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 소재생산기술원(PRI)은 LG그룹 계열사들과 거래하기 위한 관문이다. 그런 PRI를 국내 중소⋅중견 장비업체들은 탐탁치 않게 여긴다. PRI를 거치지 않고도 LG디스플레이⋅LG이노텍과 직거래 할 수 있는데, 불필요한 단계를 늘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품목마다 다르지만 PRI를 통해 LG디스플레이⋅LG이노텍과 거래하면 장비 가격의 5~10% 정도는 PRI 몫이다. 그러나 일부 배터리용 장비 업체는 “LG에너지솔루션 만큼은 직거래보다 PRI를 통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배터리 장비 회사들이 LG에너지솔루션 직거래보다 PRI를 통한 거래를 선호하는 건 협력사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LG에너지솔루션의 결제조건 탓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여타 장치산업 관례와 달리 30% 잔금(AT, Acceptance test) 조건을 고수한다. 잔금은 생산설비가 입고된 뒤 제대로 가동되는지 보고 지급하는데, 수령하는데 길게는 1년 이상 걸린다.
물론 다른 장치산업에도 잔금 조건은 있다. 통상 10%의 대금을 묶어뒀다가 양산 통과 시점에 지급한다.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이 잔금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게 문제다. PRI를 거쳐 LG에너지솔루션에 장비를 공급하면 비록 마진에서 다소 손해를 보지만 잔금 비율을 10%로 줄일 수 있다. 장비업체들이 PRI를 거쳐 LG에너지솔루션에 장비를 공급하는 게 오히려 낫다고 말하는 이유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장치산업에 잔금 10% 관례가 생긴데는 다 이유가 있다. 통상 장비업체가 제품을 팔아 남기는 이윤이 10% 안팎이다. 여기에 맞춘 것이다. 장비 성능이 기대에 못미쳐 대금 지급이 지연되더라도 중소⋅중견기업 자금 경색을 방지할 수 있다. 납품 시점에 받은 90% 제품값으로 2⋅3차 협력사에 자재 대금을 치르고, 직원들 인건비도 지급할 수 있다.
잔금 비율이 30%라면, 이윤 10%를 제외한 나머지 20%에 대한 자금 부담은 중소⋅중견기업이 짊어져야 한다. 장비 수주를 많이 할수록 부담은 더 커진다. 중국 BOE조차도 장비 잔금은 10%만 남긴다.
물론 LG에너지솔루션도 지속적인 설비투자 때문에 자금 여력이 크지 않다. 구두형태지만 협력사들에게 “회사를 상장해서 자금 여력이 생기면 잔금 비중을 낮춰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배터리 장비 업계는 이 약속을 기다릴 만큼 여유롭지 않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사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영세한 탓이다. 배터리 설비 투자 붐이 일어난 지 불과 2~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상장사도 드물다. 상당수는 투자가 실종된 디스플레이 업계서 넘어온터라 자금 여력이 더욱 열악하다. 일부 설비 업체들은 “수주를 위해 증자를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최근 LG는 그룹 전반적으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가속화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도 ESG 경영 일환으로 2030년까지 전 사업에서 사용하는 전력을 100%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기로 했다. 국제 친환경 캠페인 ‘RE100’에도 가입했다.
RE100 가입이 ESG 경영 중 E(환경)를 충족하는 것이었다면, S(사회)는 협력사들을 위한 지원으로 채웠으면 한다. 기업도 사회의 일원이고, 협력사와 구성원들의 안녕에 이바지하는 게 결국 사회를 위한 길이다.
그 첫 단추가 글로벌 선진 기업에 걸맞지 않은 30% 잔금 관행을 뜯어고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