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아키텍처 바꾸는 반도체 업계… 인텔·Arm 대안은 오픈 소스 아키텍처

시스템 반도체 설계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무어의 법칙이 통하던 시절, 업계는 공정을 미세화하면서 반도체 성능을 개선했다. 하지만 공정 미세화로 인한 성능 개선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설계구조(Architecture) 자체를 바꿔 성능을 높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무어의 법칙은 끝났다… 공정에서 설계로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트랜지스터의 집적도가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통설이다. 지난 1965년 고든 무어 박사가 주장할 당시부터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반도체 업계는 공정을 미세화해 무어의 법칙을 지켜왔다.

하지만 근래들어 무어의 법칙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공정 미세화로 인한 투자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것과 반대로 성능·전력소모량·면적(PPA)의 개선 속도는 느려졌기 때문이다. 공정 개선 효율이 줄어든 셈이다.

 

▲무어의 법칙이 발표되기 전인 1945년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트랜지스터 집적도 수준. 2005년 이후 급격히 개선 속도가 줄었다./이코노미스트
▲무어의 법칙이 발표되기 전인 1945년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트랜지스터 집적도 수준. 2005년 이후 급격히 개선 속도가 줄었다./이코노미스트

공정으로 인한 PPA 개선이 어렵다면 반도체 업계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설계다.

삼성전자에 AP 설계를 맡겨왔던 애플은 지난 2010년 아이폰4의 모바일 AP ‘A4’부터 자체 개발 비중을 늘려왔다.

지난 2012년 아이폰6에 담긴 ‘A6’부터 Arm의 명령어 세트 아키텍처(ISA)를 변형하기 시작했고, 지난 2017년에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아키텍처도 자체 개발해 적용했다. 신경망처리장치(NPU)도 마찬가지다. 애플은 맥 PC에 들어가는 CPU도 개발하고 있다.

삼성전자 또한 ‘엑시노스 8 옥타’부터 맞춤형 CPU 코어를 적용했다. Arm 아키텍처를 쓰지만, ISA를 라이선스해 상위 개념인 마이크로 아키텍처를 자체 개발했다. 이와 함께 야누스 엔진(Janus Engine)과 이기종 컴퓨팅을 지원하는 ‘SCI(Samsung Cache-coherent Interconnect)’ 등을 개발해 AP에 반영했다.
 

‘설계=아키텍처+@’인데… 한정된 아키텍처

시스템 반도체 설계의 기본은 아키텍처다. 반도체가 건물이라면 아키텍처는 뼈대다. 반도체 설계 업체는 주로 아키텍처 공급 업체에 라이선스를 받아 해당 아키텍처를 바탕으로 필요한 설계자산(IP)들을 덧붙여 반도체를 설계한다.

건물을 리모델링한다 해도 뼈대를 바꾸지 않으면 큰 변화를 주기 어렵다. 아키텍처도 마찬가지다. 각 아키텍처마다 특장점은 있지만, 아키텍처별 IP 생태계는 크게 차이가 없다. 애플·삼성 등 대기업들이 아키텍처를 자체 개발하거나 맞춤화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업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코어 아키텍처는 한정돼있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나 마이크로제어장치(MCU)는 98% 이상 Arm의 ‘코어텍스(Cortex)’ 아키텍처를 쓴다. PC·서버 프로세서(CPU) 아키텍처는 인텔 ‘x86’과 IBM의 ‘PowerPC’ 천하다.

GPU 아키텍처도 마찬가지다. 엔비디아는 GPU 자체를 팔지, 아키텍처를 라이선스하지 않는다. 나머지 업체는 Arm, 인텔, 이매지네이션이다.

 

▲Arm 코어텍스-M0 디자인 비용./Arm
▲Arm 코어텍스-M0 디자인 비용./Arm

비용도 만만치 않다. MCU 아키텍처 중 하나인 ‘Arm 코어텍스-M0’의 라이선스 비용과 로열티 비용을 합치면 최소 37만 달러(약 4억4000만원)다.

AI처럼 용처에 따라 필요한 알고리즘이 다르고 해당 알고리즘의 동작이 최우선인 반도체는 한정된 아키텍처를 쓰는 것 자체가 성능 개선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아키텍처를 반영하고 인터페이스 등 기타 IP를 추가하는 과정에서 쓸데 없는 기능이 들어가 전력소모량이 늘어나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에 알고리즘을 구현하는 영역(block)이 줄어들거나 심지어 알고리즘 자체를 바꿔야하는 경우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새로운 기능을 반도체에 집어넣으려면 아키텍처를 바꾸거나 새로운 IP를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며 “IP를 개발해도 아키텍처가 이를 지원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유일한 대안, 오픈소스 코어 아키텍처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은 Arm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모든 프로세서를 설계한다. 다시 말해 Arm의 아키텍처 라이선스가 중단되면 기출시한 프로세서는 물론, 향후 프로세서도 아키텍처부터 다시 설계해야한다는 얘기다. Arm의 거래 중단 선언이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이실리콘이 프로세서를 설계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유일한 선택지는 오픈소스 코어 아키텍처인 ‘RISC-V’와 ‘MIPS’다.

‘RISC-V’는 2010년 UC버클리에서 만들었지만 공개 소프트웨어 형태로 다운로드 받아 누구나 활용 가능하다. 라이선스 및 로열티 비용도 없고, 이 아키텍처로 코어를 개발하더라도 소스 코드를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MIPS 아키텍처는 지난해 웨이브 컴퓨팅(Wave Computing)이 인수했고, 작년 말 오픈 소스로 공개됐다.

물론 오픈소스 코어 아키텍처를 활용한다 해도 당장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픈소스 코어 아키텍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 맞춤화다. 코어 아키텍처부터 IP까지 필요한 기능대로 원하는 성능만큼 넣어 반도체를 설계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기존 Arm의 코어 아키텍처에 맞게 짜여져 있는 반도체의 경우 프로그래밍 언어부터 일일이 수정해야한다.

업계 관계자는 “말 그대로 신경쓸 부분이 많다는 얘기”라며 “하이실리콘이 오픈소스 아키텍처로 프로세서를 재설계한다 해도 최소 1년 반~2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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