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

2002년 중국의 국민감독 장이머우(張藝謀, 장예모)가 감독하고, 이연걸이 암살자역으로 주연을 맡은 ‘영웅’이라는 영화를 보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어릴적 학교에서 진시황(秦始皇)은 잔인한 폭군이라고 배웠는데, 영화는 진시황을 피폐한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내리는 선각자이자 자객인 이연걸까지 감화시키는 포용력있는 위대한 위인으로 그렸다.

 

영화 '영웅' 포스터. 중국의 중화주의 사상이 드러난 영화로 평가 받는다.

 

 

진시황은 어떻게 주지육림(酒池肉林) 속 잔혹한 폭군에서 멋지고 위대한 황제로 변신했을까? 법가(法家)주의자인 진시황은 진제국의 군현제(郡縣制)에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하는 유생(遺生)들에 격분해서 모든 책을 불태우고 그들을 생매장했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다. 하지만 후세의 학자들은 분서갱유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지 의심을 한다. 유가의 책들은 그 당시 소실된 것들이 많아 보이지만 다른 분야 책들은 소실된 흔적이 별로 발견되지 않았고, 유생 460명을 생매장했다는 갱유도 꾸며낸 이야기일 수 있다고 한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유가의 나라인데, 진나라 이후 여러 왕조의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유교적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고의로 진시황을 모함하고 깎아내렸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새롭게 떠오르는 중국의 사회주의 정권은 옛날 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위대한 중국의 역사를 과시하고 전통적, 유교적 가치관을 부정하면서 신중화주의를 부활시키는데에는 진시황만한 선전도구가 없는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문화대혁명 시절 진시황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4명의 황제 중의 한명으로 꼽으며, 자신이 마르크스와 진시황을 합친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필자 생각에는 향후 수십년간 중국정부 주도로 진시황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활발하게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이상 중국의 유학자들이 진시황에 대해 만들어놓은 부정적 프레임들이 상당 부분 깨어질 것 같다. 진시황의 잔인함을 설명하는 기록들은 상당수 진실성을 의심받고 있고, 억지로 지어낸 듯한 흔적도 많다. 앞으로 몇 십년 뒤 중국 영화 속의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낸 중국을 통일한 위대한 황제로, 중국이라는 시스템의 설계자로서, 더 멋지고 위대한 영웅으로 그려질 것이다.

 

 

유목민의 후예

 

진시황은 벼락출세한 슈퍼스타가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서북지역에서 초원지역과 접경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오던 진 제국은 기원전 9세기 진비자(秦非子)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 31대손 진시황이 북중국 평야를 통일할 때까지 600년 동안 내공을 차곡차곡 쌓아온 나라다. 진 제국의 성장 뒤에는 유목민족의 DNA와, 그들과 접경했던 유목민들이 있었다. 실제로 중국 역사를 보면 명(明)나라 주원장(朱元璋)을 제외하고는 중국 남쪽에서 군대가 일어나 북쪽을 통일한 적이 거의 없었다.  초원지대의 말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기병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바탕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자웅을 겨루는 초한지(楚漢志)는 영웅 위주로 써놓은 소설이라 기병의 역할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지만, 한나라 유방이 초나라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도 관중 지역에 근거를 삼고 초원지대에서 말과 기병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나라가 서북변방의 소국에서 중원을 통일한 제국으로 성장한 이면에는 초원 민족인 서융(西戎)의 역할이 컸다. 전국시대 중원의 다른 나라들이 명분과 정통성을 앞세울 때 진나라는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여 시야를 넓히고 통일의 위업을 이뤘다.

 

진의 발흥기에 대해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다름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날짐승을 잘 조련했으므로 순에게서 영(寧)의 성(姓)을 하사 받았다. 말을 잘 다루며 명마를 헌상하여 주왕의 총애를 받았다.  주왕이 한수와 위수 사이의 지역에서 말을 담당하도록 했는데 잘 번식시켰다... 영족은 말을 사육하는 능력이 뛰어나, 오랜 세월에 걸친 공헌을 칭찬하고 지금의 산시성(陝西城)이 된 진(秦)이라는 읍을 주고, ‘진영(秦寧)’으로 부를것을 허락했다.'    

 

진의 토대가 된 영족은 오로지 말이나 가축의 사육에만 종사하는 보기 드문 무리였다. 기원전 221년에 진은 광대한 중원을 천하통일해 동아시아 최초의 세계제국을 구축했다. 중국의 가장 서쪽에서 말을 사육한는 것을 전업으로 삼는 유목민으로서, 기마 유목민과 접촉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중국의 저명 사학자 이중텐(易中天)도 '진나라 사람들은 본래 서융이었을것이다. 그들이 맨 처음 살던 지역인 오늘날의 간쑤성(甘肅省) 리현(禮縣) 동북부는 견융(犬戎)과 마찬가지로 견구(犬丘)라 불렸고, 그들이 말을 잘 탄다는 이유로 ‘진’ 땅에 책봉되었다. 이는 진나라인이 본래 유목민이었으며, 그들의 봉토는 곧 주나라의 유목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고 기술했다.   

 

비교적 최근인 2009년에 발굴된 마자위안(馬家塬, 마가원) 유적은 기원전 4~3세기 진나라·서융 계통의 것으로, 그 유물에는 스키타이계 초원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다. 특히 고도의 금 세공기술인 누금세공기법은 지중해 지역에서 처음 개발돼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거쳐 시베리아 황금유물로 이어지고, 한참 뒤에는 신라의 황금유물에서도 사용된 기술이다. 

 

중국의 여러 나라의 비판을 받은 것으로는 유목민의 풍습인 순장(殉葬)도 있었다. 서융을 정벌한 진목공(秦穆公, 진시황의 400년 선조)도 정작 본인이 죽었을 때는 측근 신하 3명을 포함해서 186인을 순장했다 하여 사가((史家)들의 비판을 받았다. 순장 풍습은 전국시대 수많은 전쟁으로 인구가 줄어들자 진시황 때는 실물크기 진흙인형(테라코타)로 대체되었고, 이후 유목적 전통이 강하지 않은 한(漢)나라 때에는 30cm 크기의 작은 진흙 인형으로 대체되었다.

 

진시황 무덤에서 출토된 병마용. 관람객들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목민 DNA로 일군 경제 부흥

 

5000년 중국역사에서 순수 한족이 세운 나라는 한·명·송(宋)나라 등이다. 주(周)·진(秦)·수(隋)·당(唐)·원(元)·청(淸)나라 등 대부분의 국가는 유목 DNA를 바탕으로 건국됐다. 특히 중국의 영토가 크게 확장된 때는 유목 민족 출신이 세운 진·당·청나라때인 것을 보면 중화민족을 주장하는 것은 중국인의 커다란 아이러니다. 진시황 조차 유목민인 서융의 후손으로 오랑캐 출신이라고 할 수 있고, 오랑캐 출신이기 때문에 북중국 통일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 진나라는 자신들이 '순수한 한족'이 아니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유목 민족들을 포섭하는 데 이용했을 것이다. 1974년 거연(居延)에서 발견된 죽간에는 '진호(秦胡)'라는 구절이 있다. '진'은 중국인이요, '호'는 오랑캐인데 둘을 같이 쓴 이 낱말은 진나라에 포섭된 유목민족을 의미한다. 진나라는 서북쪽 변방이라는 중원의 멸시를 문화교류의 거점으로 발달시키면서 극복했다. 

 

진시황이 시도한 모든 정책은 결국 법가적 통치를 강력하게 실시해 황제중심의 일원적 지배체제 확립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법가는 토지를 많이 가진 귀족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유가사상에 대비되는 사상이다. 진나라가 법가를 택한 것은 진시황 가문의 유목적 DNA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400년 후의 팍스(PAX) 몽골리아도 세금을 조금만 받아 백성들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국제무역으로 국가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였다. 몽골의 귀족들은 글로벌 유통망을 장악한 위구르 상인, 페르시아 상인 등에 투자해 큰 수익을 얻어 굳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과하게 매길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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