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이니셔티브에서부터 삐걱... '공개 사용' 라이선스 한계
개발 역량도 부족... 경쟁사는 소프트웨어까지 통째로 제공

미국 인공지능(AI) 반도체 업체 웨이브컴퓨팅(Wave Computing)이 파산설에 휩싸였다. 

웨이브컴퓨팅은 밉스(MIPS) 아키텍처의 소유권을 가진 업체다. 이 회사는 지난 2018년 MIPS 아키텍처의 소유권을 사들인 후 일부 설계자산(IP)을 오픈소스로 제공한 바 있다. 

한때 Arm과 함께 양대 모바일 코어 아키텍처로 꼽혔던 MIPS 아키텍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의 몰락... 웨이브컴퓨팅, 파산 신청 검토

업계 및 외신에 따르면 최근 미국 법원에 회생파산(챕터 11)을 신청할 준비를 하고 있다. 회생 파산은 미국 파산법원의 감독 하에 구조조정 절차를 진행, 회생을 모색하는 제도로 국내로 따지자면 법정관리와 유사하다.

회생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웨이브컴퓨팅은 회사를 자발적으로 파산(Voluntary Petition)하거나 혹은 미 청산법원에서 이를 강제 파산(Involuntary Petition)시킬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회생에 실패할 경우 채무자의 남은 자산 및 현금을 우선 순위에 맞게 분배하는 청산 파산(Chapter 7)으로 넘어간다.

회생파산이 진행 중이어도 경영활동은 지속할 수 있지만, 고객사 입장에서는 리스크다.

 

MIPS 아키텍처 연혁. MIPS테크놀로지스에서 이매지네이션으로, 이매지네이션에서 탈우드로, 탈우드에서 웨이브컴퓨팅으로 넘어간 이 사업은 이제 어디로 향할까./KIPOST

웨이브컴퓨팅은 AI가 막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지난 2008년 AI 전문 반도체 업체로 설립됐다. 창업자는 중국계 미국 사모투자 기업 톨우드벤처캐피탈(Tallwood Venture)의 설립자인 다도 바나타오(Dado Banatao)와 피트 폴리(Pete Foley) 톨우드벤처캐피탈 임원이다. 두 사람 모두 벤처캐피탈 소속이지만 IT 업계에서 화려한 이력을 쌓아왔다.

톨우드벤처캐피탈은 지난 2017년 이매지네이션으로부터 MIPS 아키텍처를 인수했다. 당시 이매지네이션은 애플과의 그래픽처리장치(GPU) 공급 계약이 끝나면서 주가가 폭락했고, 결국 중국계 자본인 캐니언브릿지(Canyon Bridge)에 회사가 매각됐는데 이 과정에서 톨우드벤처캐피탈이 MIPS 아키텍처를 사갔다.

웨이브컴퓨팅은 톨우드벤처캐피탈이 MIPS 사업을 사들인 6개월 후인 2018년 이를 인수, IP 사업부로 만들었다. MIPS 아키텍처를 자사의 솔루션에 활용하는 동시에 IP 라이선스 비즈니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 해 웨이브컴퓨팅은 5번째 투자 라운드(series e)를 통해 8600만달러(약 1055억원)의 자금을 유치했다.

 

MIPS 아키텍처 비즈니스가 삐걱인 건 그때부터다. 인수 이후 고객사 확보에 난항을 겪은 웨이브컴퓨팅은 2018년 말 MIPS 아키텍처와 코어에 대한 접근 권한 일부를 무료 제공하는 ‘MIPS 오픈 이니셔티브’를 추진했다. 

겉으로는 오픈 소스라고 홍보했지만 활용 시 원 개발자가 규정한 특정 라이선스를 준수해야하는 ‘공개 사용’ 라이선스로 제공됐고, 이를 활용하는 개발자들은 MIPS 소스코드를 사용해 만든 어떤 기술도 특허를 출원하거나 주장할 수 없었다. 사실상 클로즈드 소스였던 셈이다.

결국 MIPS 오픈 이니셔티브는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바로 그 직전에는 IP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해오던 아트 스위프트(Art Swift) 웨이브컴퓨팅 최고경영자(CEO)가 선임된 지 4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에 회사를 떠났다. 당시 EE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단기 자금 조달 전략에 대해 위원회(이사회)와 뜻이 맞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는 “웨이브컴퓨팅이 MIPS를 인수한 다음 수익이 예상만큼 나오지 않자 다시 MIPS를 매각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며 “아트 스위프트를 포함, IP 사업부의 고위 경영진들도 MIPS에서 거의 손을 떼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또 주인 찾아 삼만리? 아니면 ...

웨이브컴퓨팅은 MIPS 코어를 DSP 블록에 활용할 계획이었다./웨이브컴퓨팅

그럼에도 웨이브컴퓨팅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건 MIPS 사업이다. 현재 웨이브컴퓨팅에는 100여명의 관련 인력이 남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업계는 웨이브컴퓨팅이 MIPS 사업을 매각하는 대신 MIPS 사업을 분리, IP 전문 회사를 세우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본다.

현재 MIPS의 주 고객사는 커넥티드 및 차량용 반도체 업계다. 인텔의 모빌아이가 MIPS 아키텍처로 첨단운전자지원시스템(ADAS)용 시스템온칩(SoC) ‘아이큐(EyeQ)’를 설계한다. 미디어텍은 차세대 커넥티드 제품에 MIPS를 활용할 계획이다. 발렌스(Valens) 또한 차량 내 네트워킹 제품에 MIPS를 쓴다.

하지만 MIPS를 재매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AI로 승부를 보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지속적으로 명령어 집합(ISA)을 확장해 기능과 성능을 강화해야한다. Arm은 자본으로, 오픈소스 아키텍처(ISA) 업계는 ‘오픈 소스’로 코어를 발전시켜나가고 있지만 웨이브컴퓨팅은 그럴 역량이 없다. 

업계 관계자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MIPS는 Arm과 어깨를 견주는 아키텍처였고, 심지어 한때는 Arm보다 적용처가 많았다”며 “그 후로 지금까지 매년 신규 코어와 ISA를 내놓으면서 시장 점유율을 키워온 Arm과 달리 MIPS는 빠르게 발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웨이브컴퓨팅은 MIPS 코어를 DSP 블록에 활용할 계획이었다./웨이브컴퓨팅

AI 업계에서도 자체 코어를 설계하는 게 대세가 됐다. 신경망(NPU) 코어는 내부적으로 개발하고 나머지 디지털신호처리장치(DSP) 등만 외부 코어를 라이선스하는 식이다. 웨이브컴퓨팅은 MIPS 인수 당시 MIPS 코어를 DSP 블록에 활용할 계획이었지만, 업계는 MIPS의 성능이 AI를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인지 의심한다.

그나마 MIPS 코어가 활약하고 있는 ADAS용 코어에서도 Arm이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모빌아이 덕에 웨이브컴퓨팅은 ADAS용 코어 IP 시장의 80%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최근 완성차(OEM) 업계가 탈(脫) 모빌아이 전략을 가속화하면서 입지가 위태롭다. 

실제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르네사스 등 기존 반도체 업체들은 Arm 및 비전 소프트웨어(SW) 업체 등과 협력해 차세대 ADAS 칩을 내놓고 있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업계 관계자는 “10년 전만 해도 Arm의 코어텍스와 양대산맥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RISC-V나 OpenSPARC 등 다양한 오픈소스 아키텍처까지 나온 상황이라 MIPS 아키텍처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다”며 “굳이 MIPS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대체재가 많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HW만으로는 부족하다... 접근법 달라진 IP 라이선스 사업

사실 지난 2018년 웨이브컴퓨팅이 ‘MIPS 오픈 이니셔티브’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공개 사용 라이선스긴해도 개발자들은 MIPS의 IP를 무료로 쓸 수 있었다. 웨이브컴퓨팅은 오픈 이니셔티브 출범 당시 출시한 지 1~2년밖에 되지 않은 코어도 개발자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나름 파격적인 조건이었던 셈이다. 한때 Arm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저전력에 강점을 가지고 있어 임베디드 시스템에 적용하기는 충분했다. 

하지만 MIPS 오픈 이니셔티브는 실패했다. 다른 아키텍처와 비교했을 때 MIPS가 가진 장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코어 IP 업체가 2~4곳 뿐이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EDA 툴 업체인 시놉시스(Synopsys)도 IP 코어 사업을 하고 있고, 오픈소스 코어 업체들도 많다”며 “MIPS 아키텍처는 다른 아키텍처 대비 스스로의 강점을 충분히 어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소프트웨어(SW)에서 Arm을 이길 순 없었다. MIPS가 한참 활동하던 2000년대 초중반은 물론 2010년대 초까지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완전히 별도로 개발됐던 탓에 굳이 소프트웨어 역량을 갖출 필요가 없었다. 

 

Arm은
Arm은 지난 2014년 사물인터넷(IoT)이나 임베디드 시스템에 주로 활용되는 코어텍스-M(Cortex-M) 마이크로제어장치(MCU)를 지원하는 오픈소스 OS ‘엠베드(Mbed)’를 내놓고 개발자 생태계를 확대해왔다./Arm

하지만 하드웨어 발전 속도가 느려지면서 업계는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해왔고, 지금은 하드웨어 IP 업계 또한 소프트웨어 역량이 필수가 됐다. 하드웨어 개발 툴은 기본으로 제공해야하고 아예 개발 단계에서부터 운영체제(OS) 등 소프트웨어 업체와 협력하거나 직접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성능을 최적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Arm은 지난 2014년 사물인터넷(IoT)이나 임베디드 시스템에 주로 활용되는 코어텍스-M(Cortex-M) 마이크로제어장치(MCU)를 지원하는 오픈소스 OS ‘엠베드(Mbed)’를 내놓고 개발자 생태계를 확대해왔다. 현재 엠베드 생태계에는 35만명 이상의 개발자가 활동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매년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웨이브컴퓨팅 입장에서는 MIPS 하드웨어 IP는 물론 소프트웨어에 투자할 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오히려 아예 별도 법인으로 빠져나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코어 IP 개발에 투자를 하는 게 MIPS 아키텍처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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