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맞으며 초원을 달리는 건 ‘인생 경험’

▲몽골 초원에서 말 타는 사람들.
▲몽골 초원에서 말 타는 사람들.

초원에서 말타기는 인생에서 꼭 해보아야 할 경험이다. 한국에서는 용인 승마클럽에 가면 한달 정도 조교와 훈련을 해야 혼자 말을 탈 수 있게 해준다는데, 몽골에서는 가이드가 “말의 왼쪽으로 다가서서 올라 타고 왼쪽으로 내려라. 오른쪽으로 타면 말이 놀랄 수 있다. 말 뒤로는 가지마라. 등자에 발을 깊숙이 넣지 말고 조금만 걸쳐야 말에서 떨어져도 말에 끌려가지 않는다.” 라는 간단한 조언 한마디 해주고 바로 혼자 말을 타게 한다.

탁 트인 초원에서 능숙한 꼬마 조교들의 도움을 받으며 말을 처음 타보는 나 같은 초보자도 금방 승마에 익숙해진다.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테를지 공원의 말들은 눈치가 빠르다. 내가 달리고 싶어서 재촉을 해도 설렁설렁 걸어 다니다가 10살짜리 꼬마기수가 나타나서 소리를 지르면 그제야 달리는 척을 한다. 짧은 시간에 나를 태워준 꾀 많은 말과 교감을 나누며 초원의 신선한 바람을 맞고 나아갈 때의 상쾌함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나는 인생의 경험이다. 몽골은 말 가격이 아주 싸다. 500달러면 말을 살 수 있는데, 유럽의 배낭여행족 한 명은 1000달러에 말 두 필을 사서 일주일 동안 신나게 돌아다니다가 600달러에 현지사람들에게 되팔아서 교통비 단 400달러로 몽골초원을 마음껏 여행했다고 한다.

▲칭기즈칸 마동상 앞에서 독수리와 사진을 찍었다.
▲칭기즈칸 마동상 앞에서 독수리와 사진을 찍었다.

몽골고원에서는 지난 6000년간 독수리를 이용해왔다. 칭기즈칸이 가장 즐겨했던 놀이가 독수리 사냥이었고, 과거의 번영을 되새기는 몽골의 ‘나담축제’에서도 검독수리 사냥이 가장 인기있는 이벤트 중 하나이다. 몽골 주요 관광지나 초원 곳곳에서 눈을 가린 채 다리가 묶인 독수리를 자주 볼 수 있다. 지금도 몽골고원에서도 척박한 첩첩산중 알타이 산맥에 사는 카자흐족이 독수리로 사냥을 하는데, 생후 1년 미만의 독수리를 데려와 길들여서 3~5년 정도 사냥을 시키다가 자연으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샤머니즘은 국가를 가리지 않는다

▲몽골의 전통 제단 ‘아워’.
▲몽골의 전통 제단 ‘아워’.

아워는 우리 성황당과 비슷한 성격을 띠는 일종의 제단이다. 돌무더기 꼭대기에 색색의 헝겊으로 감싼 나무를 꽂았다. 아워는 ‘둘러싸인 돌’이라는 의미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고, 각 지역의 산신을 섬기는 게 목적이다.

몽골인의 절대 다수가 라마교를 믿고 요즘 젊은 층은 개신교를 믿기도 하지만 역사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샤머니즘은 오늘날에도 건재해서 야트막한 언덕, 높은 산 정상, 드넓은 평야 혹은 사람이 다니는 길가 등 어디에나 아워가 있다.

초원 유목민들의 샤머니즘과 한반도의 샤머니즘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몽골인은 아워에 그 지역의 땅과 주민을 보호해 주는 정령이 산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주위를 돌면서 돌을 던지고, 보드카나 우유를 뿌리고, 돈이나 사탕을 올려놓고 소원을 빈다.

아워를 세 바퀴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아래쪽의 작은 돌을 위쪽으로 던지면서 소원을 빌어봤다. 몽골 가이드는 아워의 아래에 놓인 작은 돌들이 “위로 던져 달라”고 속삭인다고 한다.

라마불교 사원인 이리야발 사원은 부처님이 타고 다녔다는 코끼리를 형상화해서 만들어 ‘코끼리 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사원 뒤편은 웅장한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108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라마불교가 몽골에 자리잡은 것도 몽골 전통의 샤머니즘과 잘 결합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리야발 사원.
▲이리야발 사원.

달라이라마가 몽골에 가지 못하는 이유

2006년 이후 10년만인 2016년, 달라이라마가 9번째로 몽골을 방문하였으나 이후 중국의 무차별적인 경제제재에 몽골정부가 백기투항 해 이제는 방문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참고로 현재 아시아에서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달라이라마의 방문을 허용하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한국조차 불교계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의 달라이라마 방한요구가 있었지만 중국을 의식한 역대 정부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주변국에 경제적 힘을 남용하는 중국의 민낯과 함께 동아시아 유목민족과 티베트 불교간 종교적, 역사적 특수관계를 상기시킨다.

기마민족에서 탈바꿈하여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정주문명을 받아들인 고대 우리민족이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것은 같은 농업정주문명의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당연해 보인다. 청나라 황제는 북방지역에선 ‘칸’으로, 중국본토에서는 ‘천자’로, 티베트지역에선 ‘전륜성왕’으로 불렸다. 같은 유목제국인 몽골제국의 황제가 지역별로 통치이데올로기에 맞게 다른 이름을 썼던것과 똑같다. 몽골제국 시절 몽골지배층의 강력한 후원으로 국교가 된 티베트불교(라마교)는 몽골족이 만리장성 이북으로 쫓겨난 후에도 몽골의 지배적인 종교로 군림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만몽연합정권인 청나라에도 계승되어 라마교의 법왕은 국사(國師)로 존숭됐고, 유일하게 청나라황제와 같은 위치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신장위구르 지역에 사는 유목민족은 몽골, 여진과 달리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이렇듯 인접한 유목민족임에도 신장위구르인과 몽골, 여진족의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마 무하마드가 상인 출신이었듯 이슬람교가 아라비아반도의 상업적 문화를 배경으로 태어난 종교이기에 역시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무역에 종사하던 신장위구르인들도 쉽게 이슬람교를 수용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반면 몽골과 여진은 티베트불교를 수용하게 되는데, 유목민은 외부세계와 상업 교류보다는 약탈과 침략∙정복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신장위구르나 당시 서역의 유목민족과는 환경이 달랐다. 게다가 몽골초원과 여진족이 할거하던 만주지역은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상의 간선에서 벗어나 있다. 아울러 몽골과 여진족은 샤먼신앙에서 비롯된 내세 신비주의적 관념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는데 그것이 티베트불교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을테고. 그런 점들이 같은 유목문명권에 속한 종족들임에도 종교가 달라진 배경이지 않을까.

▲이리야발 사원의 돌계단.
▲이리야발 사원의 돌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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