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 3부] ⑬팍스 몽골리카, 몽골제국 지구촌을 통합하다
[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 3부] ⑬팍스 몽골리카, 몽골제국 지구촌을 통합하다
  •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 승인 2019.04.0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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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유산, 근대를 열다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에서 김호동 작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13세기 초에 건설된 몽골제국은 70년에 가까운 정복전쟁의 결과 유럽과 인도 일부를 제외하고 유라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초기의 약탈적, 파괴적 성격이 점차 희석되어 갔고 농경민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몽골 지배층의 이해도 그만큼 넓어졌다. 그들은 농경 정주문명의 후원자로 변신하여 역사상 전례 없는 광역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문물이 교류하고 융합하는 장을 마련해 주었다. 서로 잘 모르던 유라시아의 문명들은 통신, 상업, 기술, 정치가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제국에서 소통하고 교류하며 통합되었다.

그 후예들에 의한 몽골제국의 정복활동은 동양과 서양을 지리적으로 연결시켰다.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이 유럽으로 전래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사 통합을 이뤘다. 몽골제국이야 말로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 통합의 시대를 연 세계화의 선구자다.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서유럽, 이집트, 인도, 동남아, 일본도 정치, 경제, 문화, 기술, 과학, 사상,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몽골제국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다. 몽골제국이 지구촌 시대를 연 것이다. 훗날 학자들은 세계적으로 번영한 13~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라고 명명했다.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몽골제국의 세계 정벌 지도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몽골제국의 세계 정벌 지도

 

▲위 지도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여몽연합군이 동원된 원세조 쿠빌라이의 일본침략 내용을 확대했다. 한국 마산의 위치가 잘못 표시되었다.
▲위 지도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여몽연합군이 동원된 원세조 쿠빌라이의 일본침략 내용을 확대했다. 한국 마산의 위치가 잘못 표시되었다.

몽골제국이 유럽을 점령하지 않은 이유가 칭기스칸의 아들 우구데이칸이 급사해서 바투의 유럽원정군이 회군을 한 이유도 있지만 당시 유럽은 지지리도 가난한 지역이여서 가장 값비싼 전리품이 헝가리왕의 천막이었을 정도로 초라해 원정을 할 가치를 못 느꼈던 점도 있다.

▲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1246년 몽골제국의 구육칸이 교황에게 보낸 서신. 교황이 구육칸에게 기독교국가에 대한 침략을 멈추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한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내용은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짐에게 복종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국가의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다. 유럽은 이 편지를 받고 몽골이 재침략할까봐 엄청 떨었으나, 몽골군이 이집트의 노예부대 맘루크군에 패한 이후에 더 이상의 서방원정은 좌절되었다.
▲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1246년 몽골제국의 구육칸이 교황에게 보낸 서신. 교황이 구육칸에게 기독교국가에 대한 침략을 멈추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한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내용은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짐에게 복종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국가의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다. 유럽은 이 편지를 받고 몽골이 재침략할까봐 엄청 떨었으나, 몽골군이 이집트의 노예부대 맘루크군에 패한 이후에 더 이상의 서방원정은 좌절되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 보면 몽골제국은 독일의 광부들을 중국으로 데려오고 중국의 의사들을 페르시아에 이식했다. 선거, 공립학교, 우편제도, 대포, 주판 등 우리가 유럽이 만들었으리라 짐작했던 문명 제도는 사실 몽골제국이 만들었다. 가난했던 덕분에 몽골의 침략을 피한 변방 유럽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교역, 기술 이전 등 몽골제국의 모든 혜택을 입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주장하듯 근대의 세계 체제는 유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몽골제국의 산물이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면서 전쟁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심도 만들었다. 몽골제국의 시스템은 근대 세계 체제의 기반이 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져 자유로운 교역과 교통, 지식의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현대에도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몽골제국은 이데올로기와 종교에 집착하지 않고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고, 그 답을 찾으면 제국의 모든 지역에 전파하였다. 단순히 물자의 교환이 아니라 지식의 교환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중국의 침술은 무슬림에게 알려졌고, 무슬림의 뛰어난 수술 방법은 중국으로 전파하였다. 달력과 연감을 통일시켰고, 인도 수학자들의 도움으로 제국의 모든 물자를 기록했다.

몽골제국의 학자들은 중국, 아랍, 그리스의 지리 지식을 조합하여 수준 높은 지도를 만들었고, 무역을 장려하려고 항구건설을 장려하고 예전보다 훨씬 더 정확한 해도를 만들었다. 농경국가였던 중국 대륙의 송나라 등은 전통적으로 농업을 권장하고 상업을 제한해서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올려 놨는데, 몽골제국에서는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정부관리 밖에 없을 정도로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시켰다. 반면 송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학자들을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는데 이는 거지보다 높지만 매춘부보다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

유목과 교역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몽골족은 일찍이 상인과 무역을 지원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몽골통일 이전에도 외국 상인들을 격려하고 지원했다. 상인들은 이웃 국가에 대한 정보를 몽골인에게 제공해 주었고, 몽골족은 유목경제에서 부족한 물자들을 상인을 통해서 구입해왔다. 칭기즈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유목과 수렵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상업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에 따라 교역로를 개발하고 주위의 나라들과 교역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서하, 서요, 호라즘 왕국 등과 접촉했고 곧 충돌이 발생해 교역로는 침략로로 바뀌었다.

 

동서 교역, 정치의 중심, 팍스 몽골리아

몽골제국의 네 개의 중요한 동서 교통로인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초원루트는 아시아와 유럽을 이었다. 13세기 실크로드의 가장 큰 특징은 초원루트와 천산북로가 사라이, 오트랄, 우르겐치를 중계기지로 하여 직접 키에프, 크라코우 또는 안티오키아, 베니스, 콘스탄티노플 등 유럽의 여러 도시와 직결되었다는 점이다. 몽골제국은 실크로드 전역에 얌(역전제)을 시행했기 때문에 동서교통은 유례없이 원활해져 팍스 몽골리카가 시작되었다.

몽케 칸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몽골제국의 통일성이 유지됐다. 당시에는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치안이 좋았다.

중국과 페르시아만을 잇는 바다의 간선루트는 몽골제국의 보호아래 더욱 발전하였다. 남송시절부터 발전한 해상교역은 몽골제국시대에 한층 더 확대됐다. 제국의 최대 항구도시 천주에서 화물의 10%를 세금으로 징수한 화물은 타 지역에서 징세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 들어온 보석과 진주와 값비싼 상품이 먼저 천주에서 내린 다음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다. 천주에는 1만5000척의 해선이 수송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만과 동아프리카까지 항로가 뻗어 있었다.

이렇게 안전하게 열린 실크로드는 무역의 비약적인 활성화를 가져왔고, 이 교역에서 거둔 재원은 소수에 불과한 몽골족이 낮은 세금을 유지하면서도 거대한 제국을 경영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이 시기 실크로드 교역을 주도하던 이들은 몽골족 다음 제2의 신분인 색목인 중 소그드의 전통과 혈맥을 계승한 이란계 무슬림과 손잡았다. 그들은 유목정치, 경제, 문화, 행정의 전반에 걸쳐 몽골의 교사였던 위구르 상업세력을 이용하여 경제와 유통을 관리하려 하였다. 몽골의 왕족과 귀족들은 위구르인, 페르시아인 같은 무슬림 상인들과 함께 오르톡이라는 조합을 만들고 전매제, 금융대출 등으로 몽골제국의 상권을 독점했다. 고려가요 ‘쌍화점’의 회회아비가 오르톡의 일원이다. 그들은 유라시아 전역의 희귀한 상품들을 고려에 팔아 커다란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제국의 인허가 행정에 이들 상업세력 오르톡을 끌어들이고 비호해 주었다. 인가된 오르톡은 몽골이 유지∙관리하는 육로, 수로, 해로의 운수, 교통, 숙박기관을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결국 몽골제국의 경제정책, 경영전략은 오르톡과 하나가 되었다. 이 네트워크는 무슬림인 해양 기업가들과도 연결되었다.

▲1287년 원나라에서 발행된 '지원통행보초'라는 종이어음. 원나라에서 지폐 받는 것을 거부하면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지폐유통을 장려하기 위해 모든 금과 은을 몰수하기도 하였다. 쿠빌라이칸이 강력하게 시행한 지폐 유통은 상거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도 하였으나, 1294년 폐르시아에서는 지폐의 강제유통으로 상거래가 붕괴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도 15세기에는 지폐유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287년 원나라에서 발행된 '지원통행보초'라는 종이어음. 원나라에서 지폐 받는 것을 거부하면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지폐유통을 장려하기 위해 모든 금과 은을 몰수하기도 하였다. 쿠빌라이칸이 강력하게 시행한 지폐 유통은 상거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도 하였으나, 1294년 폐르시아에서는 지폐의 강제유통으로 상거래가 붕괴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도 15세기에는 지폐유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몽골제국의 중앙재정은 한정된 농산물의 세수에서 나아가 전매와 통상의 상업이윤으로 확대됐다. 세입의 8~9할을 여기서 거두었다. 최대수입원은 염인 즉 전매품이된 소금 교환권의 판매대금이었다. 소금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소금과 연결된 유가증권 염인을 중앙정부가 만들어 기축통화인 은과 연결시켰다. 제국의 확대로 팽창하는 통화수요에 대응시킬 만큼 은이 많지 않았으므로 소금 염인은 보조통화가 되었다. 간접세인 상세의 세율은 30분의 1을 원칙으로 하였다. 쿠빌라이 정권은 각 도시, 항만, 나루터,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내는 통과세를 완전히 없애고 모든 물품의 판매세는 마지막 매각지에서 한번만 지불하게 하였다. 그 결과 크고 작은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상세의 납입도 은이나 염인으로 이루어졌다. 은은 매년 정월의 정례 사여를 비롯하여, 쿠빌라이칸과 그 후계자들이 갖가지 명목의 경제지원을 통해 왕족 일족을 자신들의 정권에 연결해 두는 수단이 되었다. 은을 대량으로 사여받은 몽골 왕족들은 그것을 단골 오르톡에게 대여하였고 오르톡들은 그 자금을 모아 거대한 자본을 만들어 각종 상업활동을 조직하고, 제국 각지로 확대하여 물자를 돌게 하였다. 왕족들과 각지의 크고 작은 귀족들이 자본가가 되고 그 정점에 대칸이 있었다. 몽골제국은 은과 오르톡을 통하여 거대한 경제, 금융조직으로 변한 것이다. 몽골제국의 은본위제도와 지폐유통 등 통화체계와 시장경제는 지금도 자본주의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제도이다.

몽골의 몰락과 실크로드의 붕괴

14 세기 몽골 제국의 몰락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루어졌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통합의 붕괴를 초래했다. 몽골제국에 이어 중국대륙에 등장한 명나라는 극단적인 폐쇄정책을 썼으며 시장경제를 쇠퇴시켰다. 몽골제국시대에 건조했던 대형선박도 모조리 파괴하였고, 농업기반인 명나라 경제와 주자학 사상은 이를 답습한 조선에 경제적 사상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책을 참고하면, 팍스 몽골리카는 몽골제국의 영역 내부 뿐만 아니라 그 외부에 있던 유럽 지역도 같이 공유한 역사적 경험이다. 유럽은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새로 도입된 문물을 바탕으로 대항해시대로 진입에 성공하면서 해외식민지의 개척과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을 밟아 갔지만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그렇지 못했다.

몽골제국 붕괴이후 유럽을 제외한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 정치적 전통을 계승하고 모방하려는 계승 국가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그들은 모두 내륙 지향적 제국이라는 면에서 공통점을 보였다. 이들이 대항해시대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은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지 능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국 명나라는 몽골과 만주의 유목민들과 사생결단의 대결을 계속해야 했고, 결국 18세기 중반 청나라가 최후의 유목국가를 정복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유라시아 역사를 움직여 온 두개의 축 가운데 초원의 유목국가는 사멸했지만, 대양을 장악한 유럽은 몽골제국의 계승자들을 압도할 준비를 이미 마친 뒤였다. 따라서 유럽의 성공은 몽골제국이 남긴 정치적, 군사적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몽골제국이 남긴 ’세계사의 탄생’이라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승자독식의 세계시장

필자가 약 30년 동안 비지니스 현장에서 보았던 가장 큰 흐름은 전세계적인 승자독식 현상이었다. 90년대 초반만해도 그렇게 많았던 자동차 회사들이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몇 개의 지배자로 축소됐다. 2000년 닷컴 거품 때 수만개에 달했던 인터넷 기업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텐센트, 바이두, 알리바바, 네이버, 카카오 같은 소수의 기업들이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 휴대폰 제조회사가 수십개에 달했는데 모두 망하고 삼성과 LG 두 개 만 남았다.

스마트폰의 출현은 2등 그룹의 텃밭인 게임기, MP3, 디지털카메라, 네비게이션 등을 하나하나 집어삼키며 애플과 삼성 등 선두업체들의 독식구도를 만들었다. 전자상거래 회사 쿠팡이 수조원씩 적자를 내면서도 계속 투자를 하는 것은 승자가 되어 독식을 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속해있는 반도체 업계에도 선두 5개업체가 세계 시장전체 투자액의 60% 이상을 쓴다. 우리회사에서 장비를 구매하는 회사들이 왜 사는지 알아보면, 애플, 삼성, LG, 화웨이 등 소수의 글로벌 대기업들에게 납품하기 위해 장비를 사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두 회사의 2019년 이익이 코스피 제조사 439개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은 전세계 수십개에 달하던 메모리 생산회사들이 치킨게임으로 서너개로 줄어들면서 승자독식의 과점체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수의 선두업체가 해당업계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전세계, 대다수 업종이 직면한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제는 80:20의 파레토 법칙의 사회를 넘어 1%의 승자들이 99%의 부를 차지하는, 승리한 1등에게만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고 뛰어난 2등마저 패배자로 만드는 승자독식의 사회로 가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은 ‘승자독식사회’라는 책에서 유례없는 양극화와 승자독식현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그로 인한 무한경쟁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운 꼴찌는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인간적인 표현이지만, 숨가쁘게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는 가슴 답답한 소리다. 생존을 향한 불꽃 튀는 자본주의 경쟁 대열에서 꼴찌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원래 ‘승자독식’은 스포츠계나 연예계에서 통용되던 논리였는데, 이제는 일반 소비자 상품, 법률, 의료, 교육 등 거의 모든 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다. 요즘 이야기 많이 되는 골목상권 문제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승자독식현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시장의 이익이 모두에게 적절하게 배분되지 않고 소수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사회적인 재앙이자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낭비를 초래한다.

한국사회 갈등의 대다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승자독식으로 일어나지만, 그 해결책을 찾는 것 또한 쉽지 않다. 21세기 들어 더 가속화되고 있는 승자독식 현상은 결코 지속가능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도 없다. 그래서 OECD, IMF 같은 국제기구와 주요국가들이 포용적 성장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구체적 실천방안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

세계 6위의 수출강국 한국의 운명은 한국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한국 기업들은 사업 덩치를 더 키우고 고객가치를 강화해 전세계 선두권에 진입하든지, 작은 규모로 다른 경쟁사가 쫓아올 수 없는 특화된 서비스를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일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회사도 니치 시장에서 경쟁사들이 고객들에게 제공하지 못하는 새로운 솔루션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세계 시장을 선도해 나가야만 생존할 수 있다. 한국에 있는 작은 경쟁사들 보다는 해외의 대형 경쟁사들과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긴 호흡으로 핵심경쟁력을 강화해 나아갈 것이다.

한국정부와 사회가 한국기업들이 세계시장에 나가서 싸워 이길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800년전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유목민들의 군사력과 상업력으로 팍스 몽골리카로 승자독식을 구현했듯이 한국의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승자가 되어야 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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