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8일~4월12일

대덕전자 회장 겸 해동과학문화재단 이사장인 김정식 회장(오른쪽)이 모교인 서울대학교에 500억원을 기부했다. 사진은 지난 2월18일 기금 출연 협약식 모습.
대덕전자 회장 겸 해동과학문화재단 이사장인 김정식 회장(오른쪽)이 모교인 서울대학교에 500억원을 기부했다. 사진은 지난 2월18일 기금 출연 협약식 모습.

 

우리나라 인쇄회로기판(PCB) 산업의 산증인이었던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겸 해동과학문화재단 이사장이 향년 90세를 일기로 지난 11일 타계했다. 지난 2월 사재 500억원을 서울대 인공지능(AI) 연구에 쾌척한 지 두달만에 안타깝게 별세했다.  

고 김 회장은 현재 대덕전자와 대덕GDS(이후 대덕전자와 합병), 와이솔 등 전자·자동차 부품을 아우르는 대덕전자 그룹을 일궈내면서 국내 PCB 산업의 상징 그 자체였다. 전자제품의 신경망으로 비유되는 필수 부품인 만큼 지난 2017년 기준 한국 PCB 산업 규모는 약 13조6000억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산업 생산액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세계 3위를 차지한다.

고인은 지난 1929년생으로 함남 조선전기공고를 졸업하고 1956년 서울대 전자통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던 중 6·25전쟁이 터져 공군에서 복무하다, 전역 후 전자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고 김 회장은 지난 1969년부터 PCB 사업에 눈을 떴다. 그는 전자산업이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것으로 확신하고 핵심 부품인 PCB에 주목했다. 대덕전자는 자체 기술로 PCB를 개발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처음에는 통신기용 단면 PCB를 양산했으나 수입에 의존하는 PCB를 대체하지 못했다. 그러다 1973년경 일본 출자기업인 한국동양통신과 한국동경전자에 첫 국산 PCB를 공급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해에는 금성사에서도 PCB를 주문받았다. 이후 1980년 컬러TV 방송이 허용되면서 대덕전자는 날개를 달았다. 1980년대 중반은 반월공단으로 공장을 옮기면서 처음 자동화설비를 도입하기도 했다. 1984년에는 당시 캐나다 노던텔레콤(노텔)과 PCB 공급 계약에 성공하면서 세계 시장에서도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후 PCB 시장에 수많은 기업들이 진출하면서 대덕전자도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990년대부터 다시 성장세를 써나갔다. 1996년 5월에는 대덕전자 자회사인 대덕필리핀(DDPI)이 탄생했다. 대덕필리핀은 국내 PCB업체가 최초로 만든 해외생산기지였다. 이후 대덕은 2002년 휴대폰용 빌드업(Build-Up) PCB를 세계시장 점유율 1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2007년 스마트폰의 출현 등 전방 시장이 변화하면서 대덕전자의 주력 제품 라인업도 점점 진화해왔다. 고인이 일군 대덕전자는 지난해 기준 매출 9600억원, 직원 2000여명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고 김 회장은 사업과 더불어 이공계 인력 양성에도 힘써왔다. 지난 1991년 사재를 들여 해동과학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공계 연구자 및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고인의 모교인 서울대학교에는 총 657억원의 기부금을 전달, 누적 기부금으로 서울대에서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고 김 회장은 “기술이 곧 사람이다”라는 말을 늘 강조하며 과학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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