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3부] ⑫중국 땅에 칭기즈칸 묘가? 우리 유전자는 국가주의를 배척한다
[김정웅의 실크로드 경영학-3부] ⑫중국 땅에 칭기즈칸 묘가? 우리 유전자는 국가주의를 배척한다
  •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 승인 2019.03.1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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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전쟁, 막북공정

▲몽골 노인울라의 흉노 무덤에서 발견된 펠트 카페트 직물.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칸의 제국, 몽골 전시회’에 출품됐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제작됐다. 직물임에도 2000여년 동안 보존돼 주목을 받고 있다. 색실로 인물들을 수놓았는데, 직물의 원산지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지역으로 확인돼 당시 서역과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펠트에 나온 인물들의 얼굴은 투르크계라는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몽골 노인울라의 흉노 무덤에서 발견된 펠트 카페트 직물.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칸의 제국, 몽골 전시회’에 출품됐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제작됐다. 직물임에도 2000여년 동안 보존돼 주목을 받고 있다. 색실로 인물들을 수놓았는데, 직물의 원산지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지역으로 확인돼 당시 서역과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펠트에 나온 인물들의 얼굴은 투르크계라는 것이 확실히 느껴진다.

초원 서쪽의 터키도 흉노와 돌궐을 자기들 조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몽골 초원역사의 종주권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사실 몽골족이 몽골고원으로 들어오기 전인 흉노와 돌궐시대에는 투르크족 중심으로 몽골초원의 지배가 이루어졌다고 봐도 될 것이다. 터키는 몽골고원에 있는 돌궐의 명재상 톤유크 유정지 발굴에 투자를 하고 사람을 보내기도 하였다. 돌궐, 투르크족, 터키라는 단어들이 모두 같은 어원이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시대에는 위구르로 천도를 계획하고 몽골고원으로 복귀를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청나라 시대 몽골사람들을 가두었던 감옥. 청나라는 내몽골인들과는 만몽연합정권을 만들었지만 외몽골사람은 얼마나 강하게 탄합 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사도세자가 사형당한 뒤주보다 크기는 훨씬 크지만 극심한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있는 몽골 초원임을 감안했을 때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는 청나라 시대 몽골사람들을 가두었던 감옥. 청나라는 내몽골인들과는 만몽연합정권을 만들었지만 외몽골사람은 얼마나 강하게 탄합 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다. 사도세자가 사형당한 뒤주보다 크기는 훨씬 크지만 극심한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있는 몽골 초원임을 감안했을 때

몽골, 러시아와 중국의 악연

중국인은 울란바토르 길거리를 걸어 다니지 못한다고 한다. 2010년 이후 혐중주의가 확산돼 중국인을 대상으로 폭행하는 집단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몽고’는 ‘우매한 옛날 것들’이라는 멸시의 표현인데 몽골도 중국인을 ‘돼지를 기르는 놈’이라는 뜻의 ‘호자’라고 부른다. 중국과 오랜 역사를 같이 한 외몽골이 100년전 중국을 버리고 러시아를 택한 것도 중국과의 오랜 악연에서 기인한다. 가끔 중국인으로 오인당한 한국인이 뭇매를 맞는 수가 있어 어떤 교민들은 택시를 타면 먼저 “나는 솔롱고스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러시아의 모스크바 반도체 전시회에 나갔더니 러시아 친구가 “부스 앞에 작은 태극기를 걸어 두면 러시아 고객들이 중국회사로 오해하지 않아 훨씬 더 편하게 부스를 방문할 것”이라고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 중국을 둘러싼 15개국 어디에서나 환영받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중국의 지도자들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서구열강에 의한 아편전쟁의 상처를 아직도 씻지 못하는 중국의 배타적 국수주의와 중화주의를 주변국들이 결코 환영할 수 없다.

몽골인들은 중국이 같은 핏줄이자 생활권을 공유하던 내몽골지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외몽골을 떠나 중국에 붙은 내몽골인데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다. 이와 별개로 중국이 막북공정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며 몽골과 몽골인을 자신들의 일부로 간주하려는 것에 두려움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몽골은 제조업 기반이 없어 중국과의 수출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달라이 라마의 몽골 방문으로 몽골-중국간 갈등이 심해질 때 중국에서 베이징발 울란바토르향 열차를 3일간 중단시켰는데 3일 사이에 물가가 2배로 폭등하자 몽골 정부가 중국에 백기투항을 한 사례도 있다.

중국 내몽골자치구에 있는 칭기즈칸 무덤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많다. 칭기즈칸은 몽골초원 동부의 오논강 유역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속한 보르지긴 씨족도 이 지역에 살았던 부족이다.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은 외몽골의 한가운데인 오르콘강 유역에 있다. 현재 중국에 속한 내몽골 지역에서 칭기즈칸이 금나라, 서하 등과 전투를 벌였지만 여기에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군다나 생애 대부분을 몽골 스텝지대와 중앙아시아의 원정길에서 보낸 칭기즈칸이 중화민족이나 하나의 중국에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지만 현대의 중국은 칭기즈칸을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고 그의 무덤을 내몽골 지역에 만들어 놓았다. 고구려, 발해에 대해서는 속지주의를 적용해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중국은 몽골과 칭기즈칸에 대해서는 속인주의를 근거로 막북공정이라는 황당한 프로젝트를 한다. 중국이 자기네 땅 내몽골을 토대로 속인주의와 속지주의 중 중국에 유리한 부분만 취사선택한 것이다. 또 하나의 코미디이다.

원나라는 없었다?

중국은 왕조의 계보를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으로 크게 분류하고, 쿠빌라이가 집권과 함께 중국적인 왕조인 ‘원(元)’을 창건했다고 주장한다.

김호동이 쓴 ‘아틀라스 중앙 유라시아사’를 보면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제국의 수도를 당시 ‘키타이’라고 불리던 내몽골, 북중국으로 옮기고 중국식 연호와 제도를 채택했다고 한다. 1271년에는 주역에 나오는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대원 (大元)이라는 글자를 택해 국호를 반포하기도 했다. 비록 한문자료에는 그런 오해를 유발시키는 기록들이 많이 보이지만 실제로 쿠빌라이를 비롯하여 당시 몽골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전, 중반 비문들을 보면 ‘대원이라 불리는 대몽골 울루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대원’이 몽골 제국의 한자식 명칭에 불과한 것이며 쿠빌라이가 새로운 왕조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라디스 앗 딘의 ‘집사’ 같은 페르시아 자료는 물론 다수의 몽골문 연대기 어느 곳에서도 쿠빌라이가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대원’이라는 중국의 왕조가 아니라 서방의 3대 울루스와 다른 수많은 소형 울루스를 포함하는 대몽골 울루스의 최고 지배자 칸이라는 생각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몽골제국의 차가타이 울루스, 주치 울루스, 홀레구 울루스도 14세기 중후반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자신들이 몽골제국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몽골제국이 4대 지역정권 칸국으로 분열되었다는 생각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속상하겠지만, 몽골제국 황제들에게 원나라는 중국이란 나라를 다스리기 쉽게 하려고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든 카안 울루스의 중국식 이름이었을 뿐 그들은 대몽골울루스(몽골제국)라는 몽골 연합체를 다스린다고 생각했었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도 대내외 포지셔닝에서 원나라를 벤치마킹했다. 중원과 남쪽에서는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를 칭하고, 북방에서는 몽골제국을 계승한 ‘칸’이 되는 여러 얼굴을 가진 왕조였다. 티베트는 스승의 나라로 존중해 주었고, 위구르는 식민지 취급, 만주는 성지 취급하여 만주족 외의 민족은 출입금지, 몽골은 일찍 복속된 내몽골과 후에 정복된 외몽골을 따로 취급, 분리했다. 칭기즈칸의 성씨를 계승하는 내몽골의 보르지긴 황족과 청나라 황족은 정략 결혼을 했으며 청의 황제는 칸을 겸했다. 당시 청나라와 만몽연합정권을 세운 것은 내몽골이지 외몽골이 아니다. 청나라는 오히려 몽골고원의 외몽골에 대해서는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역사는 현재의 해석이다. 지구 수십바퀴 해외출장 다니면서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필자가 유목민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21세기 중국, 일본, 한국의 역사관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갑갑한 프레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필자 생각에는 한국인의 역사관은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유럽의 스테이트 내셔널리즘(State-Nationism)을 기준으로 삼았다. 또 서구 제국주의에 받은 상처 때문에 동북아 3국이 공통적으로 국수주의가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 관 중심으로 역사 연구 지원이 되면서 21세기임에도 편협한 역사관을 이어가고 있다고 본다. 발해는 우리의 역사이고, 함경도와 그 근처에서 발원한 청나라는 왜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모호한 고대 역사를 현대의 영토기준으로 무리하게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동북아 3국이 동일하다. 심지어 저 멀리 터키까지 비슷한 프레임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의 ‘지노2.0(GENO 2.0)’ 프로젝트에 참가해 내 조상을 찾아보니 6만년 전부터 2만년 전까지 직계부계와 직계모계가 링컨, 칭기즈칸, 나폴레옹, 마리 앙뜨와네트와 겹친다.

유발 하라리가 주장한 ‘사상, 종교, 국가, 법률이 인간이 만든 신화’라는 개념에 백프로 동의한다. 필자 생각에는 State-Nationism은 21세기 초에는 이제 수명을 다하고 있다. 인류가 눈부시게 발전시켜 놓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계관과 역사관이 필요하다. 시대에 맞는 보편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져야 한국인들에게 미래가 있다. 국수주의, 애국주의 열풍이 불고 있는 중국은 그 역풍을 맞을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20-30년간 지난 수천년간 인류역사의 소외된 주인, 유목민의 관점에서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세계관과 역사관에 대해서 공부할 것이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학자들의 프로젝트를 지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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