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VR)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공상과학(SF) 소설이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 현실과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매체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고전 신화에서 보듯, 비현실을 상상하고 꿈꾸는 건 인간의 속성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 VR이 주목 받는 이유는 디스플레이와 기계장치를 이용한 오감(五感)형 VR이 조만간 구현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기술 기업들이 바라볼 수 있는 큰 시장이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 차세대 산업을 꼽을 때 VR은 빠지지 않는다. 

막상 기대보다 VR 기기 종류나 관련 시장은 아직은 그리 크지 않다. 사회ㆍ문화적, 기술적으로 풀리지 않는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VR이 해결해야 할 숙제들을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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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로 보는 세상. /오큘러스 홈페이지 제공

 

 

삼성도 갸우뚱? VR 전용 콘텐츠 부족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VR 관련 업체에 투자 해왔다. 면면을 보면 포브(눈동자 움직임 추적), 버블(360도 카메라), 8i(콘텐츠 제작도구), 인터루드(콘텐츠), 바오밥스튜디오(콘텐츠), WEVR(콘텐츠 공유 플랫폼) 등이다. 눈동자 추적 기술 외에는 모두 콘텐츠 생산이나 유통과 연관된 업체다. 

삼성의 투자 전략이 의미하는 바는 디스플레이 기반 산업은 콘텐츠 없이는 꽃필 수 없다는 점이다. 삼성은 이미 3D TV, 스마트 TV 등에서 쓴 맛을 본 경험이 있다. 콘텐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기 경쟁은 사실상 무의미 하다.

콘텐츠가 충분하지 않고 콘텐츠 제작 생태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는 대기업 하나가 고군분투 한다고 시장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삼성 무선사업부 내에서 VR 개발을 담당하는 기술전략팀장은 전무급이다. 통상 핵심 제품은 마케팅은 사장ㆍ부사장이 직접 챙겼던 것과는 위상이 다르다.  

VR 관련 협력업체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VR에 대해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며 "시장성에 대해서도 아직 확신을 못 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기기 및 시장 규모, HMD는 '구글 글래스' 넘을 대안 되나

대표적인 VR 기기는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HMD)다. 눈에 장착하면 큰 디스플레이 없이도 몰입감을 느낄 수 있고, 사람 몸의 움직임에 따라 화면도 360도로 변하기 때문에 실감 영상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다.

하지만 HMD는 단점이 있다. 기기를 쓰고 있으면 앞을 볼 수 없어 이동에 제약이 있고, 무거워서 장시간 착용하기 불편하다. 시각 외에 다른 감각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VR의 일종인 4D 체험관은 시설 투자가 필요하고, 휴대성이 떨어진다. 손 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홀로그램 기기 등을 상상해볼 수 있지만 아직 디스플레이 기술이 매끈한 홀로그램을 구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안경 형태로 쓰는 VR 기기는 이미 구글글래스가 실패를 맛본 바 있다. 증강현실(AR)와 VR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제품이지만 콘텐츠 수급, 사생활(프라이버시) 침해 문제, 기술 미비 등 여러 요인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스마트폰 시장을 연 애플 '아이폰'처럼 폭발력을 갖춘 VR 기기가 등장해야 본격적인 시장 확대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콘텐츠ㆍ서비스를 제외한 VR 하드웨어 시장은 고성장하고 있지만 전망치를 보면 스마트폰에 비해 규모가 턱없이 작다. 시장조사업체 IDC는 올해 VR 기기 출하량은 960만대, 오는 2020년에는 183% 성장한 6480만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NH투자증권은 올해 1400만대가 출하되고, 2020년 3800만대 규모로 신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스마트폰 업체로서는 VR에 집중 투자를 하기보다 당분간 기존 스마트폰 시장을 최대한 지키는 게 유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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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VR 기술 홀로그램. 

 

 

인지 부조화와 멀미현상

시장 확대를 위해서는 기술적으로도 개선할 점들이 남아 있다. 특히 VR 주요 활용처로 꼽히는 게임, 교육 등에 실제 적용하는 데 인지부조화 현상은 큰 걸림돌이다.

멀미가 나는 이유는 귓속에 평형감각을 느끼는 기관(반고리관, 전정기관)이 인식하는 감각과 눈으로 보는 것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3D TV가 실패한 주요 요인 중 하나도 시각을 왜곡시켜 현기증을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TV에 비해 더욱 몰입감을 높여주는 VR은 'VR멀미(VR-Sickness)'라는 증상까지 만들어냈다.

사람의 미묘한 움직임에 따라 화면이 따라가는 VR 기기는 인지부조화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빨리 화면을 전환해줘야 멀미를 줄일 수 있다. 이 때문에 VR 기기 업체들은 디스플레이가 화면 하나를 띄워주는 프레임 속도(Frame rate)를 초당 60프레임(fps) 또는 90fps 이상으로 높이고 있다. 

프레임 속도를 높이면 GPU의 데이터 처리량이 그만큼 증가하고, 메모리 사용량도 늘어난다. 비용은 덩달아 상승한다. 최대한 실제에 가깝게 구현해야 멀미가 나지 않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콘텐츠를 즐기고 싶어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문제도 생긴다. 

콘텐츠 제작비 역시 오를 수밖에 없다. 고선명(FHD) 카메라가 구현하는 30fps는 VR에 적합하지 않아 별도 콘텐츠를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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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괴리감을 없애기 위한 주요 기술 중 하나인 광 추적(Ray-Tracing) 기술. 

자연광에 가까운 빛을 연출할 수 있지만 GPU 개선이 필요하다.


광과민성 발작

일명 '포켓몬 증후군'으로 불리는 광과민성 발작은 불규칙적으로 깜박거리는 빛에 노출됐을 때 구토 증상을 일으키는 증상이다. 1994년 일본에서 포켓몬스터 초기 애니메이션을 보던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매스꺼움을 느끼고 사망자까지 발생한 사건이 발생한 뒤 널리 알려졌다.

당시 빨간색과 파란색 화면이 플래시처럼 번갈아가며 몇 초간 이어졌다.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지만 뇌가 자극을 받아 뇌전증으로 이어진 것이다. TV와 달리 눈 돌릴 곳이 없는 VR 기기는 광효과(light effect)에 더욱 취약하다. 콘텐츠 기획부터 채색까지 기존 TV나 모니터와는 다른 기준과 문법이 필요하다.   

 

부정확한 동작 인식(Motion Tracking)

VR기기는 자이로센서를 내장하거나 스마트폰에 있는 센서를 이용해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한다. 이 신호를 받은 프로세서가 실시간으로 화면을 전환해 줘야 이물감 없이 가상현실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데이터를 주고 받는 시간에는 어느정도 오차가 생기고, 센서가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100% 감지할 수 없다는 것도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센싱 능력 때문에 인지부조화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픽프로세서(GPU) 전문업체 실리콘아츠 윤형민 대표는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기관 전체를 가상 세계처럼 느끼게 하는 4D 기술을 함께 접목해 감각을 분산시키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며 "그렇다 해도 머리의 움직임과 화면 움직임이 미세하게 불일치하면 우리가 느끼지 못하더라도 피로도는 급격히 상승한다"고 설명했다.   

VR는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홀로그램 등 다양한 기술과 결합하면서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하지만 콘텐츠 생태계가 없고 사람의 인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들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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