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 만들기 나선 삼성 파운드리 사업부, 올해 제대로 판 짰다
디자인하우스 업계 합종연횡으로 '규모의 경제'... 알파홀딩스 등

올해만큼 국내 비메모리 반도체 업계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던 해가 있었을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4월 비메모리 반도체 1위를 달성하겠다며 직접 ‘반도체 비전 2030’을 선포했고, 뒤이어 정부가 1조원 규모의 ‘시스템반도체 비전과 전략’ 대책을 발표했다.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또한 비메모리 반도체 설계 분야 석학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말처럼 업계도 발맞춰 바뀌었다. ‘생태계’라고 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올해에서야 자리를 잡았다. 파운드리가 이끌었고,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이 따라왔다.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핵심, 생태계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과 메모리 산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분업 여부다.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구조./알파홀딩스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구조./알파홀딩스

메모리 업계에서는 단일 기업이 설계부터 제조까지 모두 관장하는 반면, 비메모리 반도체 업계는 개발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각 과정이 모두 분업화됐다. 

비메모리 반도체 업계는 ▲설계의 재료가 되는 설계자산(IP) 업체 ▲IP를 모아 새로운 성능·기능을 가진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 ▲이를 제조할 수 있도록 설계도로 바꿔주는 디자인하우스 ▲설계도에 따라 반도체를 만드는 파운드리 ▲최종 제품에 맞게 각 반도체를 포장하는 외주반도체후공정테스트(OSAT) 업체까지 총 다섯 개의 주체가 있다. 

이렇듯 각 주체가 서로 맞물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기 때문에 생태계가 꾸려져야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 대만이 비메모리 반도체 업계 1위 국가인 이유도 TSMC를 주축으로 일찍이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한 덕분이다.

역으로 말하면 국내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취약한 것도 생태계 때문이었다. IP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팹리스 업체들은 아등바등 버티고 있었다. 디자인하우스들은 대부분 영세했다. 국내 1위 파운드리 업체인 삼성전자 또한 국내 고객사보다 자사, 혹은 해외 업체들 챙기기에 바빴고 OSAT 업체들은 삼성만 바라보고 있었다. 

 

있으나 마나 했던 파운드리, 생태계 중심으로 우뚝

삼성 파운드리 사업부가 독립하기 전까지 국내 팹리스는 삼성 팹을 선호하지 않았다. 

삼성전자가 자체 반도체 혹은 글로벌 고객사의 제품 생산을 이유로 상대적으로 물량이 적은 국내 업체들의 제품을 밀어냈던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스템LSI 사업부 내에 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 위험도 있었다. 애초에 생태계가 만들어질 상황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지난 2017년, 순수 파운드리(Pure Foundry) 업체를 목표로 삼성 파운드리 사업부가 독립하면서 악순환의 고리가 끊길 기미를 보였다.

삼성 파운드리 사업부는 생태계가 필요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이들은 삼성 파운드리 생태계(SAFE)를 만들어 디자인하우스와 IP 업체들을 모았다. 팹리스들이 문을 두드려도 열릴까 말까 했던 이전과 달리, 직접 국내 팹리스들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다. 고질적인 ‘밀어내기’도 사라졌다.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사장이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19 코리아'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삼성전자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사장이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19 코리아'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삼성전자

소통도 늘렸다. 국내에서 열리는 삼성 파운드리 포럼에는 삼성의 현 고객사 외에도 잠재 고객사 다수가 초대된다. 삼성 파운드리 포럼은 삼성의 공정 및 IP 로드맵을 파트너사 및 고객사와 공유하는 자리다. 포럼 후에는 고객사 및 협력사들을 대상으로 VIP 간담회를 별도 개최해 상세 계획을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한다.

국내 팹리스 A사 대표는 “삼성이 직접 영업을 뛴다는 것 자체가 국내 팹리스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는 의미”라며 “제조단가도 많이 낮췄고 국내 디자인하우스들의 지원 또한 뒷받침돼 우리를 포함한 상당수의 업체들이 UMC, 글로벌파운드리(GF)에서 삼성으로 제조사를 바꿨다”고 말했다.

8인치 파운드리 업체 DB하이텍도 그 어느 때보다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 회사는 아날로그 및 혼성신호 반도체, 전력 반도체 전문이다. 국내 고객사들과는 대부분 10년 이상 연을 맺어왔을 정도로 관계가 돈독하다. 디자인하우스와의 협력도 늘리고 있다.

현재 이 업계에서는 “8인치 생산라인이 없어서 칩을 못 만든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팹 공급 부족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회사는 이같은 수요가 가시화되기 전인 지난 2013년부터 중국 등 해외를 공략하기 시작, 수익 구조를 탄탄히 했다. 

전력 반도체가 12인치로 세대 전환을 시작했지만, 아직 8인치에 비해 채산성이 나오지 않아 당분간 DB하이텍의 호황은 계속될 전망이다.

또다른 팹리스 업체 대표는 “국내에서는 아날로그 반도체를 하는 팹리스가 적어서 DB하이텍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국내 고객사 사이에서는 대응력도 빠르고 서비스도 좋다고 정평이 나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경쟁사 등장에... 새 판 짜기 나선 디자인하우스 업계

올해 가장 변화가 컸던 건 디자인하우스 업계다. 삼성 디자인하우스 협력사들의 합종연횡으로 SAFE의 구조가 탄탄해졌고, TSMC의 국내 VCA(Value Chian Aggregator) 업체도 바뀌었다.

올 초까지만 해도 삼성 디자인하우스 협력사들의 전망은 밝지 않았다. 지난해 삼성 주도로 베트남에 전속 디자인하우스 에스엔에스티(S&ST)가 생겼고, 글로벌 설계자동화(EDA) 업체들은 물론 삼성의 자회사인 하만커넥티드서비스까지 디자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국내 디자인하우스 업체 인력은 많아봤자 100명 규모다. 규모로도 게임이 안 되는 경쟁사들이 등장하다보니 영세한 디자인하우스들은 서로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다. 삼성전자도 SAFE 내 디자인하우스들에게 인수합병(M&A)으로 규모의 경제를 확보해야한다며 디자인하우스를 3곳으로 압축하라고 요구했다.

 

▲삼성 시스템LSI 사업부의 외주 물량으로 전속 디자인하우스 업계가 수혜를 입게 됐다./삼성SAFE 로고
삼성SAFE 로고

그렇게 올해 두 건의 M&A가 성사됐다. 지난 5월 알파홀딩스는 삼성전자의 상보성금속산화물반도체(CMOS) 이미지센서(CIS) 디자인 작업을 하던 플러스칩을 인수했고, 추가 인수 또한 검토 중이다. 지난 10월 8인치 전담 디자인하우스 하나텍은 실리콘하모니과 몸을 합쳤다. 

베트남 디자인하우스 에스엔에스티도 국내 디자인하우스 아르고와 손잡았다. SAFE에 들어오려면 최소 수 년의 업력을 갖춰야하는데 신생 업체다보니 아르고를 통해 SAFE 내로 들어올 것으로 보인다. 

전용 반도체(ASIC) 서비스 업체도 등장했다. RISC-Ⅴ 코어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사이파이브(SiFive)의 국내 자회사 세미파이브(SemiFive)가 SAFE 소속인 세솔반도체를 인수하면서 SAFE에 들어와 ASIC 서비스를 시작했다. 

 

TSMC. /TSMC 제공
TSMC 로고

TSMC 진영에도 변화가 있었다. 디자인하우스 협력사인 VCA 타이틀을 단 업체가 에이디테크놀로지에서 에이직랜드로 바뀌었다. 에이디테크놀로지가 삼성 디자인하우스인 에스엔에스티 설립 당시 도움을 줬다는 논란이 일면서 신뢰에 금이 갔고, TSMC는 지난 8월 에이직랜드를 공식 VCA로 임명했다.

에이디테크놀로지는 삼성 디자인서비스를 시작하기 위해 SAFE 진입을 타진하고 있다. 공식 VCA 기간은 내년 3월까지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외에 강력한 경쟁자들이 등장하면서 영세한 디자인하우스들이 살아남기는 힘든 분위기”라며 “합종연횡은 내년에도 계속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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