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 4부] ②㈜몽골, 은본위제 유라시아로 전파하다
[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 4부] ②㈜몽골, 은본위제 유라시아로 전파하다
  •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 승인 2020.03.22 2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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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은 혁신적인 과학기술을 개발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도자기를 만들지도 못했고, 금속을 주조하거나 직물을 짜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빵을 굽지도 못했지만, 몽골군대가 여러 문화를 차례로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주었다.

 

무역로, 침략로, 역참제

칭기즈칸이 공을 들여 세운 구조물은 성, 요새, 도시가 아니라 다리였다. 그는 역사상 어떤 인물보다 더 많은 다리를 놓았을 것이다. 군대와 물자를 더 빠르게 이동시키려면 수없이 많은 강과 개천을 건너야 했다. 원래 유목과 교역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몽골족은 일찍이 상인과 무역을 지원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몽골통일 이전에도 외국 상인들을 격려하고 지원했다. 상인들은 이웃 국가에 대한 정보를 몽고인에게 제공해 주었고, 몽골족은 유목경제에서 부족한 물자들을 상인을 통해서 구입했다. 칭기즈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유목과 수렵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상업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이에 따라 교역로를 개발하고 주위의 나라들과 교역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서하, 서요, 호라즘 왕국 등과 접촉하지만 곧 충돌이 발생하고 무역로는 침략로로 바뀌었다.

몽골제국 내 네 개의 중요한 동서 교통로, 즉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초원루트가 아시아와 유럽을 이었다. 13세기 실크로드의 가장 큰 특징은 초원루트와 천산북로가 사라이, 오트랄, 우르겐치를 중계기지로 하여 직접 키에프, 크라코우 또는 안티오키아, 베니스, 콘스탄티노플 등 유럽의 여러 도시와 직결되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몽골제국은 실크로드 전역에 얌(역전제)을 시행했기 때문에 동서교통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루어 팍스 몽골리카가 작동되었다.

몽골제국의 통일성이 유지되던 몽케칸의 치세에는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었다. 중국과 페르시아만을 잇는 바다의 간선루트는 몽골제국의 보호아래 더욱 발전하였다. 남송 시절부터 발전해온 해상교역은 몽골제국시대에 한층 더 발전하였다. 제국의 최대 항구도시 천주에서 화물의 10%를 세금으로 징수한 화물은 타 지역에서 징세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 들어온 보석과 진주와 값비싼 상품이 먼저 천주에서 내려졌으며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다. 천주에는 1만5000척의 해선이 수송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만과 동아프리카까지 항로가 뻗어 있었다.

이평래 ‘몽골제국과 동서문명의 교류’에 따르면 몽골제국을 축으로 하는 상업망은 훌레구 울루스와 우호관계를 갖고 있던 제노바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상인과 비잔틴상인이 참여하면서 지중해까지 확대되었다. 14세기부터 본격화되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몽골제국이 이룩한 세계규모의 경제교류와 발전이 그 배경이 되었다.

 

팍스 몽골리카의 동반자, 상인집단 오르톡

몽골제국 시대에 안전하게 열린 실크로드는 무역의 비약적인 활성화를 가져왔고, 이 교역에서 거둔 세금과 수익은 소수에 불과한 몽골족이 낮은 세금을 유지하면서도 거대한 제국을 경영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1231년 몽골제국은 이란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쳐있던 호라즘을 멸망시켰다. 이때부터 몽골제국은 이슬람계 관료를 등용시키고 이슬람 선진문화를 흡수하였다. 몽골 연구가 스기야마 마사아키에 따르면 몽골족에 이어 제2의 신분인 색목인(소그드인)의 전통과 혈맥을 계승한 이란계 무슬림 상업세력과 유목정치, 경제, 문화, 행정의 전반에 걸쳐 몽골의 교사 역할을 한 위구르 세력은 경제와 유통을 정부가 관리하는 데 조력자 역할을 했다.

왕족과 귀족들은 위구르인, 페르시아인 같은 무슬림 상인들처럼 ‘오르톡’이라는 상업조합을 만들었다. 이들은 정경유착과 전매제, 금융대출을 활용해 몽골제국의 상권을 독과점했다. 투르크어로 ‘동업자’라는 뜻을 가진 오르톡(ortoq)은 몽골제국시기 상인단체로 몽골 권력층과 손잡고 그들의 막대한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사업을 수행했다. 장사에는 소질이 없었던 몽골 왕족들과 각지의 크고 작은 귀족들이 오르톡의 자본가가 되고 그 정점에 대칸이 있었다. 쿠빌라이칸은 원나라 정부의 인허가 행정에 이들 상업세력 오르톡을 끌어들이고 비호해 주었다. 원나라의 고위 경제관료는 이란계, 위구르계 무슬림을 중심으로 구성하였고, 여진족, 한족 등 경리에 밝은 자가 하급관리가 되었다. 인가된 상업조합 오르톡은 상인이자 준공무원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몽골이 유지, 관리하는 육로, 수로, 해로의 운수, 교통, 숙박기관을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상품을 매매하거나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또는 세금을 걷다가 문제가 생기면 몽골제국의 군대를 부를 수도 있었다. 이들은 중국에서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여 고액의 이자를 요구하는 '알탈전(斡脫錢)'을 운용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몽골제국의 경제정책, 경영전략이 상인집단 오르톡과 하나가 되었다. 이 네트워크는 무슬림인 해양 기업가들과도 연결되었다.

▲1287년 원나라에서 발행된 '지원통행보초'라는 종이어음, 원나라에서는 지폐 받는 것을 거부하면 사형을 당했다. 지폐유통을 장려하기 위해 모든 금과 은을 몰수하기도 하였다. 쿠빌라이칸이 강력하게 시행한 지폐 유통은 상거래를 한단계 더 발전시키기도 하였으나, 1294년 폐르시아에서는 지폐의 강제유통으로 상거래가 붕괴되기도 하였다. 중국지역에서도 15세기에는 지폐유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쿠빌라이칸 시절 몽골제국의 중앙재정은 한정된 농산물 세수에서 벗어났다. 전매와 통상의 상업이윤에 부과된 세금이 세입의 8~9할이었다. 최대 수입원은 ‘염인’이다. 소금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소금과 연결된 유가증권인 염인을 중앙정부가 만들어 기축통화인 은과 연결시켰다. 제국의 확대로 팽창하는 통화수요에 대응시킬 만큼 은이 많지 않았으므로 소금 염인은 보조통화가 되었다. 간접세인 상세의 세율은 30분의 1을 원칙으로 하였다.

쿠빌라이 정권은 각 도시, 항만, 나루터,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내는 통과세를 완전히 없애고 모든 물품의 판매세는 마지막 매각지에서 한번만 지불하게 하였다. 그 결과 크고 작은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상업세의 납입도 은이나 염인으로 이루어졌다. 은은 매년 정월의 정례 사여를 비롯하여, 쿠빌라이칸과 그 후계자들이 갖가지 명목의 경제지원을 통해 왕족 일족을 자신들의 정권에 연결해 두는 수단이 되었다. 은을 대량으로 사여 받은 몽골 왕족들은 그것을 단골 상업조합 오르톡에게 대여하였고 오르톡들은 그 자금을 모아서 거대한 자본을 만들어 각종 상업활동을 조직하고, 제국 각지로 확대하여 물자를 돌게 하였다. 오르톡은 제국의 정치, 군사, 상업적 특혜를 바탕으로 유라시아 구석구석에서 사업을 키운다. 고려가요 ‘쌍화점’의 회회아비가 오르톡의 일원이며, 그들은 유라시아 전역의 희귀한 상품들을 고려에 팔아 커다란 이익을 거두었다. 유라시아 구석의 오지와 산골들이 오르톡의 상업활동으로 문명세계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유럽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피렌체 가문도 오르톡의 파트너가 되어 돈을 벌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 젤로가 걸작을 만드는 것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몽골, 거대한 경제, 금융 조직

몽골제국은 기마병의 위력으로 유라시아를 정복했다. 이후 무역국가에서 은과 오르톡을 통하여 거대한 경제, 금융조직, 주식회사 몽골로 변신했다. 800년전 몽골제국의 은본위제도와 지폐 유통 등 통화체계와 시장경제는 지금도 자본주의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제도이다.

칭기즈칸은 1227년 사망직전에 귀금속이나 비단을 바탕으로 한 지폐의 사용을 승인했다. 이후 지폐의 사용은 조금씩 확대되다가 구육칸의 시기에는 무분별하게 남용이 되기도 하였다. 1251년 몽케칸이 즉위하자 구육칸이 남발한 어음을 다 갚아주었다. 이에 대해 페르시아 역사학자 주베이니는 “역사의 어느 책에서든... 한 왕이 다른 왕의 빚을 갚았다는 이야기를 읽거나 들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기술하고 있다. 몽케칸은 팍스 몽골리카가 상인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무분별한 지폐 발행을 막기위해 지폐의 발행을 통제하고 표준화할 교초제거사를 만들어 지폐의 과잉 발행과 인플레이션을 막는 업무를 맡겼다.

몽골은 각 나라가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명칭과 무게대로 동전을 만들게 허용하면서도 ‘수케’라는 500조각짜리 은괴로 각 나라의 화폐를 연동시켜 보편적 가치체계를 확립하였다. [3]예를 들어 은괴 2kg은 중국에서는 '정(錠)', 중앙아시아에서는 '야스툭(yastuq)', 서남아시아에서는 '발리시(balish)', 몽골 초원에서는 '쉬케(süke)' 등으로 지칭되면서 통일성을 갖는 하나의 경제 단위로서 통용되었다. 은 4g은 '전(錢)’, 40kg은 '량(兩)'이었다. 은괴를 통해 화폐를 표준화하자 상인이나 행정관료들 모두 회계나 환전이 편해졌다. 화폐 표준화 덕분에 세금을 지방의 물자가 아니라 화폐로 받을 수 있었고, 이렇게 되자 몽골제국은 예산 수립 과정을 표준화 할 수 있었다. 정부 관리가 곡물, 화살, 비단, 모피, 기름 등으로 공물을 거두어들였다가 재분배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점차 현물이 아니라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중국에서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표준화된 은본위제도가 유라시아 전역에 구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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