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형 대신 중앙 집중형 전자 아키텍처로 업계 '롤모델' 등극
HW 3.0 전자 플랫폼 내 통합 ECU와 소프트웨어도 자체 개발
기존 공급망 대폭 변화 예상... 완성차-티어1간 눈치싸움 치열

불과 8년이다. 지난 2012년 처음 모델S를 출시할 때만 해도 곧 망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테슬라는 이달 초 완성차(OEM) 업체 중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8년 전 당시 완성차 업체들은 테슬라를 ‘자동차 업체가 아닌 IT 업체’라고 혹평했지만, 오히려 이 점 덕에 테슬라는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제 완성차 업계의 롤모델은 테슬라다. 특히 이들이 주목하는 건 테슬라의 전자 아키텍처다. 

 

단 3㎏로, 1847㎏의 차를 제어한다

테슬라 2019년형
테슬라 2019년형 모델 S./테슬라

테슬라 전기차의 핵심은 중앙 집중형 전자 아키텍처다. 지난해 출시된 테슬라 차량의 ‘하드웨어(HW) 3.0’ 전자 플랫폼은 완성차 업계가 그려오던 이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테슬라의 중앙 집중형 전자 아키텍처는 극도로 단순하다. 각 부품·기능별 전자제어장치(ECU) 대신 첨단운전자지원시스템(ADAS), 인포테인먼트 등 기능별 통합 제어 ECU를 자체 개발해 적용했다. 그 결과 수십 개의 ECU를 수 개의 ECU가 대체했고, 와이어링 하네스 길이도 절반 이하로 줄었다. 테슬라의 ECU 보드 무게는 총 3㎏가 채 되지 않는다.

테슬라를 제외한 나머지 OEM들은 아직 스파게티처럼 얽히고설킨 전자 아키텍처를 쓴다. 부품·기능별 ECU를 각각 장착하고 이를 와이어링 하네스로 각각 부품과 연결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차량 내에는 보통 60~100개의 ECU가 들어가고 와이어링 하네스도 길이만 최대 3㎞에 달한다.

 

현대차에 따르면 1500㎏ 승용차의 무게를 약 10% 줄일 경우 연비는 3.8%, 가속 성능은 8% 증가한다. 제동 거리는 5% 감소하며, 가솔린 차량의 경우 배기가스 배출량이 최대 8.8%까지 줄어든다. 차체 내구 수명은 1.7배 늘어난다./HMG저널

차량에 탑재되는 전장 부품과 ECU 수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ECU와 전장 부품을 연결하는 와이어링 하네스가 길어질수록 차량 무게는 증가한다. 차량 무게는 연비부터 가속 성능, 차체 수명 등에 모두 영향을 준다. 자동차 업계가 전자 아키텍처를 단순화하려는 건 이 때문이다.

와이어링 하네스 무게는 거의 50㎏에 육박하고, ECU 또한 소자(Discrete) 형태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인쇄회로기판(PCB)에 장착돼 보드 형태로 탑재되기 때문에 무게가 만만치 않다. 와이어링 하네스와 ECU 보드 등을 모두 합치면 거의 60㎏에 육박할 정도다.

업계 관계자는 “테슬라의 모델 S 출시 한참 전부터 자동차 업계에서 중앙 집중형 전자 아키텍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며 “모두가 중앙 집중형 아키텍처의 효율성을 알고 있지만 기존 공급망에 주는 영향도 크고, 자체 기술력도 떨어져 쉽사리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탄탄한 공급망이 되려 발목을 잡았다

실제 자동차 업계가 통합 ECU 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건 지난 2010년 전후다. 당시 완성차 업계는 ADAS와 인포테인먼트 기능이 추가되면 해당 기능을 구동하는 ECU를 구매, 추가하는 식으로 신차를 개발했다. 그러다보니 차량 내 ECU 개수는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15년 전략 컨설팅 업체 롤랜드버거(Roland Berger)에 따르면 차량 내 ECU의 평균 개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었다./롤랜드버거
지난 2015년 전략 컨설팅 업체 롤랜드버거(Roland Berger)에 따르면 차량 내 ECU의 평균 개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었다./롤랜드버거

무게도 무게지만 단가도 문제였다. 디지털 콕핏을 구현하는 ECU는 당시까지만 해도 개당 150달러(약 18만원)에 달했다. 차량 내 인포테인먼트(IVI), 텔레매틱스 제어장치(TCU), 계기판 및 라디오 등 각각을 제어하는 ECU를 별도 구매하면 거의 800달러(약 96만원) 이상이 필요했다. 

ECU 개수가 늘어날수록 설계도 복잡해졌고, 기존 분산형 전자 아키텍처로는 트래픽 증가로 인한 부하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당시 ADAS·인포테인먼트 기능을 고도화한 자동차들이 데스크톱PC나 스마트폰처럼 빠르게 추가된 기능을 구현하지 못했던 이유다.

중앙 집중형 전자 아키텍처 설계는 분산형 아키텍처보다 단순하다. 분산형 아키텍처는 정해진 공간 안에 보드와 부품을 집어 넣고, ADAS 기능의 경우 신호가 오가는 거리와 데이터 속도까지 감안해 이를 배치해야한다. 반면 중앙 집중형 아키텍처는 기능별로 통합 ECU를 쓰고 개수도 많지 않아 공간 제약에 대한 고민을 덜 해도 된다.

이처럼 경제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중앙 집중형 아키텍처가 훨씬 효율적이었지만 문제는 공급망이었다. 

 

자동차 산업의 가치사슬 구조./University of St. Gallen, Institute of Information Management

자동차 산업은 견고한 공급망을 바탕으로 성장해왔다. 아키텍처를 바꾸게 되면 ECU 공급 업체부터 와이어링 하네스, PCB, 수동소자, 모듈 조립 등 관련 공급망 전체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ECU 공급 업체에게는 단순히 물량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시장 성격이 바뀐다.

차량 전장화가 가속화되면서 ECU 업체들의 힘은 완성차 업체보다 커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드웨어를 만드는 것도,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도 ECU 업체들이기 때문이다. 콘티넨탈·보쉬·덴소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통합 ECU는 얘기가 다르다. 통합 ECU를 기능별로 개발한다고 쳐도, 모든 ADAS 기능을 하나의 ECU에, 모든 인포테인먼트 칩을 하나의 ECU에 넣는 건 어렵다. ADAS의 경우 부품과 부품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기능을 구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 늘어나게 되고, 이는 곧 신뢰성과 안전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완성차 업체의 설계에 따라 통합 ECU에 어떤 기능을 넣을지가 달라진다. ECU 업체 입장에선 개발 역량을 각 완성차 업체별로 분산시켜 맞춤형 솔루션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각 기능에 대한 소프트웨어(SW) 역량 없인 그저 하드웨어 주문 제작 업체에 그치게 된다. 완성차 업체가 아닌 ECU 업체들이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업체가 되는 셈이다. 실제로 테슬라의 HW 3.0에 들어간 SW는 테슬라가 직접 개발했다.

업계 관계자는 “테슬라가 아키텍처를 과감히 바꿀 수 있었던 건 신경써야 할 공급망이 없는, ‘신생 기업’이었기 때문”이라며 “테슬라는 통합 ECU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를 자체 개발했고, 그래서 테슬라 차량을 뜯어보면 타사의 로고가 박힌 부품·기판보다 테슬라의 로고가 박힌 부품·기판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미래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 문제는 언제

테슬라는 지난 2015년 1세대 중앙집중형 전자 플랫폼 ‘하드웨어(HW) 1.0’을 도입한 후 2~3년마다 버전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지난해 출시된 테슬라 차량에는 HW 3.0이 들어갔다. HW 3.0의 핵심은 인공지능(AI) 기능을 담은 자체 ‘자율주행(FSD)’ 시스템온칩(SoC)이다. 이전 HW 2.5에는 엔비디아의 SoC 3개와 인피니언의 마이크로제어장치(MCU)를 썼지만, 이번에는 SoC를 직접 개발해 적용했고 이를 통해 단가를 낮췄다. 

 

▲테슬라의 FSD 칩. 파란색이 NPU 블럭, 분홍색이 GPU 블럭, 초록색이 메인 CPU 블럭이다./유튜브 캡처, KIPOST 수정
▲테슬라의 FSD 칩. 파란색이 NPU 블럭, 분홍색이 GPU 블럭, 초록색이 메인 CPU 블럭이다./유튜브 캡처, KIPOST 수정

테슬라는 FSD 칩이 현재 부분 자율주행(SAE 2단계)부터 미래 완전 자율주행까지 구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드웨어 세대 변경 없이 자율주행까지 지원하겠다는 건 차량 소프트웨어를 무선으로 업데이트하는 OTA(Over the air) 덕이다. 

분산형 전자 아키텍처도 OTA가 불가능하진 않지만, 각 부품 소프트웨어가 업그레이드될때마다 OTA를 해줘야하고 부품별 소프트웨어가 충돌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크다. 반면 중앙 집중형 아키텍처는 애초에 통합 SW로 개발되기 때문에 이같은 염려가 적다.

테슬라의 시도가 성공하면서 폴크스바겐, 현대기아차 등 다른 자동차 OEM들도 중앙 집중형 차량 아키텍처에 대한 양산 준비를 본격화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지난해 말 생산을 시작한 신형 전기차 ‘아이디(I.D.)’부터 새로운 전자 플랫폼 ‘E3(Ene-to-End Electronics)’를 채택했다. ‘E3’는 70여개의 ECU를 통합해 3개로 줄이고, 고성능 컴퓨팅을 하는 중앙 ECU를 별도로 장착한 중앙 집중형 차량 아키텍처다. 중앙 ECU는 콘티넨탈이, 나머지 ECU는 르네사스가 공급했다고 알려졌다.

현대기아차는 최근 닛케이오토모티브의 테슬라 모델 S 분석 보고서를 번역, 남양연구소 등 연구개발(R&D) 인력에 배포하고 이를 벤치마킹해 차세대 차량 개발에 반영하도록 했다. 

업계는 기존 OEM들이 테슬라만큼의 고도화된 전자 아키텍처를 완성하는 데 5년여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콘티넨탈과 보쉬가 소프트웨어 인력을 대거 영입하는 등 공급망 업체들이 대비를 하고 있지만, OEM도 소프트웨어 및 전자 기술력을 확보해 기술 주도권을 잡으려는 노력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전자 아키텍처가 차량의 핵심이 된 만큼 OEM과 티어원 업체들 간 알력 싸움이 치열하다”며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는 이미 인포테인먼트 시장 주도권을 애플·구글 등 플랫폼 업체에 내준 만큼 하드웨어 기술력은 뺏기면 안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글로벌 티어원 업체들도 죽기살기로 덤벼들고 있어 시장이 안착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듯”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KIPOST(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