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류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전세계 신세대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듯이, 800년전 칭기즈칸의 ‘몽골류’는 인류문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서로 잘 모르던 유라시아의 문명들은 통신, 상업, 기술, 정치가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제국에서 소통하고 교류하며 통합되었다.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이 싸운 중국, 페르시아, 유럽은 풍요롭고 많은 인구와 군사를 거느린 거대한 농경정주문명의 세계였다. 혹자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이전의 13세기 유라시아는 고여 있는 물과 같은 ‘대기업병’에 빠져 있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스, 로마, 한나라, 당나라, 페르시아 등 몽골제국 이전의 제국들은 몽골제국에 비하면 동네 골목대장에 불과했다. 야만인으로 폄하되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대는 정착문명 시대를 종식시키고 유목이동문명의 지구촌 시대를 열었다. 현대문명은 일반적으로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의 유산이라고 여겨지지만 필자는 그보다 앞선 몽골제국의 유산이라고 보고 싶다. 서양사람들은 몽골제국을 야만하고 잔인한 제국으로 폄하하지만 우리 인류의 근대체제는 몽골제국에서 시작되었다. 몽골제국이 동아시아 상업혁명의 태동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칭기즈칸의 두 전쟁

칭기즈칸의 전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1206년 끝난 몽골초원 통일 전쟁이고 두번째는 유라시아대륙 정복을 위한 전쟁이다. 칭기즈칸의 유라시아 정복 목적은 무역을 확대하려는 경제적인 동기가 강했다. 유목경제는 가축을 방목해 젖과 고기, 가죽을 얻는 단순한 경제구조를 가지므로 부족한 물자는 무역이나 전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칭기즈칸은 상인들을 중시하여 위구르인 등을 핵심 관리로 등용하고 “상인은 누구도 공격할 수 없다”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몽골제국의 세계 정벌 지도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몽골제국의 세계 정벌 지도

 

▲위 지도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여몽연합군이 동원된 원세조 쿠빌라이의 일본침략 내용을 확대했다. 한국 마산의 위치가 잘못 표시되었다.
▲위 지도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여몽연합군이 동원된 원세조 쿠빌라이의 일본침략 내용을 확대했다. 한국 마산의 위치가 잘못 표시되었다.

 

몽골제국에서 시작된 근대세계

몽골제국이 유럽을 점령하지 않은 이유가 칭기스칸의 아들 우구데이칸이 급사해서 바투의 유럽원정군이 회군을 한 이유도 있지만 당시 유럽은 지지리도 가난한 지역이여서 가장 값비싼 전리품이 헝가리왕의 천막이었을 정도로 초라해 원정을 할 가치를 못 느꼈던 점도 있다.

▲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1246년 몽골제국의 구육칸이 교황에게 보낸 서신. 교황이 구육칸에게 기독교국가에 대한 침략을 멈추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한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내용은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짐에게 복종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국가의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다. 유럽은 이 편지를 받고 몽골이 재침략할까봐 엄청 떨었으나, 몽골군이 이집트의 노예부대 맘루크군에 패한 이후에 더 이상의 서방원정은 좌절되었다.
▲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1246년 몽골제국의 구육칸이 교황에게 보낸 서신. 교황이 구육칸에게 기독교국가에 대한 침략을 멈추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한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내용은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짐에게 복종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국가의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다. 유럽은 이 편지를 받고 몽골이 재침략할까봐 엄청 떨었으나, 몽골군이 이집트의 노예부대 맘루크군에 패한 이후에 더 이상의 서방원정은 좌절되었다.

 

칭기즈칸의 기술ㆍ상업 중시 

칭기즈칸은 기술을 중요시하는 경영인이었다. 몽골제국의 역사서 ‘집사’에는 투르크족에게 몰살당하고 남은 두쌍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에르게네 쿤 계곡으로 달아나서 번성했으나 수가 많아지자 계곡을 나서기로 결심하는 내용이 나온다. 말가죽 소가죽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쇠를 녹이며 길을 뚫어 초원으로 다시 나왔다 한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정월 초하루에 대장장이 역을 맡아 쇠를 두드리며 조상들의 은덕을 기렸다. 칭기즈칸과 몽골인들은 자기들이 직접 기술을 개발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이름인 ‘테무친’이 대장장이라는 해석도 있다. 늑대 어머니의 열 아들이 만든 돌궐(투르크)도 알타이 산의 대장장이었듯 몽골족도 쇠를 잘 다루는 대장장이의 경쟁력으로 세력을 불리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 보면 몽골제국은 독일의 광부들을 중국의 준가르 분지로 데려오고 중국의 의사들을 페르시아에 이식했다. 중국의 장인, 기술자, 전문가를 영입해 도시를 포위하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페르시아의 증류주 제조법은 고려로 전파되어 우리가 즐겨 마시는 소주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는 위스키가 되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양탄자를 퍼뜨렸고, 레몬과 당근을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전파했으며 국수, 카드, 차를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져갔다. 그들은 파리의 금속세공 장인을 데려와 몽골의 건조한 초원에 분수를 만들게 했고, 영국의 귀족을 데려와 군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했으며, 지문을 찍는 중국의 관행을 페르시아에도 전파하였다. 중국에서는 기독교 교회가 건립되었고, 페르시아에서는 절과 탑이 건립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쿠란‘을 가르치는 이슬람 신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을 댔다. 이란에서는 수많은 중국 요리사들이 활동하고 많은 무슬림 요리사들이 중국에 진출했다.

몽골제국은 이데올로기와 종교에 집착하지 않고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고, 그 답을 찾으면 제국의 모든 지역에 전파하였다. 단순히 물자의 교환이 아니라 지식의 교환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중국의 침술은 무슬림에게 알려졌고, 무슬림의 뛰어난 수술 방법은 중국으로 전파하였다. 달력과 연감을 통일시켰고, 인도 수학자들의 도움으로 제국의 모든 물자를 기록했다. 중국, 페르시아, 유럽의 기술자들이 중국의 화약과 무슬림의 화염방사기를 결합시킨 뒤 유럽의 종 주조 기술을 응용하자 혁명적인 발명품인 대포가 탄생하였다. 권총에서 미사일에 이르는 방대한 현대무기의 발전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몽골제국이 대단한 것은 중국, 페르시아, 이집트, 유럽, 고려 등 전세계 최고의 기술자, 학자들에게 몽골제국의 주주로 참가하여 자신들의 재능을 유라시아 전체에 펼칠 기회를 주고, 몽골제국은 이러한 기술과 사상을 퍼뜨리고 융합하고 발전시켜 유라시아의 혁명적인 문명발전을 이루어 낸 것이다. 선거, 공립학교, 우편제도, 대포, 주판 등 유럽이 만든 것이라 짐작해온 문명의 산물은, 사실 몽골제국이 만들었다. 몽골과 멀고 가난했던 덕분에 몽골의 침략을 피한 변방 유럽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무역, 기술 이전 등 몽골제국의 모든 혜택을 입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주장하듯 근대는 유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몽골제국의 산물이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면서 전쟁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심도 만들어냈다. 몽골제국은 틀에 박힌 프레임이 없는 유연한 사고로 문명의 저수지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한단계 더 발전시키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표준을 만들어냈다. 몽골제국의 시스템은 근대 세계체제의 기반이 됐고 이 새로운 제국 시스템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자유로운 교역과 교통, 지식의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지폐를 도입했고, 문맹을 없앨 목적으로 모든 아동에게 보편적인 기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초등학교를 세우려 했다. 몽골제국은 역법을 개선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정확한 만세력을 만들었으며, 이전 어느 때보다 광범위한 지도 수집을 후원했다. 몽골제국의 학자들은 중국, 아랍, 그리스의 지리 지식을 조합하여 수준 높은 지도를 만들었고, 무역을 장려하기 위해서 항구건설을 장려하고 예전보다 훨씬 더 정확한 해도를 만들었다. 그들은 상인들이 육로로 몽골 제국에 오도록 권했으며, 상업과 외교를 확대하기 위해 멀리 아프리카까지 탐사대를 보냈다.

농경국가인 중국대륙의 송나라 등은 전통적으로 농업을 권장하고 상업을 제한해서 상인을 강도보다 한 단계 높은 지위로 취급했다. 몽골제국은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정부관리 밖에 없을 정도로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시켰다. 반면 송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학자들을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는데 이는 거지보다 높지만 매춘부보다 하나 낮은 등급이다.

몽골제국의 각각의 울루스(칸국)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칸'을 추대했고, 대칸(카간)은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그를 추인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칸국들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의 '연대성'이 있었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었다. 대칸은 여전히 한 사람에 불과했고 여러 칸국의 칸들은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카간이 즉위하면 그는 제국의 여러 울루스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그 사실을 알렸고, 칸국의 칸들도 즉위하면 카간에게 사신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카간은 중국에서 거둔 재정수입의 일부를 칸들에게 보내주었고, 칸들 역시 각 칸국에서 거둔 수입의 일부를 카간에게 보냈다. 이러한 느슨한 칸국들의 연맹은 제국적 연대감과 일체성을 상당 부분 공유했다. 이는 활발하고 빈번한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를 가능케 했고 그 교류가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탄생시켰다.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에서 발췌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은 ‘유라시아 자유무역지대’를 구상해 만들었다. 쿠빌라이는 이 구상을 통해 정치ㆍ군사ㆍ경제ㆍ유통ㆍ생산ㆍ교통 등 다방면에 걸쳐 자유무역과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또한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고용하며 세계제국을 운영했다. 쿠빌라이칸은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고 했다. 그 중심지는 13세기 쿠빌라이가 건설한 베이징이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중국 동북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몽골고원부터 중국까지를 포함해서 보면 베이징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통혜하’라는 운하를 통해 베이징을 발해만과 연결시키고, 신중한 남송 공략을 통해 해양을 강화했다. 이때 발전한 도시가 톈진과 상하이다. 쿠빌라이칸은 이를 통해 기존에 여러 유목제국들이 기초를 닦고 확립해 놓은 초원의 군사력과 중국의 경제력이라는 토대 위에 무슬림의 상업력을 결합시킨 대교역권 시스템을 만들었다.

쿠빌라이칸은 제국 내에서 관세를 일원화시켰다. 그때까지는 무역품이 각 도시의 항구,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관세가 부과되었다. 이를 쿠빌라이칸은 매각지에서 한번만 지불하면 되도록 했다. 관세율도 3.3%로 그리 높지 않았다. 그리고 더 큰 거래를 위한 염인(鹽引)의 활용과 지폐의 발행, 은(銀)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은을 통해 세계경제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스키야마 마사아키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에서 발췌

이러한 배경 하에서 몽골제국은 중국, 이슬람권, 유럽, 동남아를 잇는 거대 무역공동체를 만들었으며 그 모든 과정과 절차를 몽골제국의 군대가 지켜주었다. 몽골제국의 정복활동은 동양과 서양을 지리적으로 연결시켰다.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이 유럽으로 전래되었고 천문학, 역법, 수학, 지도학 등이 중국으로 전래됐다.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사 통합을 이뤘다.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이야 말로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 통합의 시대를 연 세계화의 선구자다.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서유럽, 이집트, 인도, 동남아, 일본조차도 정치, 경제, 문화, 기술, 과학, 사상,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몽골제국과 교류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훗날 학자들은 14세기의 세계적 번영을 ‘팍스 몽골리카’라고 부른다. /오무라 오지로 '탈세의 세계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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