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저전력 소형 범용 FPGA에 집중
출하량 기준으로는 업계 1위... 연평균성장률도 가장 높아

어느 반도체나 그렇겠지만,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업계는 특히 성능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태생부터 그럴수밖에 없었다. 특정 기기에서 특정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과 달리 FPGA는 광범위한 기기에, 다양한 역할을 하도록 설계됐다. 보다 많은 영역을 고려해야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능이 뒷받침돼야했고 칩 크기와 전력 소모량도 컸으며 가격도 비쌌다.

그런만큼 FPGA는 주로 연구개발(R&D)이나 항공우주·방산 등 제한적인 영역에 사용돼왔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슈퍼컴퓨팅(HPC)·네트워크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지만, 주로 고성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여전하다. 

FPGA 시장 4위인 래티스반도체의 전략은 조금 다르다. 자일링스·알테라(인텔) 등 업계 선두주자들이 고성능 시장에서 치열하게 맞붙을 때, 래티스반도체는 이들이 더 이상 눈여겨 보지 않는 소형 저전력 FPGA 제품군을 겨냥한다. 출하량 기준으로 이 회사가 FPGA 업계 1위인 건 이 덕이다.

 

경쟁사가 수 년만에 신제품 하나 내놓을 때, 래티스는...

실제로 매년 고성능 FPGA를 출시하는 자일링스와 인텔 등 선도 FPGA 업체들은 중저가 제품군의 경우 수 년마다 한 번씩 신제품이 나올 정도로 출시 주기가 길다.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래티스반도체는 이 빈 자리를 노렸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말 설계 전략을 단일 제품 개발이 아닌 플랫폼 개발로 완전히 선회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래티스반도체는 지난해 설계 및 출시 전략을 대폭 수정하면서 '넥서스' 플랫폼을 발표했다./래티스반도체

이전까지는 각 단일 제품에 필요한 아키텍처와 코어 등을 일일이 개발해야해 신제품 출시 주기가 길었다. 하지만 아키텍처와 공정을 공유하는 하나의 플랫폼을 개발하고 코어 배열, 다이(die) 크기 등을 바꿔 신제품을 내게 된다면 제품 출시 주기를 줄일 수 있었다. 

넥서스(Nexus) 플랫폼은 이같은 전략 아래 나온 첫 번째 플랫폼으로, 삼성전자의 28나노 완전공핍형 실리콘온인슐레이터(FD-SOI) 공정 기술을 쓴다. 넥서스 플랫폼의 첫 제품인 ‘크로스링크-NX’가 출시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래티스반도체는 두 번째 제품 ‘셀터스(Certus)-NX’를 내놨다.

주주 조이스(Juju Joyce) 래티스반도체 Certus-NX 제품 마케팅 매니저는 KIPOST와의 인터뷰에서 “넥서스 플랫폼의 제품들은 28나노 FD-SOI 공정 기술 외 입출력(I/O), 코어 패브릭 블록 등을 공유한다”며 “설계자산(IP) 간 재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제품을 보다 빠른 개발 주기로 발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셀터스-NX의 경쟁 모델로 꼽히는 건 자일링스의 ‘아틱스(Artix)-7’과 알테라(인텔)의 ‘사이클론(Cyclone) V GT’로, 지난 2012~2013년 출시됐다. 

각각 자일링스와 알테라가 고성능 FPGA에 넣기 위해 개발한 IP를 일부 수정한 버전이기 때문에 밀도와 I/O가 최적화되지 않았지만, 대체재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틱스와 사이클론 모두 I/O 밀도는 1㎟ 당 1.1개에 불과하고 I/O 속도도 최대 1.25Gbps에 그친다.

 

래티스반도체는&nbsp;'넥서스(Nexus)' 플랫폼의 두 번째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제품군 '셀터스(Certus)-NX'를 출시했다./래티스반도체<br>
래티스반도체는&nbsp;'넥서스(Nexus)' 플랫폼의 두 번째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제품군 '셀터스(Certus)-NX'를 출시했다./래티스반도체<br>

셀터스-NX는 처음부터 목표 밀도 범위와 I/O 특성에 최적화되도록 설계됐다. 패키지 크기는 6×6㎜에 불과하지만 1㎟ 당 2.3개의 I/O가 있고, I/O 당 속도도 1.5Gbps에 달한다. 그럼에도 전력소모량은 경쟁 제품 대비 4분의1밖에 되지 않는다.

CMOS 공정 대비 전류 누출(Leakage)에 자유롭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소프트오류율(SER)이 낮은 FD-SOI 공정을 사용한다는 것도 강점이다. 소프트오류는 반도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오류로, 제품을 고장내기까지 해 최근 자동차·산업설비 등 업계에서 제품 신뢰성의 주요 요인으로 보고 있다.

주주 매니저는 “자일링스의 아틱스 7과 인텔의 사이클론 V GT는 5G PCIe를 지원하는 최신 제품이자, 래티스반도체의 ‘셀터스’와 비교가능한 경쟁 제품”이라며 “셀터스는 패키지 설계에 있어서도 각 패키지에 가능한 많은 I/O를 결합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1순위는 범용성

FPGA는 애초에 여러 영역에 쓰일 수 있도록 개발됐기 때문에 그 어떤 반도체보다 범용적이다. 하지만 선도 업체들은 전력소모량과 성능을 최적화한다는 목적으로 AI·통신 등 각 용처별로 제품을 내놓고 있다.

래티스반도체는 FPGA 본연의 특징인 범용성에 초점을 맞춘다. 고성능 FPGA 시장에는 범용성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엣지 단말기, 산업 장비, 내장형 비전 시스템 등은 최적화보다 범용성이 더 중요하다. 성능보다는 비용과 전력소모량에 민감하며, 제품 출시 주기도 짧은 편이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SW) 솔루션도 범용성을 기준으로 업데이트한다. 이 회사는 매년 상·하반기 FPGA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는데, 올해 상반기에만 두 개의 소프트웨어와 함께 소프트웨어설계도구(SDK)인 ‘라디안트 2.1’ 버전을 발표했다.

 

래티스 프로펠 설계 환경./래티스반도체
래티스 프로펠 설계 환경./래티스반도체

회사가 발표한 소프트웨어 스택은 임베디드 비전 시스템용 ‘mVision’과 ‘프로펠(Propel)’이다. 

특히 프로펠은 오픈소스 하드웨어 아키텍처(ISA)인 RISC-V를 지원하며 단일 툴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설계를 모두 지원하기 때문에 하드웨어 설계가 끝난 다음에서야 소프트웨어 설계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설계 과정 상당 부분을 자동화해 개발 주기도 줄일 수 있다.

로저 도(Roger Do) 래티스반도체 설계툴 제품라인 매니저는 “초보 FPGA 개발자라면 드래그-앤-드롭 방식으로 간단하게 원하는 IP를 설계에 더할 수 있고, 베테랑 개발자라면 설계 최적화를 위해 스크립트(Script) 단계에서 이 툴을 쓰거나 할 수 있다”며 “프로펠은 개발자들에게 FPGA 개발을 간소화하게 해주는 래티스의 노력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지난달에 업그레이드된 라디안트(Radiant) 2.1 버전은 언어 범용성을 대폭 확대했다.

FPGA는 보통 C언어 기반의 베릴로그(Verilog) 혹은 에이다(ADA) 기반의 VHDL(VHSIC Hardware Description Language) 언어로 설계된다. 두 언어 모두 설계에는 유용하지만, 검증 때는 별도 검증 언어로 변환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라디안트 2.1 버전에서는 기존 베릴로그, VHDL 언어에 설계와 검증을 모두 할 수 있는 시스템베릴로그(SystemVerilog) 언어를 추가했다. 시스템베릴로그는 주로 검증에 쓰여왔지만 최근 개발 주기를 줄이고 언어 변환의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설계에서도 수요가 커지고 있다.

로저 매니저는 “Radiant는 설계 분석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코드에서 발생하는 오류나 경고를 쉽게 찾아 수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며 “라디안트 합성 툴은 부적절한 설계 사용에 대한 경고뿐 아니라, 코드 구문 상의 오류에 대해서도 VHDL과 Verilog를 동등하게 분석하고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래티스반도체는 살아남았다

FPGA 시장은 운신의 폭이 좁다. 자일링스·인텔이 지난 2018년 기준 전체 시장의 85% 가량을 점유하고 있고, 3위인 마이크로칩과 4위 래티스반도체는 합쳐봐야 10% 남짓에 그친다. 1, 2위 업체와 나머지 업체 간 격차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그래서 3, 4위인 마이크로칩과 래티스반도체는 각각 우주·방산, 범용 FPGA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범용 FPGA는 경쟁사들이 거의 신경쓰지 않는 작은 시장이다.

그 덕에 래티스반도체는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4개사만 놓고 보면 이 회사의 연평균성장률(CAGR)이 가장 높고, 지난해에도 전년 대비 순이익만 87.7% 성장하는 성과를 냈다.

FPGA 업계 상위 4개사 매출액 추이 및 연평균성장률./자료=가트너 및 파울 딜리엔(Pual Dillien), KIPOST 취합
FPGA 업계 상위 4개사 매출액 추이 및 연평균성장률./자료=가트너 및 파울 딜리엔(Pual Dillien), KIPOST 취합

물론 범용 FPGA 시장만 겨냥한다면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다. 자동차·통신·산업 장비 등에서 고성능이 아닌 저전력 범용 FPGA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건 좋은 신호지만, 이 시장에서는 전용 반도체(ASIC) 업체들과 맞붙어야한다. 

그럼에도 지난 2018년 부임한 짐 앤더슨(Jim Anderson) 래티스반도체 최고경영자(CEO)가 온 뒤 래티스반도체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더 확고해졌고, 단일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솔루션 업체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만 하다.

짐 앤더슨 CEO는 인텔, AMD 등을 거친 IT 업계 베테랑이지만, FPGA와 관련한 직무 경험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는 부임 후 FPGA 업계 전문가들로 임원진을 대폭 교체하고 제품 개발 및 출시 전략을 모두 바꾸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래티스의 가장 큰 장점은 범용 FPGA라는 점”이라며 “최근 자동차 티어원 업체들이나 가전 기기 업체들처럼 반도체 개발에 익숙치 않은 업체들이 ASIC에서 벗어나 독자 칩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용 FPGA 솔루션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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