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공급망 피해
유가 급락하면 산유국 중심 수요 직격탄

지난 1월 말 열린 LG디스플레이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LG디스플레이측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수요보다는 공급 측면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19는 중국 우한시 및 후베이성을 중심으로 전파됐다. 우한은 티안마⋅CSOT 등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 생산시설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코로나19가 중국 외 지역으로 전파되지만 않는다면 공급에 제한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오히려 업황에는 일부 긍정적일 수 있다는 조심스런 전망도 나온 시점이다.

유가 하락은 코로나19 사태에도 버티던 IT 제조업 수요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사진=픽사베이
유가 하락은 코로나19 사태에도 버티던 IT 제조업 수요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사진=픽사베이

유가 급락, 수요 무너지는 신호

 

그러나 9일 국제유가 급락은 이 같은 기대를 한 방에 무너뜨렸다. 이날 북해산 브렌트유는 배럴당 35.72달러(한국시간 9일 오전 10시 기준)로 하락했다. 유가 하락은 산유국들의 ‘오일머니’, 즉 글로벌 수요에 직결된다. ‘상저하고’로 예상됐던 올해 업황이 ‘상저하저’, 혹은 그 이하로 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이날 유가 급락은 코로나19 사태에 선제 대응하기 위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추진이 좌절되면서 발생했다. OPEC은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한 글로벌 수요 감소에 대비해 하루 원유 생산량 중 150만배럴 감산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OPEC의 이 같은 노력은 OPEC과 비회원국들과의 협의체 ‘OPEC+’에서 협상 결렬되면서 잠정 물건너갔다. 러시아가 감산에 동의지 않았고, 여기에 사우디가 보복성 증산에 나서면서 원유 시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미국 CNBC는 사우디의 증산이 현실화되면 “원유 가격이 배럴 당 20달러선까지 폭락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국제 브렌트유 가격. /자료=네이버
국제 브렌트유 가격. /자료=네이버

이는 가뜩이나 코로나19 탓에 얼어 붙어 있던 IT 제조업 시장에 한 가닥 남은 기대마저 앗아가는 격이다. 

연초 발생한 코로나19는 비록 업황에 불확실성을 더하기는 했지만, 공급에 더 많은 제한을 걸었던 게 사실이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나, 주요 선진국들로는 피해가 전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짝수해로서 도쿄올림픽 등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열린다는 것도 내심 기대감을 가졌던 이유다. 일본이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5세대(5G) 이동통신, 8K UHD 등 첨단 기술 상용화를 촉진할 계획이라는 점에서, 3분기 이후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 등 호황기도 예고됐다.

한 반도체 업체 고위 관계자는 “코로나19 영향을 제외하면 올해 하반기 IT 제조업황 전망은 2017~2018년에 버금갈 정도로 좋다”고 말했다.

 

지갑 비어가는 산유국…미국도 안전하지 않아

 

그러나 이 같은 전망들은 모두 수요가 굳건히 버텨 준다는 전제 하에 유효하다. 유가가 하락하면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과 중남미 산유국들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이는 IT 제조업을 비롯해 글로벌 경기에 직격탄이다.

미국 역시 저유가 늪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을 메이저 산유국으로 등극시킨 셰일가스 업체들이 버틸 수 있는 유가 한계가 20달러대로 추정된다. 유가가 20달러대로 떨어지면 미국에서 도산하는 셰일가스 업체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동안 초호황 가도를 달리던 미국 경제에도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사우디가 증산 계획을 포기하거나, 러시아와의 합의에 나서는 것이다. 사우디의 증산 선언은 낮아진 원유 가격을 생산량을 늘려 극복하려는 것인데, 원유가가 더 큰폭으로 빠진다면 실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실제 증산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사우디가 실제 증산에 나서지 않거나, 러시아와의 합의에 나설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배제할 수 없다. /사진=아람코
사우디가 실제 증산에 나서지 않거나, 러시아와의 합의에 나설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배제할 수 없다. /사진=아람코

러시아와의 협의에 나설 가능성도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우디 국영 기업인 아람코가 지난해 연말 상장되면서, 사우디가 단순히 러시아를 길들이기 위해 치킨게임을 벌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8일 아람코 주가는 기업공개(IPO) 이후 처음으로 공모가(32리얄) 밑으로 떨어진 30리얄에 그쳤다.

IPO 전이라면 단기 손실을 무릅쓰고 사우디가 치킨게임에 돌입하겠지만, 이제는 그럴 상황이 아니다. 사우디가 증산을 포기하고, 러시아와 협상에 나선다면 유가 및 수요 회복 시나리오는 아직 살아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유라시아그룹의 아이함 카멜 컨설턴트는 "OPEC+ 합의 실패 후 가장 가능성이 큰 결론은 사우디와 러시아가 합의점을 찾기 전에 제한적으로 유가전쟁을 벌이는 것"이라며 "합의가 도출될 가능성은 60%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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