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소득은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궁전벽화에서 고구려 사신 그림을 본 것이다. 실크로드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군 고선지와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고승 혜초 등 우리 역사 속 인물들의 흔적이 다수 남아있다. 당장 타슈켄트(석국)만 해도 고선지가 한때 점령한 곳이다. 둔황 막고굴에서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고, 벽화에는 조우관을 쓴 우리 선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그려진 벽화.

아프로시압 궁전벽화에도 조우관을 한 사신들이 있었다. 상당 부분이 유실되긴 했지만 함께 쓰여진 명문을 해석하면 이 벽화 속의 인물은 사마르칸트의 바르후만왕을 알현하러 온 각국의 사절들로 추정된다. 바르후만왕으로 추정되는 인물 양 옆으로 차가니안, 차치(타슈켄트), 당, 티베트 사절이 보인다. 조우관을 쓴 사절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북벽에는 당나라 공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배를 타고 있는데, 왜 당의 공주가 그려져 있는가는 의문이다. 당시 바르후만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당의 공주와 결혼했다는 추측도 나온다.

 

만약 이 추정이 맞다면 이들 사신은 공주의 결혼식에 초대돼 왔던 것은 아닐까? 조우관을 쓴 사절은 7세기 후반 당과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당을 견제할 수 있는 동맹국을 찾아 몽골의 초원을 거쳐 서역까지 간 고구려 사절인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성과 사마르칸트는 80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어 도보로는 200일, 말을 타고도 80일 이상이 걸린다. 돌궐의 영토를 이용할 수 있었던 시기와 서돌궐이 세력을 회복한 시기를 고려하면 고구려 멸망 직전(651년부터 657년 사이)인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해보면 당과의 치열한 전쟁 중에 바르후만과의 동맹을 위해서 필사적인 외교전을 펼쳤을 것이다. 만약 바르후만이 당나라 공주랑 결혼하는데 초대받고 여기까지 달려왔다면, 거의 가능성 없는 동맹을 위해서 조국을 수호할 목적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왔던 것이다. 이들 고구려 사신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면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그려진 벽화.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온 후, 8월 말에 정수일 선생의 실크로드 특강을 들었다. 정동에서 소박하게 열린 학술 특강에는 김밥 한줄로 저녁을 때우면서 그의 강연을 들으려는 참석자들로 가득했다. 80대 노학자의 두시간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의 열기는 놀라웠다. 나처럼 실크로드를 통해 무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 것일까? 승자에 의해 쓰인 역사관과 세계관보다는 유목민, 중앙유라시아, 이슬람을 포괄하는 보편적 역사관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이번 우즈베키스탄의 기행을 한 단어로 줄여서 이야기하라면 ‘영(0)점조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난 200년간 산업화, 세계화를 통해 세계의 패권을 쥔 승자의 입장에서 서구우월주의로 각색된 세계사를 배워왔는데, 현지 방문을 통해 조금은 균형 잡힌 세계관을 가지게 됐다.

 

시장에서 만난 고려인. 실크로드 역사는 곧 우리의 숨겨진 역사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는 15~16세기의 르네상스나 유럽인들의 신대륙 발견 등을 획기적인 전환인양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서구에 의해 전 세계가 연결될 수 있었다는 그럴듯한 세계사를 그대로 수용했다. 결국 서구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관이 해방 이후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우리 머릿속에 서구 사대주의로 발전됐다.

 

이런 왜곡된 세계사를 교과서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엄청난 문제다. 더 이상 우리 후손들이 서구중심의 왜곡된 세계관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주체적인 관점에서 당당한 역사관을, 그리고 보편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이 제대로 된 세계 전략, 인생 전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실크로드 역사를 ‘숨겨진 역사’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리가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숨겨진 역사가 실크로드 곳곳에 널려있다. 실크로드는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실크로드의 공부를 통해 우리가 보다 보편적이고 균형 잡힌 세계관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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