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보다 독자노선 고집… 논의도 부재

국내 IT기업이 자동차 시장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건 비단 이들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오른쪽)과 크리스 엄슨 오로라 최고경영자(CEO)가 미래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넥소(NEXO)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차는 자율주행 독자노선을 탈피, 지난해 처음 오로라와 협력하겠다고 발표했다./현대자동차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은 완성차 산업과 부품 산업으로 구성된 공급사슬에서 나온다. 자동차 산업은 고용, 후방시장 뿐만 아니라 사회 인프라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와 IT가 융합된 자율주행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가도, 완성차 업계도 국내 공급망 조성에는 소극적이다. 



빗장 걸어 잠근 완성차 업계



사례 1. V2X 모듈 기술을 가지고 있는 한 중소기업은 모 완성차 업체로부터 황당한 제안을 받았다. 군집주행을 해야하니 기술을 무료로 제공해달라는 얘기였다. 당시 해당 기술을 공급할 수 있었던 건 그 기업 뿐이었다. 중소기업 측에서 이를 거절하자 완성차 업체 관계자는 말했다.


“우리 같은 대기업이 써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국내 자동차 업계가 IT기술을 ‘부품’처럼 여기는 것도 문제다. 자율주행은 자동차와 IT업계가 협업, 두 기술을 융합해야 구현할 수 있다. 값비싼 부품을 내재화하거나, 없는 부품을 단순히 사서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럼에도 국내 완성차 업계는 자율주행 기술 내재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IT기업들을 협업의 대상이 아닌 공급사 정도로 여긴다. 스타트업은 물론, 중소기업조차 접근하기 어렵다. 


현대차는 현대모비스, 현대엠엔소프트 등 계열사를 통해 자율주행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해왔다. 다른 완성차 업체가 애플의 ‘카플레이’ 등 IT기업의 운영체제(OS)를 들여올 때, 현대차는 자체적으로 ‘ccOS(connected car operating system)’를 만든 게 대표적이다.


현대차가 기술 개발에 매진하는 동안 세계 자동차 업계는 인수합병(M&A)과 투자로 자율주행 기술을 보유한 IT기업과 협업해 빠르게 기술을 확보했다. 


삼정KPMG 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자동차 산업 인수합병 거래건수는 총 654건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정보통신 기업 인수는 27건으로 연평균 40% 성장했다. 


이 중 한국 기업이 관여한 건수는 불과 34건으로, 미국(195건)이나 중국(136건), 독일(83건)과 배 이상 적었다. 


다른 완성차 업체들은 글로벌 기업뿐 아니라 국내 기업들과 손잡고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국 공급망을 구축,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는 목적에서다. 


일본은 지난 2016년 도요타·혼다·닛산·미쓰비시·덴소·파나소닉 등 15개 기업이 자율 주행차 공동 개발에 합의했고, 그보다 1년 전에는 유럽 메르세데스-벤츠·BMW·아우디가 노키아 지도 사업 부문을 공동으로 인수, 고정밀 지도를 함께 구축하기로 했다.


▲세계 자동차 산업 인수합병 거래건수 및 거래액 추이./삼정KPMG경제연구원, KIPOST 재구성



독자 노선을 고집해오던 현대차는 지난해서야 미국 오로라이노베이션과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협업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단시간에 다른 완성차 업체들의 속도를 따라잡기는 힘들다. 국내외 IT업계와의 협력을 강화해야하는 이유다. 



뒷짐만 진 정부



사례 2. 자동차 후방 카메라 시장이 커지게 된 계기는 지난 2014년,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이 올해 5월까지 1만 파운드(약 4535㎏) 이하의 모든 차량에 후방카메라를 의무화하는 최종 규정을 발표하면서다.


이때 NHTSA는 후방카메라 작동 및 화면 출력 시간, 가시성이나 시정 각도, 사이즈, 내구성 등 요구 성능까지 일일이 명시했고, 이후 이 규격은 자동차용 후방 카메라의 표준으로 여겨지고 있다.




모바일과 달리, 자동차 시장에서 기술 도입의 주체는 완성차 업체가 아닌 각국 정부 및 규제 기관이다. 자율주행차는 지능형도로시스템(ITS), 대차량통신(V2X) 등 제반 인프라의 발전은 물론, 보험이나 파생되는 산업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KPMG인터내셔널이 집계한 자율주행차 준비 지수(AV Readiness Index) 정책 및 제도 부문에서 우리나라는 14위에 그쳤다. 시작도 늦었고, 자율주행에 대한 논의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제시한 자율주행 상용화 지원 방안 및 기본 계획./관계부처합동, KIPOST 취합


실제 미국, 독일 등 선진국들은 법안 제·개정을 반복하면서 자율주행의 토대를 닦아나갔다. 입법의 범위가 큰 만큼 관련 과제를 체계화한 정책 보고서나 지침을 우선 작성하고, 세부 규정을 정해 법제화했다. 기술 발전이 규제보다 먼저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반대다. 지난 2015년 자동차 관리법에 자율주행자동차의 정의 규정을 신설하고, 지원 방안을 발표했지만 세부 내용은 시험운행 중심의 과제와 부처 간 업무 분담에 그쳤다. 


정책적 방향이 제시되지 않다보니 기업들이 기술을 마음껏 개발하기도 어려웠다. 단적인 예로 지난 2016년 2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국내에서 운행된 자율주행차는 총 30대로, 다 합쳐봐야 불과 19만㎞를 주행하는 데 그쳤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2016년 12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1년간 자율주행차(총 205대)가 달린 거리는 50만7252마일(약 82만㎞)로, 우리나라에서 근 2년 동안 자율주행차가 운행한 거리의 4배가 넘는다.


기술개발 등 기업 지원도 소극적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올 초 자율주행차에 필요한 9대 핵심 부품 기술을 선제 개발하고, 매출 1조원 이상의 혁신형 중견기업도 5개 이상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역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없다. 오픈 자율주행 개발 플랫폼을 구축, 기업들이 개발한 기술을 차량에 적용하겠다고 하지만, 시장에서 이 기술을 사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업계 관계자는 “자율주행은 IT기업과 정부, 완성차 업계가 모두 힘을 합쳐야 구축할 수 있다”며 “이대로라면 자율주행차 시대가 본격화됐을 때 한국은 ‘껍데기’만 만드는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KIPOST(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