유교와 이슬람, 기독교 등 다양한 문명권에 속하는 인구 2억명을 지배했다.

 

칭기즈칸의 정복활동과 한국의 후계자 교육

사람과 과학기술을 다루는 칭기즈칸의 탁월한 능력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40년간 이상 계속된 전쟁 경험을 통해 현장에서 배운 것이다. 자신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철저하고 치밀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전쟁을 수행하는 천재적 능력, 부하들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리더십, 세계적인 규모의 조직을 꾸려 나가는 시스템과 리더십 등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또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공식 교육에서 얻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도 도교의 도사 등 석학들을 일부러 초대해 대화를 하며 배우기도 했지만 그의 공부는 40여년 이상 동안 철저히 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면서 배운 것이다. 그것은 열린 마음으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문제해결 의지와 실용적 학습, 꾸준한 피드백과 수정, 냉철한 반성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그의 험난한 삶에서 단련된 강인한 정신과 집중력을 잃지 않는 의지가 있었다.

몽골제국의 정복활동. /위키피디아
▲몽골제국의 정복활동. /위키피디아

한국 재벌 2, 3세들의 양성과정을 보면 정해진 패턴이 있다. 미국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 글로벌 컨설팅 회사, 투자회사 등 이름있는 회사에서 일하다 아버지 회사의 기획실장이 되면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다가 회장님이 되는 과정이다. 이들 재벌의 후계자들이 현장에서 피 터지게 영업을 하거나 생산, 연구개발(R&D)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별로 없다. 송월타월 회장은 자식에게 베트남 오지의 공장에서 3년간 생산부장을 맡겼다는데 이런 현장경험이 하버드 MBA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교육일 것이다.

1203년 칭기즈칸의 몽골족이 타타르라는 큰 부족을 물리치고 그는 자신의 무리를 부족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모전벽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모전벽의 사람들”이라는 호칭은 그가 타타르 부족과의 통합을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지만 41세의 칭기즈칸이 초원의 모든 부족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작은 부족의 부족장 칭기즈칸이 아니라 몽골초원 전체의 주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같은 해 1203년의 발주나 맹약은 칭기즈칸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한다. 양아버지 옹칸의 배반으로 전쟁에서 패하고 굶주리며 도망한 끝에 도착한 곳이 진흙탕의 발주나 호수라고 한다. 그때 남은 병사는 겨우 19명이었고, 그들 앞에서 칭기즈칸은 이렇게 연설했다고 한다. “나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업을 이룩하도록 도와 주소서.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이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소서. 만일 내가 이 말을 어기면 이 흙탕물처럼 되게 하소서.” 그들은 ‘신의와 충성’을 맹세한다. 마지막까지 남은 19명은 무슬림, 불교도, 기독교인으로 종교도 서로 달랐고, 몽골족은 친동생 카사르 뿐이었다. 종교와 부족도 다르지만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된 것이다. 텡그리를 믿는 샤먼(무속)신앙과 불교, 기독교(네스토리우스), 이슬람교를 제각기 믿었으며, 언어조차 몽골어, 타타르어, 투르크어, 위그르어, 아랍어 등 다양했다. 한마디로 이들 핵심집단은 당시 기준으로 가장 세계화된 집단이었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창업 초기부터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를 포용하고 세계적 통합을 가능케 하는 잠재력이 있었다. 19명의 발주나 맹약으로 탄생한 결사체는 친족 관계, 인종, 종교를 초월한 개인적 선택과 헌신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 결사체에 가까웠다. 이 결사체는 칭기즈칸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였으며, 이 결사체가 결국 몽골제국의 유라시아 정복의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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