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PGA' 편견 탈피 위해 '플랫폼' 선언… 도구는 ACAP·SW
남은 건 생태계 한계 극복… 개발자 지원 및 교육 늘려야

그동안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는 중앙처리장치(CPU)·그래픽처리장치(GPU)와 전용반도체(ASIC) 사이에 낀 존재였다. CPU·GPU 대비 확산성은 낮고, ASIC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맞춤형으로 설계하지는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FPGA 업계 리더인 자일링스는 이 같은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플랫폼 업체’를 표방하고 나섰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문호를 열고,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CPU·GPU에 버금가는 확산성과, ASIC에 뒤지지 않는 설계 자유도를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자일링스가 플랫폼 업체가 되기 위해 손에 든 무기는 소프트웨어다. 이번 ‘자일링스 개발자 포럼(XDF) 2019’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도 소프트웨어였다.

 

자일링스는 왜 플랫폼 업체가 되어야만 하나

 

CPU와 GPU, FPGA의 구성차이./GitHub
CPU와 GPU, FPGA의 구성차이./GitHub

사실 FPGA는 플랫폼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반도체다. 레고로 건물을 만들 듯, 특정 기능을 하는 회로 블록(Block)을 원하는 대로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드웨어(HW) 레벨에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블록을 통해 특정 기능을 더할 수도 있었다.

다른 반도체와 비교해보면 ASIC처럼 ‘레고’부터 만들 필요도 없고, CPU·GPU처럼 하드웨어가 고정돼있지도 않다. 원하는 기능들을 올릴 플랫폼으로는 최적이다.

하지만 FPGA는 CPU·GPU만큼 널리 쓰이지 못했다. 비싼 것은 둘째 치고, 숙련된 엔지니어가 없으면 개발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CPU·GPU는 비록 하드웨어는 고정돼있지만 소프트웨어로 이 일, 저 일을 시킬 수 있었다. FPGA는 하드웨어 개발 능력이 필요했고, 그것도 일반 하드웨어 엔지니어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접어들면서 복잡성은 더 커졌다. 기존 폰 노이만 구조에서 벗어난 새로운 구조의 반도체를 개발해야했다. 지금 현재까지도 추론(Inference)용 AI 반도체 시장에는 뚜렷한 강자가 없다. 

CPU·GPU는 전력효율·가격·성능·면적의 4박자를 모두 갖출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 받고 있다. 값비싼 돈을 주고 하드웨어 엔지니어들을 데려온 기업들은 개발 난이도가 어렵지만 레고부터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는 ASIC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FPGA 업체 입장에서는 ASIC에 밀릴 수 있는 위기이자 CPU·GPU만큼 대중화될 수 있는 기회다. 자일링스가 플랫폼 업체라는 카드를 꺼낸 이유다.

플랫폼 업체를 선언한 건 지난해 부임한 빅터 펭(Victor Peng) 최고경영자(CEO)다. 그가 꿈꾸는 건 FPGA의 대중화다. 

그의 부임 이후 자일링스는 인수합병(M&A)으로 소프트웨어와 설계자산(IP) 역량을 대폭 보강하고 있다.

마케팅 전략도 바뀌었다. 자일링스의 연중 최대 행사인 ‘XDF’는 협력사·고객사와 일부 현지 언론을 대상으로 진행하다 지난해부터 미국·유럽·일본·한국 등 세계 각국의 IT 미디어들까지 초청했다. 접점을 늘려 대중들에게 ‘자일링스’라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다.

 

첫 번째 도구는 ACAP, 두 번째는 소프트웨어

 

자일링스의 ACAP 기능 다이어그램./자일링스
자일링스의 ACAP 기능 다이어그램./자일링스

자일링스가 플랫폼 업체를 선언하면서 가장 먼저 내놓은 제품은 적응형 컴퓨트 가속화 플랫폼(ACAP)이었다. ACAP은 기존 CPU·GPU·FPGA 각각에 들어있는 컴퓨트 엔진인 스칼라·벡터·프로그래머블 엔진을 한 데 결합한 이기종(Heterogeneous) 컴퓨트 플랫폼이다.

이 제품은 기존의 반도체 설계 방식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C 코드 등 소프트웨어 언어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AI 프레임워크 카페(Caffe)·텐서플로우(TensorFlow) 등에서 코드를 따와 칩을 개발하는 것도 가능하다. 

수 시간이 걸리던 하드웨어 재구성(reconfigure)도 수 밀리초(㎳) 내에 하게 만들어 개발 속도를 가속화할 수 있게 했다는 점도 주요 특징 중 하나다.

두 번째 도구가 올해 XDF 2019의 주제이기도 했던 소프트웨어다. 자일링스는 기존 FPGA 제품군도 소프트웨어(SW) 개발자와 AI 엔지니어들이 그들의 언어로 설계할 수 있는 ‘바이티스(Vitis)’였다.

바이티스는 방대한 오픈 소스 라이브러리와 도구를 활용할 수 있는 통합 개발 플랫폼이다. 이 단일 플랫폼에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동시 개발할 수 있고, 클라우드부터 엣지까지 여러 응용처에 적용할 수 있게 FPGA를 제어할 수 있다.( KIPOST 2019년 10월 2일자 <자일링스,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개발 간 장벽 없앴다… '바이티스(Vitis)' 공개> 참고)

 

플랫폼 업체를 위한 세 번째 도구는…

제품도 플랫폼이 됐고, 개발도 플랫폼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FPGA는 CPU와 GPU만큼 대중에게 알려져있지 않다. 개발자 커뮤니티도 적다. 

남은 건 생태계다. FPGA 업체 중에선 가장 폭넓은 생태계를 갖고 있지만, 자일링스가 경쟁해야하는 상대는 CPU와 GPU다. 아무리 개발하기가 쉬워도 써먹을 수 있는 IP와 도구가 부족하다면 굳이 FPGA를 택할 이유가 없다. 

우선 자일링스는 오픈소스 커뮤니티를 통해 개발자들과의 접점을 늘리고 있다. 하지만 자일링스의 생태계 안에서 오픈소스로 소프트웨어와 IP 라이브러리를 제공하는 업체가 몇이나 될까. 그동안 수많은 오픈소스 반도체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생태계를 확장하는 데 실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오픈 소스로 제공되는 ‘바이티스’도 현재는 8개 분야에서 총 400여개의 IP 라이브러리 옵션을 제공한다. AI 알고리즘 트렌드가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는 걸 감안하면 이걸로는 부족하다. 꾸준히 IP 라이브러리가 보강되지 않으면 오히려 ‘갇힌 플랫폼’이 되버리고 만다는 얘기다.

자일링스는 생태계 내 협력사들이 추가적으로 IP 라이브러리를 지원할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누가 언제 무슨 IP 라이브러리를 제공할지에 대해선 답을 내놓지 않았다. 

 

빅터 펭 자일링스 CEO가 'XDF2019'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자일링스
빅터 펭 자일링스 CEO가 'XDF2019'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자일링스

FPGA 교육 프로그램도 늘려야한다. AI 개발자들이 GPU에 친숙한 이유는 엔비디아가 십수년간 대학과 개발자를 대상으로 꾸준히 교육 프로그램을 늘려왔기 때문이다. 국내만 해도 매년 DLI(Deep Learning Institute) 행사를 AI 개발자를 양성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GPU로 AI를 배운 이들은 현업에서 또다시 GPU를 써서 AI를 개발한다.

하지만 FPGA는 국내에선 전파방송통신교육원·반도체설계교육센터와 민간기관  1곳에서 기초 설계 과정만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바이티스가 나왔다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하드웨어 개발자만큼 FPGA를 잘 활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자일링스의 개발 지원도 강화돼야한다. 자일링스의 엔지니어 역량은 본사와 중국 등 일부 국가에만 밀집돼있어 다른 국가에서는 도움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한다. SKT가 자일링스의 FPGA로 AI 가속기를 개발할 때 내부 디지털신호처리장치(DSP)의 가용성을 95%로 올린 게 특별한 일이어서는 안된다. 누구나 FPGA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게끔 도와야한다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 FPGA는 비싸고 어렵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며 “FPGA 업체 스스로 이같은 편견을 깨려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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