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갈수록 DB 격차 벌어지는 소재산업
대기업도 비용 관점에서 탈피해 '리스크 헤지' 측면에서 봐야

“소재 생산은 통계와 데이터베이스(DB)의 마법입니다. 선발 업체를 단숨에 따라 잡기 힘든 이유죠.”

한 광학소재업체 임원은 한국이 일본 소재 산업에 열세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첨단 IT 산업에서 완제품과 부품은 일부나마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이 가능하다. 내부를 열어보고 부품들을 나열하다 보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얼추 알아낼 수 있다.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은 지 10여년 만에 중국 화웨이가 스마트폰 판매량에서 애플을 따라잡은 비결이다.

소재는 다르다. 소재의 물성을 결정하는건 시간⋅온도⋅양이다. 언제 원재료를 투입하는지, 몇 도씨(℃)의 온도로 얼마만큼 가열하는지, 원재료 투입 비율은 어떻게 조정하는지가 불량품과 양품을 결정한다. 이는 소재 내부를 아무리 들여다 봐도 답이 없다. 

머크의 OLED 소재. /사진=머크
머크의 OLED 소재. /사진=머크

따라서 소재 하나를 새로 개발하는 것은 지난한 시간과의 싸움이다. 각 시간⋅온도⋅양을 변수로 놓고, 계속 실패해보는 것이다. 소재에 따라 변수의 가짓수는 수십개 이상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모든 변수를 넣고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가장 최적화 된 시간⋅온도⋅양을 도출할 수 있다. 시장 독점력을 가진 일본 업체들은 이 최적화된 변수의 조합을 DB로 구축해가고 있다.

전문가들, 특히 산업에 가까울수록 소재 국산화가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건 실패에 대한 기회비용을 그만큼 잘 알기 때문이다.

기자는 소재 국산화는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그 반대다. 소재 국산화 작업은 하루라도 빨리 시작할수록 이득이다. 앞서 얘기한 것 처럼 소재 생산은 통계와 DB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루 늦게 시작하면 선발 업체들은 하루치의 DB를 더 쌓을 것이고, 후발 업체인 국내 업체들이 따라 잡기는 그 만큼 더 어려워진다. 우리 소재가 일본에 10년을 뒤졌다면 앞으로 10년을 20년 같이 DB를 쌓아야 따라 잡을까 말까다. 요컨대 소재 산업 국산화는 앞으로 남은 많은 날 중에 오늘이 가장 쉽다.

다만 소재 산업 국산화를 위해서는 수요자인 대기업의 각오도 달라져야 한다. 이번 3대 반도체⋅디스플레이 수출 규제 사태에서 보듯, 미진한 소재 국산화의 1차 피해자는 삼성⋅LG⋅SK다. 

한 기업 구매팀 관계자는 국산 소재 신규 채택률이 낮은 이유를 이 한마디로 설명한다.

안석현 콘텐츠팀장(기자).
안석현 콘텐츠팀장(기자).

“국산 신규 소재를 양산 라인에 도입했다가 불량이라도 발생하면 고스란히 담당자가 문책을 받게 됩니다. 그냥 쓰던 회사, 쓰던 제품 계속 사용하는 게 속편합니다.”

그동안 국내 대기업은 소재 국산화 작업을 철저히 ‘비용’ 측면에서 접근했다. 국산 소재를 도입해서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이, 불량이 발생했을 때 치러야 할 금액보다 반드시 커야만 국산 기술을 도입했다. 기업의 이윤 극대화 관점에서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마주하면서, 소재 국산화는 단순히 비용 절감 뿐만 아니라 리스크 헤지(Risk Hedge) 측면에서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과제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G20에서 자유무역과 자유시장경제의 수호자를 표방했던 일본은 바로 다음날 전략물자를 무기화했다. 앞으로도 틈만나면 소재 수출을 앞세워 외교적 목적을 관철하려 할 것이다. 40여년 일본 소재 산업에 의존해 온 국내 첨단 IT 산업이 지금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10년 뒤에는 지금보다 더 심한 종속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산업의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라도 당장 오늘부터 소재 국산화를 전사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소재 국산화의 길은 오늘이 가장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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