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리는 생각 외로 타격 적어... 이미 6개월치 물량 선주문
AP·모뎀 외 반도체 협력사들 발등에 불... 장비 업계도 곤혹

 

미국이 화웨이를 향해 또다시 강도 높은 규제안을 발표하면서 각 업계에 미칠 후폭풍에 관심이 쏠린다.

당장 이번 규제가 겨냥하는 건 미국 반도체 업체들이 만든 장비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TSMC, 삼성전자 등의 파운드리 업체지만, 정작 피해를 입는 건 파운드리를 제외한 화웨이의 반도체 협력사들이다.

한때 중국 반도체 시장 공략에 열을 올렸던 미국 반도체 장비 업계도 추가 규제로 중국 사업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한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이 단기적 수혜를 입을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장비 기술 내재화에 대한 수요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한층 강해진 규제, 이번엔 반도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4일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진=폭스비즈니스 캡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4일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진=폭스비즈니스 캡처

1년 전, 미국 상무부 산업관리국(BIS)은 화웨이의 미국 안보 침해를 막겠다는 이유로 화웨이와 관계사 60곳을 제재 대상(Entity List)에 올렸다. 제재 대상 기업에 미국 수출관리규정(EAR) 대상 품목을 수출, 재수출, 이전 혹은 양도하는 경우 미 당국에 라이선스를 받아야한다.

EAR은 미국의 국가안보, 대외정책 등을 위해 특정 품목의 수출 및 재수출을 제한하는 전략물자 관리지침이다.

비단 미국 회사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 등 동맹국 내 업체들에게도 해당되는데, 부품 혹은 완제품에 사용된 기술이나 소프트웨어(SW)가 미국산일 경우 해당 제품의 전체를 미국산의 ‘재수출’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미국산 중고 장비 역시 미국산 제품으로 취급된다.(KIPOST 2019년 5월 21일자 <미국 상무부 EAR 최소편입비율 가이드라인> 참조)

지난 15일(현지시간) 산업관리국은 미국산 장비 및 소프트웨어로 생산되는 반도체를 제재 대상 수출 규제 품목에 추가하는 해외 직접 생산 규정(FDPR)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외국 파운드리 업체라도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의 장비와 소프트웨어로 화웨이의 반도체 자회사 하이실리콘의 칩셋을 생산하려면 미 당국에 라이선스를 받아야한다.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의 절반 가량을 미국 업체들이 차지하고 있고, 심지어 중국 SMIC의 생산라인도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장비로 채워져있는 마당에 이같은 규제는 사실상 하이실리콘이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길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같은 규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며 “궁극적으로는 하이실리콘이 반도체를 못 만들게 하겠다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득도 실도 없는 파운드리 업계

언뜻 보기에 이번 규제로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건 파운드리 업체들로 보인다. 앞서 설명했듯 미국산 반도체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반드시 써야만 하는 탓에 그 어떤 파운드리 업체들도 이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TSMC 로고. /TSMC 제공
▲TSMC 로고. /TSMC 제공

하지만 파운드리 업계는 당장 큰 영향이 없다.

화웨이는 지난해 제재 이후 하이실리콘이 설계한 반도체를 TSMC에 맡겨 생산, 활용해왔다. 하이실리콘은 지난해 연말 미-중 분쟁의 장기화를 염두에 두고 TSMC에 6개월치 물량을 한번에 주문했다. 상반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로 수요가 급감해 재고가 쌓여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올 한해를 버티기엔 문제가 없다.

TSMC 역시 해당 물량을 유예기간인 9월 전까지 납품하고 나면 굳이 화웨이에 추가 주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냉정하게 말해 화웨이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면 반드시 다른 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이 증가한다. 이들이 스마트폰에 넣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상당수의 핵심 부품 역시 TSMC가 만든다.

업계 관계자는 “화웨이가 못팔면 샤오미나 오포, 비보가 그 물량을 차지할 것이고, 이들이 쓰는 퀄컴 프로세서 역시 TSMC에서 생산된다”며 “중국 내에서는 자국 기업들의 인기가 더 높아 삼성전자 등 외국 스마트폰 업체가 받을 수혜는 크지 않다”고 말했다.

 

비보(vivo) X30 Pro 5G 스마트폰 이미지. /비보 제공
비보(vivo) X30 Pro 5G 스마트폰 이미지. /비보 제공

일부에서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가 수혜를 받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오지만 삼성전자 파운드리 생산라인 역시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장비로 채워져있어 규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섣불리 화웨이 물량을 가져오려 할 경우 오히려 미국 정부의 눈 밖에 날 가능성도 크다.

하이실리콘의 물량을 소화할만한 생산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의 7나노 이하 첨단 공정 생산능력은 300㎜ 웨이퍼 기준 약 6만장으로 추정된다. 하이실리콘이 보통 매월 2만장의 물량을 주문하는데, 기존 고객사들과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 등의 물량을 제하고 나면 겨우 수천장 여유가 남는다.

반도체 장비 업체 A사 대표는 “SMIC 역시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장비를 쓰고, 아직 첨단 공정도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라 수혜를 보기 어렵다”며 “파운드리 업계 입장에서는 득도 실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발등에 불 떨어진 SK하이닉스

오히려 타격을 입은 건 하이실리콘을 고객으로 둔 파운드리가 아닌, 화웨이의 IT기기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공급하는 협력사들이다. 제재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하이실리콘 없이 화웨이가 AP와 모뎀을 수급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고, 그러면 스마트폰 출하량도 급감할 게 뻔해 매출 타격이 불가피하다.

 

화웨이 P40 프로 티어다운. 스카이웍스, 퀄컴, 마이크론의 부품이 보인다./파이낸셜타임즈
화웨이 P40 프로 티어다운. 스카이웍스, 퀄컴, 마이크론의 부품이 보인다./파이낸셜타임즈

지난해 미국 제재 이후 퀄컴, 코보, 마이크론 등 일부 업체들은 미 당국에 라이선스를 얻어 화웨이에 부품을 공급했다. 화웨이는 AP와 모뎀 등 핵심 칩은 100% 내재화했는데, 이번 제재로 AP와 모뎀을 수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퀄컴과 미디어텍은 미국 기업이라 정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삼성전자 역시 미-중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는 상황에서 화웨이에 납품하긴 힘든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메모리 등 다른 부품 공급사들이다. 보통 메모리 등 기성 반도체는 2년 전, 이외 로직 반도체는 1년 전에 물량과 사양을 논의한 다음 개발을 시작한다. 이미 1년치 생산계획을 짜고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이실리콘이 지난해 말 주문한 6개월치 AP 및 모뎀이 100% 스마트폰으로 출시된다한들 협력사들은 나머지 6개월치 물량을 재고 손실로 떠안아야 한다.

SK하이닉스가 대표적인 예다. 애초에 SK하이닉스가 중국 우시에 메모리 생산라인을 세운 건 중국 최대 고객사인 화웨이의 요청 때문이었다. SK하이닉스의 매출 중 화웨이를 포함한 중국 매출은 지난 1분기 기준 44%에 육박했는데, 이 중 80~90%가 화웨이에 쏠려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업계 관계자는 “유예 기간인 120일 이내까지는 제품을 공급한다 하더라도 고객사 다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인데, 이미 다른 업체들은 마이크론, 삼성전자 등 다른 메모리 업체와 손을 잡고 있다”며 “메모리는 한꺼번에 수급을 한 뒤 1~2년 간 쓸 수도 있어 내년치 물량까지 한꺼번에 공급받을 순 있겠지만, 이 경우 생산계획을 아예 다시 짜야해 역시 쉽지 않다”고 말했다.

화웨이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개발한 칩/하이실리콘 제공

 

‘제1의 시장’에서 ‘이도저도 못한 시장’으로

미국 반도체 장비 업계도 당혹감을 내비친다. 중국 정부의 기반 기술 내재화에 대한 욕심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다. 반도체 장비가 하루아침에 개발되는 건 아니지만, 메모리가 그랬듯 시장에 불안감을 주기엔 충분하다.

지난 2015년 중국 정부가 반도체 기술 자립을 골자로 한 ‘중국 제조 2025’를 발표한 이후 장비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시장은 중국이었다. YMTC 등 잘 알려진 메모리 업체 외에도 중소 파운드리 업체가 우후죽순 들어섰기 때문이다. 램리서치·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KLA 등 미국 장비 업체들을 포함해 모든 장비 업계가 이 시장을 뚫기 위해 중국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해부터도 그랬지만, 이번 제재로 미국산 장비 자체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중국 내에서는 미국이 아닌 일본 및 한국 장비 업체들을 접촉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특히 값비싼 일본산 장비보다 값싼 한국산 장비를 선호한다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업게 관계자는 “작년부터 중국 업체들의 한국산 장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며 “국내 고객사들도 장비 업체들이 최신 장비보다 1~2세대 낮은 장비를 중국에 파는 것은 제재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우리나라나 일본 장비 업체가 수혜를 입을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장비 기술 독립에 나설 것이라고 업계는 관측한다.

아시아권 장비 업체들이 미국 장비 업체들만큼 넓은 제품 포트폴리오를 가진 것도 아닌데다 기술력도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메모리와 마찬가지로 로직 반도체 제조는 수입산, 특히 미국산 장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만 장비에 들어가는 주요 모듈과 부품은 미국 업체들이 주로 공급하고 있어 미국이 이를 손에 쥐고 있는 한 내재화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장비 업계의 태동이 그랬듯, 중국에서도 외국계 장비 회사 출신 엔지니어들이 중소규모 회사를 세워 기술 개발을 추진 중”이라며 “특허 장벽이 높고 기술이 까다로워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말 그대로 ‘시간’ 싸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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