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팹리스 업계, '업계'라고도 하기 힘든 설계자산(IP) 업체들
그나마 스타트업이 등장한 건 호재... 세대 교체 절실

AI⋅IoT 분야는 오픈소스 ISA를 활용한 자체 코어 아키텍처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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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메모리 반도체 생태계는 각 주체가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디자인하우스들이 모여 생태계가 꾸려진 듯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팹리스 업계는 몇을 제외하곤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고, 설계자산(IP) 업계는 ‘업계’라고 하기 힘든 수준이다. 

 

첩첩산중 팹리스 업계

국내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은 팹리스다. 국내 팹리스 업계는 아래로는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에, 위로는 대기업 사이에 껴 십수년간 샌드위치 신세에 놓였었다. 

이들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신제품 개발은 물론, 사업 방향까지 바꿔가며 수년간 악황과 싸워왔다. 하지만 한정된 전방 시장에서 글로벌 업체들을 능가할 수 있는 기술력 혹은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텔레칩스
사진=텔레칩스

대기업 계열사를 제외한 팹리스 중 그나마 호실적을 내고 있는 건 텔레칩스(대표 이장규)와 실리콘마이터스(대표 허염)다.

텔레칩스는 2000년대 초중반 일찍이 차량 인포테인먼트(IVI) 시장에 도전,  현대·기아차의 차량 IVI용 시스템온칩(SoC)의 80%를 납품할 정도로 안착했다. 회사는 고객사 다변화를 위해 올해 글로벌 완성차(OEM) 및 티어원과 협력, 양산 프로젝트 수 건을 따냈다. 

1세대 팹리스 실리콘마이터스는 오디오 칩으로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이 회사는 모바일용 전력관리반도체(PMIC)로 나스닥 상장까지 꿈꿨지만, AP 업체들이 PMIC에까지 손을 뻗치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성장세가 꺾였다.

올해 호실적을 올린 건 지난 2016년 아이언디바이스를 인수하면서 시작한 오디오 칩 사업 덕이다. 작년까지는 PMIC 매출이 오디오 칩 매출보다 컸지만, 올해 오디오 칩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매출의 절반 이상을 오디오 칩이 차지할 것으로 회사는 설명했다. 연매출은 2200억원 정도로 전망된다.

 

정회인 넥스트칩 상무(왼쪽)와 마톤 페어(Marton Feher) AI모티브 최고기술책임자(CTO)가 10일 기술 협약식에서 악수하고 있다./넥스트칩
정회인 넥스트칩 상무(왼쪽)와 마톤 페어(Marton Feher) AI모티브 최고기술책임자(CTO)가 10일 기술 협약식에서 악수하고 있다./넥스트칩

나머지 팹리스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도전한 업체들은 높은 장벽을 좀처럼 넘지 못하고 있고, 매출 악화를 견디다 못해 팹리스에서 디자인서비스로 바뀐 업체도 있다. 

CCTV용 영상처리장치(ISP)와 상보성금속산화물반도체(CMOS) 이미지센서(CIS) 업체였던 픽셀플러스(대표 이서규)와 넥스트칩(대표 김경수)은 각각 차량용 카메라 SoC 및 ISP 업체로 변신했다. 

넥스트칩은 인공지능(AI)을 결합, 비전(Vision) 기능을 더한 ISP 솔루션을 개발해 올해 양산하기 시작했지만 물량이 많지 않다. 지난 2016년부터 작년까지 3년 연속 적자였고 4분기 흑자를 기대하고 있다.

픽셀플러스는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중국 현지 자동차 업체들을 공략했으나 아직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연매출은 지난 2015년 1062억원에서 지난해 378억원까지 줄었고, 영업이익도 2016년 이후 줄곧 마이너스다. 올해 실적도 좋지 않을 것으로 회사는 설명했다.

픽셀플러스 관계자는 “올해도 적자를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 현지 업체들과의 협력은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카카오의 AI 스피커 ‘카카오 미니’(사진)에는 넥셀의 AI 스피커 솔루션이 탑재됐다./카카오
카카오의 AI 스피커 ‘카카오 미니’(사진)에는 넥셀의 AI 스피커 솔루션이 탑재됐다./카카오

삼성전자의 저가형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설계 업체로 알려진 넥셀(대표 강태원)은 매출에 타격을 입으면서 전용 반도체(ASIC) 서비스 업체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넥셀은 삼성이 중저가 AP 개발을 중단하면서 삼성 사물인터넷(IoT) 플랫폼 ‘아틱(Artik)’으로 눈을 돌렸지만 이마저도 삼성이 작년 사업을 접으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인공지능(AI) 스피커용 AP도 퀄컴 등 글로벌 기업들의 공세에 밀렸다.

넥셀은 올해 코아시아홀딩스에 지분의 70% 가량을 넘기고 내년부터 ASIC 서비스를 본격화하기로 했다. 코아시아는 국내에서보다 중화권에서 더 유명한 IT 부품 유통 업체로, 삼성전자 시스템LSI 출신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코아시아와 협력, 중화권 고객사들에게 ASIC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복안이다.

업계 관계자는 “팹리스 업체들 사이에서 지금처럼 ‘각자도생’으로는 생존이 어렵다며 서로 협력해야한다는 얘기도 나온다”며 “전방 시장이 예전만 못하고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겨우 연명하고 있는 업체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업계에 호재가 있다면 스타트업의 등장이다. 수년간 팹리스 업계에서는 매년 수 개의 스타트업이 세워졌다가 개발비(NRE)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유령처럼 사라지는 일이 반복됐다. 

올해는 다르다. AI 반도체를 개발하는 퓨리오사AI(대표 백준호)는 지난달 네이버 등으로부터 80억원 규모의 시리즈 A 투자를 받았다. 내년 샘플을 만들어 고객사에 보낼 계획으로, 이미 고객사 확보도 끝났다. 

팹리스 업체 A사 대표는 “스타트업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생태계가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라며 “지금 팹리스는 대부분 1·2세대 팹리스라, 세대 교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업계’라고도 하기 힘든 설계자산(IP) 업체들

가장 심각한 건 IP다. IP는 반도체 설계의 재료다. 핵심 IP는 팹리스가 만들지만, 그렇지않은 대부분의 IP는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고 칩에 집어넣는다. 일일이 모든 기능을 하는 IP를 개발하기엔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IP 업계는 워낙 업체들이 없어 ‘업계’라고 하기 어렵다. 텔레칩스의 자회사이자 영상 코덱 IP 업체 칩스앤미디어(대표 김상현)가 상장사 중에선 유일한 IP 업체다. 이외에는 아날로그 IP를 개발하는 씨자인(대표 김정표) 정도가 있다.

올해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영상 코덱 IP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블루닷(대표 전민용)이 새롭게 이 대열에 합류했지만, 블루닷을 포함해도 10개사가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IP는 전부 외국 업체들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온다는 얘기다. 

삼성전자조차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에 들어가는 상당 부분의 IP를 외국 업체에 라이선스해온다. 중앙처리장치(CPU)는 Arm의, 그래픽처리장치(GPU)는 Arm과 AMD의 IP를 쓴다.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팹리스들도 IP 라이선스 비즈니스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쓸만한 IP들을 국내 어떤 업체가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플랫폼도 없다보니,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해외 업체들의 IP를 주로 쓴다”며 “정부에서 이같은 IP 플랫폼을 만든다고 했는데 많은 업체들이 참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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