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는 상앙(商鞅) 이래 법가(法家)를 받아들여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진시황은 초(楚)나라에서 순자(荀子)의 법가사상을 배우고, 진시황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 되었던 이사(李斯)를 재상으로 등용하면서 더욱 강력한 법가주의를 실행했다. 진시황이 황제가 된 후 시도한 모든 정책은 결국 ‘법가적 통치를 강력하게 실시하여 황제중심의 일원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법가는 진나라 멸망 이후 급속히 쇠퇴하는데, 이는 진나라 시절 엄격한 법가 통치로 수많은 사람들이 법가에 심한 반감을 가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앙, 이사, 한비자(韓非子)와 같은 법가 사상가들은 모두 자신들이 만든 법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상앙은 효공(孝公)이 죽자 역모의 모함에 도망가던 중 어느 숙소에 하룻밤을 청하지만 ‘증명이 없는 자는 재워줄 수 없다’는 자신이 만든 법에 따라 신고를 당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이사 또한 조고(趙高)의 모함으로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斬刑)으로 죽고, 한비자는 이사의 농간에 독약을 먹고 생을 마감한다.

 

법가주의가 통치수단으로서는 잘 작동했지만 도덕, 종교, 철학으로 채워야 할 부분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나라 시대에는 유교가 도덕과 교화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으며, 도교는 생활철학으로 자리잡았다. 이어 도입된 불교는 종교적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를 다원화 시켰다. 

 

필자는 한국의 성문법적 성향이 독일∙일본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한반도에서도 조선시대부터는 상당히 강력한 성문법을 가졌다고 한다. 중국은 땅이 넓어 일률적인 기준을 세우기 어려운 면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고, 따라서 원칙을 중시하면서 판례를 중심으로 법치를 했다. 군현제(중앙에서 관료를 파견해 확실하게 지방을 통치)는 진시황이 처음 도입하다 실패하고 그 후 한무제(漢武帝) 당시에야 정착됐다. 조선에서는 군현제가 사실상 조선 초기에 실현됐는데,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백여 년의 법제화 작업은 성종때 경국대전의 반포로 완성됐다. 조선은 경국대전 이후에 판례법은 거의 없어졌고 만고불변, 영원불변의 성문법을 지항 하면서 구체적이고 유연성이 없는 법체계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에는 무역과 상업이 별로 발달하지 않아 복잡한 법질서가 별로 필요 없었고, 판례법의 필요성이 낮았다고 한다. 반면 국가제도법, 정치법이 발달하였고, 규정 중심의 상명하복 문화가 생겨났다고 한다. 한∙당나라 같은 중국의 제국에서는 워낙 다양한 사건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에 판례만으로는 부족해 원칙을 세우는데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법제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국, 미∙중보다 신 산업에 뒤쳐지는 이유

 

요즘 한국이 전세계 6위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법이나 규정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들이 한국에서 만든 규정을 해외 현채인에게 적용하려 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필자의 회사도 글로벌한 수출입을 하면서 성문법 중심의 구시대적이고 불합리한 한국의 법과 제도, 규정에 분통을 터트린 적이 많다.  한국 성문법 체계의 특징은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금지하고 예외적인 사항을 나열하는 ‘허용사항 열거방식(Positive System)’을 취한다. 법률은 물론 시행령, 시행규칙, 각종 지침 및 관리규정 등에도 가능한 행위만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성문법 체계와 더불어 판례법을 중시하는 이원적 체계로 운용되고 있으며, 규제대상으로 명시된 것 외에는 거의 모든 것을 허용하는 이른바 ‘금지사항 열거방식(Negative System)’을 원칙으로 한다. 유연한 법체계를 가진 영∙미∙중국에서는 새로운 산업의 창업이 쉽게 이루어지지만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려면 법, 시행령 등 각종 규정에 어긋나면 안된다. 수십년 전에 별 생각 없이 만들어놓은 불합리한 법, 규정을 따라야만 하고 현실에 맞게 고치려면 또 몇 년이 걸린다.

 

이렇게 우리가 법과 제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미국, 중국회사들은 모바일, 바이오 등의 신 산업에서 과감하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시장을 선도한다.  알리바바, 아마존, 구글이 무섭게 성장하는 사이에 한국의 네이버, 다음의 창업자들은 경찰서 끌려 다니는 것이 싫어서 대표이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한국의 대기업 입장에서 가벼운 솜방망이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성문법적인 엄격한 법치주의는 신생기업에게는 가혹한 규제로 다가온다.  한국의 벤처기업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하고 사업을 하려면 각종 규정에 걸려 이를 해결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써버려야 하니 차라리 남들 다하는 레드오션 사업에 뛰어드는 게 오히려 안전할 수 있다. 정부나 국회에서 수십 년간 규제개혁을 외쳐왔지만, 실질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한국의 법 제도가 농경시대의 성문법적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최근 불문법의 원칙(Principal) 중심으로 네거티브 시스템을 시도하려고 하지만, 크게 실효가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급변하는 21세기에 살아남는 국가가 되려면 불문법적 요소를 강화하면서 보다 원칙에 초점을 맞추고 상황에 따라 유연한 판례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상공업 중심으로 경제가 개편된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농업경제기반에 기반을 둔 성문법 중심의 융통성 없는 법제도가 수백 년 이어오면서, 유교적, 정확히 이야기하면 주자학적 상명하복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권위에 순종하는 문화가 우리 몸에 배인 것은 아닐까? 

 

 

병마용갱, 고대 제국의 '뉴딜 정책'

 

진시황의 병마용갱. 건국영웅 엽검영 (葉劍英)의 후원으로 발굴할 수 있었다. 박물관의 글씨는 엽검영이 썼다. 

 

1974년 극심한 가뭄으로 우물을 파던 농부가 우연히 병마용의 입구를 발견해서 20세기 세계고고학계 최대의 발견이라 할 수 있는 병마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고고학자들은 발굴에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을 중국 10대 원수 중 한 명인  엽검영(葉劍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의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휘호는 글씨를 잘 못쓰던 엽검영이 엄청 연습해서 쓴 글씨로, 뭔가 어설프다는 느낌이 든다.  병마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이 병사들 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000여 점의 병사와 130대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으며, 아직도 발굴이 되지 않은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진시황은 13살 소년 시절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35년 동안 지어도 완성하지 못했고, 그의 2세인 황제 호해(胡亥)가 진시황의 후궁과 그 자녀, 공사인부를 순장시키면서 이 공사를 끝냈다. 진시황릉 공사는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공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진시황릉 공사는 만리장성과 더불어 고대제국 경제 시스템의 한 축을 담당했을 것이다. 

 

진시황의 300년 선조인 진공왕(秦公王)의 무덤에는 186명의 산 사람들이 왕을 모시기 위해서 순장되었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순장을 행복하게 받아들이거나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춘추전국시대의 전란 속에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자 경제적인 이유로 살아있는 사람을 순장할 수 없었고, 타로코타로 만든 진흙 인형이 사람을 대체하게 되었다. 진시황 용마갱에서는 코미타투스(친위부대)의 전통이 느껴진다. 코미타투스는 스텝지역의 공통된 유목적 풍습이며, 고대 프랑크왕국부터 고구려, 초기 일본왕조에 이르기까지 중앙유라시아 문화 복합체의 초기 형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정치적∙종교적 이상형으로서 영웅적 군주와 그의 코미타투스다. 코미타투스는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기로 맹세한 주군의 친구들로 구성된 전투 부대다. 기본적인 코미타투스와 그들의 맹세는 스키타이 때부터 존재했다. 이는 목숨을 건 의형제들의 피의 맹세와 분명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이러한 맹세는 고대 스키타이 자료로부터 중세의 ‘몽골비사’에 이르기까지 확인할 수 있다.   

 

진시황의 병마용갱. 건국영웅 엽검영 (葉劍英)의 후원으로 발굴할 수 있었다. 박물관의 글씨는 엽검영이 썼다. 

 

병마용의 군사는 원래 손에 창∙칼 등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한나라 시대 도굴꾼들이 들어와 불을 내고 무기를 모두 훔쳐가서 지금 남아있는 무기가 거의 없다. 방화로 보이는 화재로 통나무 기둥들이 내려앉아 병마용들은 대부분 깨진 것들을 재조립한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8000개 병마용은 귀 모양이 모두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고, 실제 사람 한명 한명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병마용의 키는 184cm에서 197cm 사이인데, 당대 사람들의 모습은 그대로 만들었지만 덩치는 크게 과장했다. 머리와 빗의 모양을 보면 10개 부족 이상의 스타일이 보이는데, 진나라에 복속된 다국적 군대를 조각한 것이라 한다. 원래 모든 병마용은 원색으로 채색하고 옻칠로 마감이 된 컬러풀한 모습인데, 발굴과 동시에 안료가 공기와 산화되면서 색깔이 날아가버려 진흙색깔의 테라코타로 잘못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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