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재⋅부품 재고일수 최소 50% 이상 늘려야
대기업보다 자금력 약한 중소기업에 타격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인정국)’에서 제외키로 하면서 산업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향후 일본산 소재⋅부품⋅장비를 구입할 때 주기적으로 수출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탓에 후방 생태계 관리 불확실성이 크게 증가한다는 이유에서다. 

자금력이 충분한 대기업 보다는 현금흐름이 약한 중소기업에서 재고 비축에 따른 비용 부담이 가중될 전망이다.

2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수출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와 관련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2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수출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와 관련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재고 비축 일수, 최소 50% 늘려야”

 

일본 정부의 수출 제재 조치 이후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더 클 것으로 보는 이유는 향후 불확실성에 대한 대처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달 일본 정부의 1차 수출 제재안이 에칭가스⋅감광액⋅플루오린PI 등 특정 품목에 대한 조치였다면, 이번 제재는 식품⋅목재를 제외한 모든 수출품이 대상이다. 

국제 사회의 여론과 우리 정부 대응을 봐 가면서 일본 정부가 어떤 품목이라도 수출 제재 대상에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에칭가스⋅감광액⋅플루오린PI 수출 제한은 사실상 삼성⋅LG⋅SK를 대상으로 한 제재였으나, 이번 조치는 국내 모든 산업계가 사정권이다.

한 반도체 후공정 업체 관계자는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는 모든 품목에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라며 “이 때문에 어느 품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향후 국내 업체들은 일본에서 수입되면서, 여타 해외 거래선 확보가 어려운 품목에 대해 대대적인 재고 확보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통상 국내 IT 업계는 일본에서 수입되는 소재⋅부품에 대해 수송기간(딜리버리)에 추가로 3~4주 정도의 사용분만 재고로 비축한다. 

일본과는 거리가 가깝고, 지진⋅태풍 등 자연재해가 아니라면 공급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2차전지용 코발트 등 수송 기간이 길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민주콩고)에서 구매하는 물품은 수개월치 이상 재고를 쌓아 놓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일본에서 구매하는 소재⋅부품 역시 재고 비축 기간을 크게 늘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투명 폴리이미드 필름. 일본은 지난 1차 수출 제재 조치를 통해 플루오린 PI(투명 폴리이미드) 수출을 제한했다. /사진=코오롱인더스트리
투명 폴리이미드 필름. 일본은 지난 1차 수출 제재 조치를 통해 플루오린 PI(투명 폴리이미드) 수출을 제한했다. /사진=코오롱인더스트리

일본 회사가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된 국가에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매 6개월마다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허가 심사 기간이 최장 90일까지 소요된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자면, 12주 이상 사용분까지 재고로 축적해야 하는 셈이다.

소재⋅부품 재고일수를 늘린다는 것은 그 만큼 자재에 묶이는 비용 증가를 의미한다. 재고 구매 비용과 별도로 보관에 따른 관리비용 증가도 수반된다. 특히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에 쓰이는 각종 화학물질은 기본적으로 저온 보관 시설을 갖춰야 한다. 이러한 시설을 갖추는 것도, 운영하는데도 지금보다 비용이 더 들 수 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자금력 풍부한 대기업들은 창고 하나 더 짓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중소기업들에게는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모델변경 시기, 리스크 더 커질 것

IT업계는 어느 산업보다 모델 교체 주기가 빠른다. 이 때문에 재고를 오랜 기간 쌓아놓을 수록 수익성이 떨어진다. /사진=애플
IT업계는 어느 산업보다 모델 교체 주기가 빠른다. 이 때문에 재고를 오랜 기간 쌓아놓을 수록 수익성이 떨어진다. /사진=애플

통상 IT 업계가 매년, 빠르게는 수개월만에 모델 변경을 한다는 점은 재고 비축에 따른 리스크를 더욱 증가시키는 요인이다. 특히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모바일 부품의 경우, 완제품이 잘 팔리지 않으면 단종에 따른 재고 문제가 심각하다.

예컨대 애플은 매년 6~7월쯤 아이폰 신모델 생산에 들어가 판매 추이를 봐가며 이듬해 생산을 단종시킨다. 최근 아이폰 판매량이 저조해진 탓에 이 단종 시기가 점차 앞당겨지고 있다. 일본에서 소재⋅부품을 구매해 애플에 공급하는 업체들로서는 향후 재고 확보에 따른 리스크가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셈이다.

한 카메라 모듈업체 관계자는 “모델 변경이 일어나면, 기존에 확보해 놓은 재고들은 상당 부분이 폐기된다”며 “이 때문에 최대한 재고 일수를 짧게 가져가야 하는데, 일본 소재⋅부품 수출이 제한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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