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건 국내 SAFE 생태계 조성이지만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 입지 줄어들면서 우려 커져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가 진정한 ‘퓨어 파운드리’로 거듭난다. 시스템LSI 사업부와 경쟁 체제에 있었던 전용 반도체(ASIC) 서비스를 완전히 시스템LSI 사업부로 이관하기로 했다. ‘플랫폼 설계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도 중단했다.

이제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만 남았지만, 이를 추진해오던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의 입지가 줄어든만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공명지조’ 낳았던 ASIC 서비스, 시스템LSI로 일원화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의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은 말 그대로 ‘디자인 플랫폼’을 만드는 부서다.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의 주 업무는 크게 ▲시스템LSI 사업부를 포함한 고객사의 반도체 설계 지원 ▲삼성 파운드리 생태계(SAFE) 조성 등 두 가지였는데, 지금까지는 주로 설계 지원에 집중해왔다.

그 일환으로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은 글로벌 고객사에 ASIC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ASIC 서비스는 고객사가 설계 사양을 정하거나 동작 수준 설계까지 하면 그 다음 작업을 진행해 반도체 설계를 완성해주는 사업 모델이다. 최근 인공지능(AI) 가속기 등을 자체 개발하는 IT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호황을 맞았다.

 

반도체 설계 흐름도와 생태계 업체들의 활동 범위./KIPOST

문제는 시스템LSI 사업부도 ASIC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파운드리 사업부가 ASIC 서비스를 하기 시작하면서 삼성 내부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파운드리 사업부는 제조만 하는 ‘순수 파운드리’를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독립했는데, 왜 설계까지 손을 대냐는 의견과 ASIC 서비스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데다 원래 삼성전자의 강점이 ASIC이었던만큼 파운드리 사업부가 해도 무방하다는 의견이었다.

실제 삼성은 시스템LSI 사업부 초창기 시절 애플의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ASIC으로 설계하고 제조까지 한 뒤 납품했었다.

초기엔 단순 의견 대립에 그쳤지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두 사업부의 역할이 겹치면서 고객사의 프로젝트에 차질이 빚어졌고, 페이스북 등 잠재 고객사가 발주한 ASIC 프로젝트에 시스템LSI 사업부와 파운드리 사업부가 동시에 입찰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결국 삼성전자는 ASIC 서비스를 시스템LSI 사업부로 일원화했다. 올 초 정기 인사에서 디자인플랫폼개발실에서 ASIC 서비스를 맡았던 상무 2명이 시스템LSI 사업부로 이동했다. 디자인플랫폼개발실은 삼성전자 시스템LSI 등 주요 고객사의 백엔드 작업을 맡은 인력과 생태계 조성 인력만이 남았다.

업계 관계자는 “윗선에서 파운드리는 ASIC 서비스를 하지 말라고 못박았다”며 “처음에는 시스템LSI 사업부 백엔드 작업을 하는 인력들까지 시스템LSI 사업부로 옮겨간다는 말이 있었지만, 해당 인력들이 팀 인력의 3분의2 규모라 다 빼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RISC-V 코어 업체 사이파이브(SiFive)는 플랫폼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꾸려놨다./SiFive 홈페이지
RISC-V 코어 업체 사이파이브(SiFive)는 플랫폼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꾸려놨다./SiFive 홈페이지

파운드리 사업부가 추진해오던 ‘플랫폼 설계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도 중단됐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주축이 ASIC 인력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공개된 ‘플랫폼 설계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는 팹리스 고객사 및 파트너사가 반도체 제품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고성능컴퓨팅(HPC)·자동차·사물인터넷(IoT) 등 각 영역별로 플랫폼을 마련, 각 플랫폼에서는 사양만 정하면 삼성이 제공·지원하는 각종 공정·설계자산(IP) 중 저절로 적합한 IP가 추출돼 하드웨어 기술 언어(HDL)로 자동 변환되는 식으로 구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플랫폼 인프라가 필요한 건 ‘퓨어 파운드리’가 아닌 ASIC 업체나 시스템온칩(SoC) 설계 업체다. 이에 삼성전자는 ASIC 서비스를 시스템LSI 사업부로 일원화하면서 해당 프로젝트를 중단했고, 일부는 디자인서비스파트너(DSP) 및 가상 설계 파트너(VDP) 업체로 이관됐다.

업계 관계자는 “주로 ASIC 서비스를 하는 업체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고, 연내 정식 서비스 목표로 AI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다”며 “사실 파운드리 업체의 업무가 아니라, 처음에 이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부터 업계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고 말했다.

 

힘빠진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 생태계 조성은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의 두 번째 역할은 어쨌거나 SAFE 생태계 조성이다. 퓨어 파운드리를 선언한 이상 설계자동화(EDA) 툴, IP는 물론 디자인하우스, ASIC 서비스 업체 등 관련 생태계를 조성하는 건 기본 중 기본이다. 

하지만 주 사업 중 하나였던 ASIC 서비스가 시스템LSI 사업부로 통합되면서 일각에서는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의 입지가 예전만 못해 국내 SAFE 생태계 조성에도 힘이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ASIC 서비스도, 플랫폼 설계 인프라도 개발실을 이끌고 있는 박재홍 부사장이 강력 주장해 추진된 걸로 알고 있다”며 “이번 인사로 입지가 줄어들긴 했지만, 파운드리 생태계를 잘 알고 있는 게 그나마 박 부사장 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5월 14일(현지시간) 미국 산타클라라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19'에서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정은승 사장이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삼성전자
지난 5월 14일(현지시간) 미국 산타클라라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19'에서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정은승 사장이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삼성전자

아직 국내 SAFE 생태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라 업계는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앞서 삼성전자는 국내 DSP 협력사들에게 인수합병을 통해 적어도 100명 이상 규모의 DSP 업체를 3곳 정도로 만들라고 요구했다. 규모의 경제를 확보, TSMC의 가치사슬협력자(VCA) 생태계를 뛰어넘는 자체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기조 아래 RISC-V 코어 업체 사이파이브(SiFive)의 계열사 세미파이브는 세솔반도체에 이어 최근 다심이라는 디자인하우스 업체를 인수, 규모를 키웠다. 아직 실무 엔지니어는 많지 않지만, 올해 시리즈 B 투자를 유치해 인력을 300여명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짰다. 에이디테크놀로지도 아르고를 인수, 삼성전자의 DSP 생태계에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고 알파홀딩스를 비롯한 여러 디자인하우스 업체들이 규모를 키우기 위해 인수합병을 검토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SAFE 생태계 조성에 손을 놓으면 이 모든 움직임이 물거품이 된다. 아직은 국내 생태계 조성이라는 명분 아래 국내 업체들을 중심으로 SAFE 생태계를 꾸리고 있지만, 삼성 입장에서 글로벌 디자인하우스 업체들과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 삼성전자 측은 국내 생태계에 이렇다할 말을 전하지 않았다.

한 디자인하우스 업체 대표는 “국내의 경우 전방 시장인 팹리스 업황이 수년째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 삼성만 믿고 판을 키우기가 쉽지 않다”며 “만약 회사를 키워놨는데 삼성전자가 다른 글로벌 업체와 협력을 강화하면 우리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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