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길어도 2년 내 독립" 선언... 2일 라이선스 재계약 체결
'파워VR' 라이선스 가능성은 낮다... 이매지네이션의 남은 무기는?

애플이 지난해 출시한 아이폰 시리즈에 담긴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A13 바이오닉'은 특히 뛰어난 GPU 성능으로 주목 받았다./애플
애플이 지난해 출시한 아이폰 시리즈에 담긴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A13 바이오닉'은 특히 뛰어난 GPU 성능으로 주목 받았다./애플

아이폰에서 다시 ‘파워VR(PowerVR)’을 볼 수 있을까.

애플이 다시 이매지네이션의 손을 잡았다. 이매지네이션으로부터 독립,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독자 설계하겠다고 나선 지 3년만이다. 

지난 2일(현지 시각) 이매지네이션은 애플과 새로운 다년간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계약으로 애플은 이매지네이션의 광범위한 지적재산(IP)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미 독립은 끝났다

지난해 애플의 ‘A13 바이오닉(bionic)’ 내 GPU는 애플의 두 번째 자체 GPU로, 애플이 밝힌 것을 능가하는 벤치마크 성능을 기록하면서 ‘가장 뛰어난 모바일 GPU’라는 찬사를 들었다.

애플이 공식적으로 밝힌 A13 GPU 성능은 전작 대비 20% 향상이다. 하지만 애플의 ‘메탈(Metal) 애플리케이션프로그래밍인터페이스(API)’를 활용할 경우 단순 컴퓨팅 성능은(Geekbench 기준) 40%, 3차원(3D) 그래픽 성능(3DMark Fire Strike)은 50~60%까지 올라갔다.

 

이매지네이션의 GPU IP는 지난 2008년 출시된 아이폰3G(사진)부터 들어가기 시작했다./애플
이매지네이션의 GPU IP는 지난 2008년 출시된 아이폰3G(사진)부터 들어가기 시작했다./애플

낙동강 오리알이 돼 중국 자본으로 넘어간 이매지네이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두 회사의 협력은 지난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매지네이션은 이때부터 애플의 모바일 기기에 들어가는 그래픽처리장치(GPU) 기술 ‘파워VR’을 IP로 제공해왔다. 퀄컴이 Arm의 IP를 가지고 스냅드래곤 플랫폼을 만들듯, 애플은 이매지네이션의 IP를 맞춤화(Customizing)해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에 담았다.

양사의 관계에 금이 간 건 지난 2015년 말부터다. 애플은 이매지네이션에 더 이상 신규 IP를 구매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고, 지난 2017년 2월 이매지네이션은 애플과의 계약 종료 계획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당시 애플은 빠르면 15개월, 길면 2년 내 이매지네이션의 IP를 아예 사용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GPU를 자체 개발하는 건 CPU보다 훨씬 까다롭다. Arm의 코어텍스 시리즈처럼 완벽하게 정형화된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플의 입장에서 매년 8000만달러의 라이선스·로열티 비용을 지불하는 것보다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갈수록 그래픽 처리 성능이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이매지네이션에 기댈 수도 없었다. 

이매지네이션의 IP를 커스터마이징해오면서 쌓은 실력도 있었고, 이매지네이션 출신 엔지니어를 대거 영입하면서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업계는 관측했다.

매출의 절반을 애플에 기대고 있던 이매지네이션의 주가는 애플의 발표 직후 60% 이상 급락했다. 이매지네이션은 적자 사업부인 밉스(MIPS) 기반 코어 IP 사업을 파는 등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 해 말 중국계 사모펀드 캐넌브리지파트너스에 헐값으로 매각됐다.

 

이매지네이션의 경고 때문?

그랬던 애플이 다시 이매지네이션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은 특허다. 계약 종료 후 이매지네이션 측은 “애플이 이매지네이션에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GPU를 설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독립할 수 있다는)애플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이야 모바일 GPU 시장 강자라고 하면 퀄컴과 Arm이 꼽히지만, 10년 전만 해도 이매지네이션은 모바일 GPU 시장 1위로 전체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그래픽 카드에서 임베디드 GPU로 빠르게 사업 방향을 전환하면서 20여년 전부터 수백개의 IP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칩을 직접 설계·제조하지 않고 순수 IP 업체로 가닥을 잡으면서 칩 업체보다 탄탄한 IP 포트폴리오를 갖출 수 있었다. 애플은 물론 퀄컴·인텔·ST마이크로·삼성 등 유수의 기업이 이매지네이션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칩을 설계했다.

국내 시스템온칩(SoC) 설계 업체 관계자는 “이매지네이션이나 Arm의 특허를 모두 피해서 GPU를 개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며 “10년 가까이 이매지네이션을 써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 특허에서 벗어나는 게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5년 추가 협력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애플이 이후 이매지네이션 본사 근처에 사무실을 세우고 GPU 개발 인력을 영입했던 것도 특허 침해의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이들 인력은 무엇보다 이매지네이션의 특허 기술에 친숙하다. 

이매지네이션은 지난해 “애플이 최신 세대에 쓰인 기술에 대한 로열티 지급을 거부할 경우, 칩 설계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물질적 불확실성’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특허를 걸고 넘어질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시사한 셈이다.

 

‘PowerVR’이 다시 아이폰 속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그럼에도 내년 출시되는 아이폰 시리즈의 두뇌 ‘A14’(가칭)에는 애플이 자체 설계한 GPU가 들어갈 공산이 크다. 

먼저 양사의 이번 계약은 지난 2014년 맺었던 다년간 다용도(Multi-year, Multi-use) 라이선스 계약을 대체한다. ‘다용도 라이선스’라는 용어는 IP 업체가 제공하는 수 개의 IP를 동시에 라이선스할 때 쓴다. 이를 통해 애플은 여러 파워VR 그래픽 및 비디오 코어 IP에 접근할 수 있었다.

올해 맺은 계약에서는 ‘다용도’라는 말이 빠졌다. 공식적으로 제외됐는지에 대해서 회사는 밝힐 수 없다고 했으나, 만약 사실이라면 수 개의 IP가 아닌, 단일 IP를 라이선스한다는 얘기다. 

해당 IP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워VR’일 가능성은 낮다. 이미 ‘파워VR’ 없이도 GPU 기술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다. 파워VR과 함께 라이선스했던 IP 중 하나를 라이선스했거나, 이매지네이션의 차세대 GPU IP인 ‘A-시리즈’의 실시간 레이 트레이싱 관련 특허를 쓸 계획을 세웠거나다. 

유력한 건 후자다. 레이 트레이싱(Ray Tracing)은 이미지에서 광원을 추적, 이미지 내 객체에 광원의 이동에 따른 효과를 입혀주는 기술이다. 실시간으로 하기엔 컴퓨팅 자원이 따라주지 않아 이전까지는 동영상의 각 프레임마다 사람 손으로 효과를 줬다.

 

실시간 레이 트레이싱 기술을 들고 나온 건 엔비디아다. 엔비디아는 지난 2018년 RTX GPU 제품군부터 실시간 레이 트레이싱 기능을 지원하고 있다. 비록 PC용이지만, 고성능 그래픽 게임의 경우 차이가 확연하다. 예를 들어 자동차 본네트에 반사되는 적의 실루엣을 실시간으로 보고 사격하는 일 등이 가능해진다.

모바일 GPU 업계도 들썩이고 있다. 퀄컴은 지난 2018년부터 실시간 레이 트레이싱 기술을 개발할 엔지니어를 모으고 있고, 애플 역시 비슷한 시기 인력 확보를 시작했다. 애플은 지난해 열린 ‘애플 세계 개발자회의(WWDC) 2019’에서 메탈 API 기반 레이 트레이싱 기술을 공개했지만 현재의 GPU 자원으로는 제대로 된 성능이 나오지 않는다.

이매지네이션은 지난 2010년 카우스틱(Caustic)을 인수하면서 실시간 레이 트레이싱을 위한 하드웨어 가속 IP 등을 확보했다. 이 IP를 기반으로 한 아키텍처가 채택된 게 ‘A-시리즈’다. 이매지네이션은 앞서 블로그를 통해 ‘A 시리즈’ 기반의 SoC는 빠르면 내년 말께 출시될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이매지네이션은 자사 GPU IP A시리즈가 모바일 기기도 데스크톱PC만큼의 성능을 낼 수 있게 도와준다고 자신한다./이매지네이션 홈페이지
이매지네이션은 자사 GPU IP A시리즈가 모바일 기기도 데스크톱PC만큼의 성능을 낼 수 있게 도와준다고 자신한다./이매지네이션 홈페이지

기존 파워VR을 구성하는 일부 IP를 라이선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플은 파워VR을 활용하면서 쓰던 PVRTC(PowerVR texture compression) 등의 기능(IP)을 여전히 쓰고 있고 개발자들에게 권장까지 한다.

여기에 레이 트레이싱 IP는 GPU 자원을 쓴다. 때문에 레이 트레이싱 IP를 이매지네이션에 라이선스할 경우 GPU까지 다시 이매지네이션에 묶일 수 있다는 것이다.

IP 업계 관계자는 “GPU를 구성하는 IP의 일부를 자체 개발해 성능을 향상시킬 수는 있었겠으나, 100%를 개발하기는 여러모로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며 “‘다용도’라는 말이 배제됐지만, ‘광범위한 접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들어간 걸로 봐선 파워VR 관련 IP를 라이선스하되 추가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관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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