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헨공대(RWTH Aachen) 클러스터 단지에 있는 섬유소재연구소(ITA)는 연구동과 실습동이 합쳐진 3~4층 규모의 건물이다. 이 중 일부를 제외한 공간 대부분은 실험실과 실습실이다. 4층 높이 실습실에 들어가보면 흡사 소재 생산 공장에 온 것 같다.

 

실습실에는 눈에 띄는 기계가 몇 대 있다. 하나는 다양한 방적기다. 김현지 ITA 연구원은 "'이 곳에서 뽑지 못하는 실은 아무데서도 못 뽑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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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공대 섬유소재연구소(ITA) 전경. /ITA 제공

이 곳에서 직물을 짜는 방직기와 직조기 중 일부는 1930년대 도입된 장비다. ITA가 설립된 건 1934년. 그 당시 쓰던 장비와 기술을 여전히 사용한다. 그 때와 달라진 점은 짜낸 직물이 좀 더 정교해지고 다양한 물성을 띨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장비를 도입하기보다는 끊임 없이 옛 장비를 개량하면서 완벽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토마스 그리스(Tomas Gries) ITA소장은 "혁신 주기(사이클)는 매우 길고, 특히 소재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힘들다"며 "재사용, 재생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기술'이 아니라 '재발명'에 방점을 두고 연구를 하면 오히려 신기술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조금 모순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100년전에 쓰던 직조기의 생산성을 어떻게 높일지, 개선할 점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고민하다보면 작은 부분부터 새로운 기술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80여년간 이렇게 쌓아온 기술은 ITA의 자산이다, 현지에서 만난 연구원들은 독일이 원천ㆍ기반기술 강국이 된 이유가 기술에 대한 이같은 관점 덕분이라고 봤다. 신기술이 등장하면 기존 기술이나 사업은 구조조정부터 생각하는 한국의 산업 풍토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다.

 

실제로 ITA는 과거 방식을 응용해 개발한 탄소섬유 제조 기술을 전 세계에 보급하는 등 최신 소재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전기가 통하는 스마트(전자회로) 섬유, 멤브레인, 건축물 벽 두께를 절반 이하로 줄여 주는 섬유강화콘크리트 등이 ITA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산업용 재료 중 10% 가량이 섬유였다. 섬유 기술이 경량화ㆍ슬림화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앞으로 쓰임새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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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가 개발한 섬유강화콘크리트용 내장재. 이 소재를 삽입하면 콘크리트 두께를 일반 건축물의 3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국내 첨단 소재 업계에서도 ITA 기술을 이전 받거나 기술 교류를 한 업체들이 꽤 있다. 케이씨텍과 협업해 반도체 공정에서 반도체 웨이퍼 표면의 화합물을 얇게 갈아내는데 쓰이는 화학적 기계연마(CMP) 패드를 개발했고, 다이텍연구원과 기술교류를 통해 건설현장의 에어백 기술을 공동 개발했다.

 

◇토마스 그리스 소장 인터뷰

 

"10년간 ITA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샘플들을 만들어 본 경험상,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이 중요하다."

 

ITA 건물에는 특별한 마감재가 쓰였다. 섬유 제조 방식을 이용한 대리석판이 건물 외벽을 감싸고 있는데, 건물 안에서 불빛을 비추면 밖으로 빛이 새어나온다. ITA 현관 로비탁자 아래에 동일한 마감재가 붙어 있고, 'ITA'라고 새겨진 선명한 빛이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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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 로비 탁자는 이 연구소에서 개발된 빛을 내는 건축용 마감재를 소재로 썼다.

토마스 그리스 ITA소장은 세계적인 석학으로, 10년 넘게 ITA를 이끌어 왔다. 그리스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동안 다양한 혁신 제품과 스핀오프(Spin Off) 업체가 나왔다. '빛나는 대리석'은 하나의 예다. 섬유와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건축 현장, 의료, 전자 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 섬유 기술이 쓰인다. 

 

그리스 교수는 "기존 시장에 있는 제품을 우리 제조기술을 통해 자동화하거나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만드는 등 산업과 밀접하게 소통하면서 기술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ITA는 기업과 연구소가 밀착해 기술을 개발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실제 사례를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주 미세한 신호를 무선으로 주고 받는 로컬 커뮤니케이션(지역 내 통신)에 적합한 전자회로 내장 소재가 조만간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혁신 사이클을 장기적으로 보지만 축적된 기술 중에 당장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찾는다. 

 

소비 트렌드도 그리스 교수의 관심사다. 그는 "폴리에스터 티셔츠보다 친환경 소재인 '비스코'를 사용한 티셔츠를 제조하면 실 가격만 10유로센트 비싸다"며 "그렇지만 비스코 티셔츠 수요가 늘고 있는 건 단순히 가격, 생산성뿐만이 아닌 다른 요인이 소비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산업계와 연구소간, 소비자와 산업계 및 연구소간 오픈 이노베이션이 이뤄지는 셈이다.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학위나 논문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 그리스 교수는 "아헨 공대에서는 논문 숫자는 아예 평가 항목에서 빠져있다"며 "응용 가능한 기술을 발표하는 게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기업과 산학 연구를 통해 오픈 이노베이션을 이끌어내는 것을 학교 차원에서 장려한다.  

 

아헨 공대는 오는 2020년까지 '학제간 융합 기술 대학(Integrated Interdisciplinary University of Tech)'을 실현한다는 게 목표다. 공과대학이라도 다양한 전공의 연구원을 영입해 협업한다. 예를 들어 팀원이 6명이라면 기계공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심리학과, 사회학과 등 문이과를 망라한 다양한 전공자가 모인다. 한 전공에만 집중하는 게 기술 개발에 오히려 불리하다는 평가다. 실제로 ITA에도 경제학과, 심리학과 등 문과 전공 연구원이 각 팀마다 배속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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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그리스 ITA소장(오른쪽)과 김현지 Dream 2 Lab 2 Fab 연구원.

 

<아헨공대는>

 

아헨 공대는 섬유, 채굴, 철강을 연구하는 폴리테크닉스쿨로 출발해 20세기 중반부터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아헨시 전체 인구 25만명 중 아헨공대 학생, 연구원, 교직원이 4만3000명으로 아헨 전체가 대학 도시라고 볼 수 있다. 연간 예산은 8억4000만유로(약 1조원)으로, 아헨시 예산 7억유로보다 아헨 공대 예산이 많다.

 

학생 비중은 공학 57%, 자연 23%, 의학 및 치의학 7%, 인문ㆍ사회ㆍ경제 13%다. 최근 문과 비중을 점점 늘리고 있다. 

 

캠퍼스는 '멜라틴 캠퍼스' 외에 새롭게 '캐퍼스 웨스트'를 구축해 산학연 클러스터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클러스터에는 아헨 공대 연구소의 클러스터 기업뿐만 아니라 아헨 공대, 캠퍼스 내 프라운호퍼 및 막스플랑크 연구소 등과 협업하기 위한 기업들이 전세계에서 지사를 두고 있다.

 

ITA는 1934년 설립됐다. 라이선스나 공동개발, 기술이전을 위해 ITA GmbH라는 별도 법인을 두고 행정 처리를 하고 있다. 대부분이 연구개발(R&D)는 본원에서 이뤄지지만 ITA아우그스부르크(탄소섬유, 재활용 연구), 아헨-마스트리히연구소(바이오 소재 연구) 등을 별도로 두고 있다. 한국과는 'Dream 2 Lab 2 Fab'이라는 전자, 소재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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