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 전세계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몇 개 안되는 지역 중의 하나가 황하 유역이다. 이 황토지대는 목축을 하기도 별로였고, 주로 농경을 바탕으로 문명이 전개되었다.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황하문명이 성립됐다.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인구는 2000만~3000만명, 진시황때는 3000만~4000만명, 수·당시대에는 5000만-6000만명으로 추산된다.

 

기원전 500년 춘추전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철기가 농업에 사용되면서 농업생산력이 크게 늘어나고 인구도 증가했다. 이어서 중화농경문화가 탄생했다. 황하 유역은 메소포타미아나 나일강 삼각주보다 훨씬 더 넓으며 커다란 사막 같은 지리적 난관도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진시황 시절에는 경제·사회적으로 황하 유역 자체 인구와 국토 면적으로도 한 나라를 형성하기 충분했으므로 서쪽의 오리엔트 문명처럼 굳이 다른 지역과 교류를 해야 할 필요성이 적었다. 일관되게 동양 문명의 강력한 중심으로 기능했다. 이 지역의 이름도 그에 걸맞게 가운데 벌판 즉 '중원(中原)'이다. 상(商)나라(중국의 최초 왕조) 이후 기원전 1030년부터 진시황이 북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중국에는 25개 이상의 봉건국가가 건립돼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황하의 모든 범람지역에 둑과 운하가 만들어지며 경작지가 늘어났고 동물이 끄는 쟁기, 가죽으로 만든 마구, 격발식 활, 화폐경제 등 새로운 발명품들이 중원지역의 문명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 있던 오리엔트 문명, 특히 지중해 유역은 자급자족 체제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활발하게 교역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알파벳도 페니키아 사람들이 장사를 하려고 만든 문자다. 서양 문명의 중심은 지중해라는 바다였지만, 동양 문명의 중심은 중원이라는 땅덩어리였다.

 

시안은 중국 내륙 깊숙히 자리잡고 있어서 인천공항에서 시안공항까지 비행기로 3시간이나 걸린다. 시안은 북중국평야의 서쪽에 치우쳐 위치하고 있는데 왜 절반이 넘는 중국역사가 시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까?

 

1400년전 7세기 중반 당 태종때 부터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인들이 장안에 오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회족들의 직접적인 조상은 13세기 초반 징기스칸의 정복활동과 관련되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들어온 무슬림들이라고 한다.

 

국경 근처에 있어 외적과 가까이 있다는 단점도 있지만 외국, 타문화권과 교역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국경지대에 수도를 세운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인 한반도 국가들은 수도에서 세금을 걷는 기능이 중시되어 한성, 개성과 같이 한반도의 중앙부에 수도를 세웠다. 반면 중국의 수도들은 산업단지, 무역기지로서의 기능을 같이 수행해왔다.

 

중국은 땅이 넓어서 단 1개 성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제압을 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 중국에서 지방 반란군이 중앙 정부군을 이긴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따라서 중앙 수도에 강력한 군사력을 모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수도는 세금만 걷는 곳이 아니라 생산과 무역을 해서 그 이익으로 군대와 관료를 유지해야 하는 곳이 됐다.

 

중국 역사의 또 다른 한 축인 북경도 이런 산업단지, 무역기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북쪽에 치우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시안은 관중(關中)평야 한가운데 있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경계지대로서, 이 기능들을 수행하기에 북중국평야 전체에서 최적의 위치로 꼽혔다. 이 때문에 시안과 그 주변 지역인 서기, 함양, 호경이 근 2000년간 중국의 수도가 되어 왔던 것이다.

 

유목민족들은 유목경제 만으로는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어렵다. 특히 곡물과 식물성 섬유 등 식량과 생필품을 농업경제권에서 조달해야만 하고, 시안이 이런 유목민족에 대한 물류기지와 생산기지 역할을 하였다. 또 중앙정부는 반대로 소그드 상인, 위구르 상인들을 통하여 유목경제권에서 말, 귀금속 등을 수입하여 배급하였다.

 

조선과 같은 농업경제권조차 자기, 종이, 벼루, 먹과 같은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자를 조달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상당수의 물자는 중앙정부의 배급에 의존해야만 했다. 농경국가의 중앙정부는 이런 다양한 물자의 수입, 수출과 배급권을 쥐고 있었으며, 이러한 물자 유통과 배급은 엄청난 권력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중원지역의 급격한 농업생산력 증가는 급속한 환경파괴를 초래하였다. 주로 벌목과 그로인한 토양의 침식, 관개시설로 인한 토양의 염분화가 발생했다. 이처럼 시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지역은 주(周)나라,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때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는데, 당나라 이후에는 기후의 변화로 온도가 낮아지고 지력이 떨어져 그로 인해 관중 지역의 식량 생산이 급감하면서 경제와 문화도 쇠퇴하게 되었고 낙양, 개봉, 남경, 북경 등으로 중국 역사의 중심축이 옮겨 가게 되었다.

 

중국 시안 회족거리 풍경. 전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시안의 시끌법썩한 회족(回族, 무슬림) 거리 자리는 당나라 장안 시절 같은 역할을 하는 서시(西市)가 있었다. 객사와 주점이 즐비하였고 로마의 예술, 비잔틴 건축, 인도의 곡예와 마술을 볼 수 있었으며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에서 온 미모의 여성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흑인들도 거리를 활보했다고 한다.

 

1400년전 7세기 중반 당 태종때 부터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인들이 장안에 오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회족들의 직접적인 조상은 13세기 초반 징기스칸의 정복활동과 관련되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들어온 무슬림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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